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을 떠난 초기 이민자들의 처지에서 기독교와 신식 교육은 필요충분조건이긴 했지만, 국내에서 전통 가치관을 견지한 채, 신식 교육과 독립운동을 실현할 수는 없었을까. 답은 없다, 이다. 이 불가역적 상황이 과연 내부 문제로만 기인한 결과였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회사에서 망국의 땅, 무주공산의 정부에 이민자 고용을 제의했다. 우리 쪽이 백성들의 일터를 위해 이민을 정책 삼아 달라고 요구한 게 아니다. 이미 하와이에는 중국, 일본,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노르웨이, 영국, 미국, 아프리카계 등이 사탕수수 경작에 동원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이 적대관계인데 우리가 미국 영토 내에서 항일운동을 간접적으로나마 도울 수 있었던 상태는 미국과 우리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 간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미주 지역 한인 단체 결성을 미국과 일본이 對日 소모전을 치르게 할 요량으로 묵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가난한 망국의 백성이 외국에 값싼 노동자로 팔려나가는 과정이 묻히고 개화의 물결에 동참한 듯 서사가 뒤바뀐 것이다. 데쉴러는 이 과정에서 데쉴러 은행(Deshler Bank)까지 만들어 이민자들이 하와이 농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50달러의 여행 보증금을 빌려주는 등 금융 지원을 제공했고 알렌도 막대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키워드는 1937년 강제 이주다. 1860년을 전후한 압록강 두만강(이 어느 강이었는지 찾는 강역 해석의 문제는 별개로 치고) 너머로 떠난 1차 디아스포라가 두 세대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가톨릭 5대째, 기독교 5대째 집안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조선족 동포들은 조선이라고 알려진 나라가 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산지사방으로 퍼지면서 생겨난 유랑민이 그 기원이다. 중공의 국공내전과 6.25 전쟁,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대륙의 변방으로 쫓겨 가 터전을 잡고 그 신생 중공의 ‘공민’으로서 살아온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전후로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의 후예들인 조선족과 조심스럽게 만났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 문화적 차이가 컸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고구려 만주라는 ‘고토’에 대한 열망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다는 건 부인할 수...

조선족의 한국 사회 등장은 세계적 탈냉전과 함께 한민족의 탈냉전과 다문화 사회의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점에 학계는 주목했다. 한민족의 일부 대신 ‘조선족’으로 인식한 세태 변화는 냉전의 희생양이 된 우리 스스로 짓밟힌 민족 문제를 놓고 타자화, 객체화 해버리면서 수동적인 시선으로 변했다

조선족 고려인 등의 선조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특정 국가로 디아스포라를 떠난 경우인데 정부는 당시는 합법적인 국가가 부재했다는 이유로 재외동포 자격에서도 탈락시킨 것은 유연하지 못하고 권위주의적인 재외동포 접근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행태였다.

한국 사회와 조선족 동포의 첫 번째 만남은 순수했고 또한 애절한 동포애와 동질의식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지만, 개혁개방정책으로 자본주의 질서에 급격하게 편입해야만 했던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 사회에 앞다투어 들어오면서 순수의 시대는 가고 생존경쟁과 차별의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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