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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일본인9. 스즈키 다다요시(鈴木忠義, 1950년 당시 30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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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잔존일본인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잔존에 성공했고 1950년대에도 각종 범죄에 관여하며 암약하였다.
잔존일본인8. 야마시타 사토키치(山下里吉, 1950년 당시 32세, 히로시마 출신) 외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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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야마시타 형제는 해기사(海技士) 자격증을 취득해, 동해 어장에서 조업하다가 패전을 맞았다. 그들은 해방 후에 밀수업을 통해 검은 돈을 벌어들이다가 결국 꼬리가 밟혔다. 
잔존일본인7. 모토다 마스미(元田增己, 1949년 당시 50세, 전남 무안) 7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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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청은 1947년 4월 현재 잔류일본인 남성은 없다고 보도했다. 앵무새처럼 군정청의 말을 받아쓰기 바빴던 신문보도를 통해 잔존일본인의 존재는 은폐돼 버렸다. 
잔존일본인6. 가타야마 센이치로(片山泉一郞, 한국명 김대석, 1948년 당시 42세, 서울・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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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일본인과 친일파들이 결탁해 무수한 범죄를 저질렀다. 특히 바다를 이용한 밀항, 밀수출이 끊이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밀수출은 경제를 교란시키는 중대한 범죄였다. 
잔존일본인5. 시미즈 노부오(淸水信雄, 1947년 당시 18세,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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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일본인들은 다양한 일에 종사했는데 육지에 비해, 밀수입에 관련된 이들은 일부 발각되곤 했다. 특히 잔존일본인과 친일파들은 해방 직후에도 해협을 자유로 오가며 밀수를
잔존일본인4. 마쓰모토 가메조(松本龜藏, 1947년 당시 65세,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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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3일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군정청의 발언을 인용해, 더 이상 남한에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처 및 기술자, 송환관계자(세화회)를 제외하고 일본인은 없다고...
잔존일본인3. 누끼요시(1948년 당시 29세, 대구) 외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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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서울 YMCA는 일본인들로 가득 찼다. 경성일본인세화회가 마련한 조선어강습회 청강을 위해 잔존을 희망하는 이들이 모여든 것이다. 조선의 핵심요직과 
잔존일본인2. 조선총독부 촉탁 가토 간카쿠(加藤灌覺, 1870~?,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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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는 30년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어 촉탁으로 근무했다. 해방 후에도 왜성대(예장동 부근)에 살며 천수를 누렸다. 이러한 사실은 초대 국립중앙박물 이재원 관장의 증언을 통해서도
잔존일본인1. 다나카 후토시(田中太, 1948년 당시 44세,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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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토왜(土倭)나 잔존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아직 결정적인 단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치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해방 후 경상도와 서울(특히 청량리)에 일본인이 다수...
한국 잔류를 꿈꾼 극작가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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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 극작가로 알려진 무라야마가 한국에서 잔류를 희망했다. 잠시 식민지 조선에 체류했던 재조(在朝) 일본인이 잔류를 희망했을 정도라면, 식민지 조선에서 나서 자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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