1800년대 인물을 정리하면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근대사의 가장 핵심을 피하고 식민사관과 정면 대결을 피하는 비겁한 짓이라 어떻게든 들여다봐야만 한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왕실 업무인 돈녕부 지사와 수원부 유수를 지낸 조선 말기 문신이다. 조선이 아직 국가 관제의 기틀이 남아 있던 시절의 거의 마지막 문신 세대
유길준(兪吉濬, 1856년 11월 21일~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의 관직명은 ‘外務參議겸 攝政祕書官’이다. 뛰어난 수재로 근대 최초의 일본, 미국 유학생이었다고 평가한다.
폄하된 조선의 영의정 이미지가 망국의 구한말, 갑오경장이라는 내정 개혁 기구 군국기무처라는 근본 없는 일제의 기구에 이름이 올라 최초의 내각 총리가 된 김홍집에까지 이르렀다
고영철은 궁궐의 왕통이 무너진 상태를 등에 지고 1876년(고종 13) 식년시에 1등 합격한 실력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 발행 실무업무를 담당했다
1952년 5월에도 경찰 당국에서는 계속되는 미 군수품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인 선원에 대해 엄중한 경계를 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그들의 범죄는 계속되었다. 도둑고양이에게...
해방 직후, 한국에 잔류한 일본인 중, 일부는 정말 추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일본으로 귀환하기에 앞서, 멀쩡한 기계를 일부러 망가뜨려서 고물로 만들어 처분해 갔고 이러한 행태는...
한국전쟁 시기에 자행된 무차별 폭격은 수많은 전쟁난민과 고아를 남겼다. 그 중에는 잔존일본인 고아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후방지원을 위해 한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잔존일본인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1950년대 신문기사들의 단편들 속에서도 잔존일본인의 실체는 확인 가능하다. 적어도 1950년 1월, 3월에 이어서 6월에도 발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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