品
Logo
Corea든 Korea든, 품격은 이름보다 먼저다
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지금
Now
751 Diaspora
유산
Heritage
인문
Humanity
未冷尸
Mirengsi
정치
Politics
언론
Media
Thumbnail
1903년 1월 첫 공식 이민단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수많은 한인들이 태평양을 건너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고된 중노동을 하며 정착
category-icon

아픈 손가락

칼럼
jeffrey

47. 하와이 디아스포라 단체 조직 전후 상황

Views
0
2026. 08. 21
  • 기존 식민사관이 하와이 이민사를 개신교의 항일 운동 지원으로 규정하며 민족주의의 본질을 왜곡해왔다고 비판합니다.
  • 하와이 한인 이민은 생존을 위한 상부상조의 필요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외세 저항과 정치적 열망을 담은 이념 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 하와이 이민은 고종의 백성 매각이 아니라, 미국 공사 알렌과 사업가 데쉴러가 조선 정부의 기능 마비를 틈타 노동력을 착취한 인신매매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 개신교 선교사 조지 존스가 교인들을 설득해 하와이 이민을 부추긴 것은 단순한 선교 활동이 아닌 노동력 송출의 일환이었으며, 이는 종교와 정치적 의도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 안창호 부부의 미국 본토 이민과 하와이 이민을 분리하여 서술하는 기존 역사관은, 이승만과 개신교 중심의 독립운동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와이 디아스포라 단체의 성격을 추적하기 전에 먼저 하와이 이민의 시작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러나 기존의 식민사관 기조가 발목을 잡아 독자의 편견을 깨는 작업이 쉽지 않아, 자릿세를 걱정하며 좌판에서 물건 파는 심정이라 펼치고 싶지 않았다.
 
쇠락하는 현대 문명을 바라보면서 민족주의는 사관을 세우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생물학적 종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요즘이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민족주의 전통 왕조 국가가 해체되고 그 현상과 실체를 엄폐해온 지난 세월은, 의문시되는 미래 세계와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불안증으로 열매 맺었다. 아직도 전 세계에는 왕정과 황실이 공산주의 자본주의 체제와 동행하고 있는데 한국은 왜 그 오랜 역사를 뺏기고 기독교 국가로 재탄생해야 했을까. 그 근원에 바로 이 잃어버린 민족애가 깔려 있다는 사실, 민족 그 자체만으로 소멸의 조건을 갖췄다고 보인다.
 
식민사관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서막을 개신교의 항일운동 지원으로 규정해 왔다. 그 결과, 현대 한국 기독교가 민족 분단을 조장하고 외면하는 이상한 현상에 아무도 의구심을 제기하지 않는 도그마에 빠진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잠들지 않는 이념 놀이의 모순 가장 밑바닥에 하와이 이민의 역사가 깔려 있다.
 
근대 이민은 상부상조의 유전자가 함양된 경향을 드러낸다
아래는 미주 한인 단체 변천 과정을 정리한 표다.

날짜

단체

지역

성격·비고

1903.8.7

신민회

(新民會)

하와이 호놀룰루

최초의 하와이 한인 사회·정치단체

임치정·홍승하·윤병구·문홍식 등 참여 1904년 해산

1903.9.28

상항친목회

(桑港親睦會)

샌프란시스코

안창호 등이 조직. 미국 본토 초기 한인단체이며 공립협회 전신

1905.4.5

공립협회

(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

상항친목회 등을 확대·통합

미국 본토의 대표적 초기 항일·교민자치단체

1905.5.3

에와축목회

〔자료 표기〕

하와이 오아후

하와이 지역 소규모 교민조직

1905.12.9

대동교육회

(大東敎育會)

캘리포니아

파사디나

김우제·장경 등이 중심. 교육·계몽을 통한 국권 회복 운동

1906.3.16

와이파후공동회

하와이 오아후

지역 교민단체

1906.5.10

혈성단(血誠團)

하와이 올라

항일·교민단결 조직

1906.6.4

자강회(自强會)

하와이 올라

자강·교육·민족계몽 운동, 회보 발간

1906.6.4

공진회(共進會)

호놀룰루

하와이 한인 계몽·항일운동 조직

1906.6.4

노동동맹회

하와이 선창지역

노동자 중심 교민조직

1906.12.2

의성회(義成會)

하와이 마우이

항일·동족단결 조직

1907.1

대한신민회

(大韓新民會)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안창호·이강(李剛)·임준기·신달윤 등,국권회복 위한 구국 운동과 한인 단합

1907.2.3

국민공동회

하와이 올라

하와이 한인 항일단체

1907.2.5

국민단합회

(國民團合會)

하와이 마우이

대동단결·일화배척 등을 주장

1907.3.2

대동보국회

(大同保國會)

샌프란시스코

대동교육회를 확대·개편, 장경·김우제·문양목·장인환 등이 참여

1907.3.22

신간회(新幹會)

하와이

하와이 지방 항일단체. 국내의 1927년 신간회와는 다른 조직

1907.7월

실지회(實志會)

하와이 힐로 일대

회장 박승렬, 무예장려·실업장려·일화배척(日貨排斥)

1907.7월

부흥회(復興會)

하와이 마우이

항일·교민결속 단체.

1907.7.20

전흥협회

(電興協會)

호놀룰루

회보 발간, 후에 한인합성협회 합류

1907.7.25

공제회(共濟會)

뉴욕

미국 동부 초기 한인단체

1907.9.2

한인합성협회

(韓人合成協會)

하와이

하와이 24개 단체를 통합

회장 임정수, 부회장 안원규 회원 약 800명

1907.11.7

동맹신흥회

시애틀

워싱턴주 초기 한인단체

1908

한국부인회

미국 본토

미주지역 최초 여성단체

1909.2.1

국민회(國民會)

미국·하와이

공립협회와 한인합성협회 통합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

합성협회는 하와이지방총회

1909.5.9

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멕시코 메리다

16개 농장 대표를 포함한 70여 명이 창립대회를 개최

회장 이근영. 가입자 314명

1910.2.10

국민회·대동보국회

통합

샌프란시스코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합류하여 대한인국민회 체제 형성

1910.5.10

대한인국민회

(大韓人國民會)

샌프란시스코

북미·하와이·멕시코 등을 포괄하는 미주 최대 한인 통합기관

1913.5.13

흥사단(興士團)

샌프란시스코

안창호가 창립한 8도 대표 단체

무실역행(務實力行)·인격수양·실력양성

1913

대한인부인회

하와이 호놀룰루

초기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 독립운동 후원·교민사회 활동

1914.8.29

대조선국민군단

국민군단

(國民軍團)

하와이 카할루우

박용만 중심 군사훈련·독립군 양성조직

1917

한인부인회

새크라멘토

여성 독립운동·구제단체

1919.3

신한부인회

(新韓婦人會)

캘리포니아

다뉴바

강원신·한신애·한성선 등이 결성 이후 여성단체 통합운동에 참여

1919.4.1

대한부인구제회

하와이

독립운동의 재정·구제사업을 적극 지원

1919.8.5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미국

여러 미주 여성단체를 통합한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단체 독립운동 자금·국어교육·국내 구제 지원

1921.6.14

쿠바한인회

쿠바 마탄사스

엘볼로 농장 정착 한인들이 조직 이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 체제로 발전

1921.7

동지회(同志會)

하와이 호놀룰루

이승만·민찬호·안현경·이종관 등이 조직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을 지지한 정치단체

1921.9.21

대한인국민회

마나티지방회

쿠바 마나티

한인 30여 명이 북미지방총회의 인준을 받아 조직

1922.3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쿠바

마탄사스에서 카르데나스로 이동한 한인들이 조직

1922.3.22

하와이대한인교민단

하와이

기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해체하고 임시정부의 교민단령에 따라 조직, 이승만·구미위원부 계열

1922

북미대한인국민회

미국 본토

하와이지방총회의 분리 이후 기존 대한인국민회 본토 조직이 북미대한인국민회로 개편

1929.10

나성동지회

로스앤젤레스

이승만의 LA 방문을 계기로 조직된 동지회 지부

1930.1.30

나성한인공동회

로스앤젤레스

광주학생운동 지원과 미주 한인의 단결을 위한 단체

1930.3.8

중가주한인공동회

캘리포니아

다뉴바

김호·오충국 등을 중심으로 결성.이후 미주한인연합회 결성에 참여

1931.12.7

미주한인연합회

(美洲韓人聯合會)

미국

대한인국민회·중가주공동회·나성한인공동회·멕시코 계열 등이 임시정부 중심 연합전선을 위해 결성

1933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재건

하와이

1921~22년 해체 후 다시 조직됨

1941.4.20~27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호놀룰루·LA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미주 9개 단체를 통합한 최대 연합기관

의사부는 호놀룰루, 집행부는 LA.

1942.2.15

한인국방경비대

캘리포니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추진한 한인 군사조직

캘리포니아 주경비군 체제에서 활동


이 많은 미주 한인 조직의 시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1902년 12월, 인천·경기 지역에서 모집한 최초의 하와이 이민자들, 내리교회 개신교 신자들의 이민선 승선에서 시작해 상부상조하며 생존하기 위해 만든 농장 자치단체인 동회(洞會)에서 시작되었다. 생존을 위한 망국의 유민들끼리 상부상조 조직이 탄생하고 와해하고 합쳐지고 소멸하고, 재탄생하는 우여곡절은 한민족이 얼마나 질긴 인고의 세월을 버텨왔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들 단체가 온전히 민의의 발현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겠지만, 정치적 열망이 충만한 현대 한국인의 특징으로 진화해온 것은 분명하다. 세계에는 여러 디아스포라 민족과 단체가 있지만, 경제적 공동체를 벗어난 이념 공동체, 지금은 비록 기독교 사관에 매몰되어 있지만, 근본을 들여다보면 외세에 저항, 내밀화하는 정치 지향이 드러난다.
 
애초에 하와이 이민은 조선 민족 해체 프로젝트의 서막이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배속되어 채찍질을 당하며 일했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마치 노예선을 타고 대륙을 건너온 북미 온 아프리카인들처럼 인신매매 노동자와 같은 대우로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역사가들은 근대 이민의 시작을 노예 선박의 인신매매로 규정하는 대신, 자발적 의사 결정에 따른 근대 이민으로 자리매김했다. 미 군정과 친일 잔재들의 정부가 관제 식민사학을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재편한 것이다. 신민회가 선교사 홍승하(洪承河, 1863~1918)가 관여한 단체라는 주장이 굳어진 건 사실관계 증명도 부족하고 종교와 정치의 합으로 만들어진 역사관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이론이 될 수는 없다. 한국 기독교가 현재 직면한 모순은 바로 이 시대를 바로 잡지 않은 데에서 시작된 열매인지도 모른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회사에서 망국의 땅, 무주공산의 정부에 이민자 고용을 제의했다. 우리 쪽이 백성들의 일터를 위해 이민을 정책 삼아 달라고 요구한 게 아니다. 이미 하와이에는 중국, 일본,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노르웨이, 영국, 미국, 아프리카계 등이 사탕수수 경작에 동원되고 있었다. 우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던 일자리에 대해 배운 바 없다. 지금은 없는 철도에 사탕수수를 싣고 다녔다는 역사도 접한 바 없다. 하와이 왕국 멸망 서사와도 무관하다. 그렇다면 망국 백성 조선인이 속아 간 하와이는 현재 미국의 마지막 주인 하와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는 왜, 하와이를 한인 이민사 첫발을 디딘 그곳과 진주만 공격의 하와이로 묶어버렸을까.
 
아마도 전 세계 식민지 패권 국가들이 피지배 민족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비밀은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순조 1년 조선 최초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도 천주교의 고장에서 온 서양인을 빼버리고 중국인 선교사를 매개로 선을 그어 서양 선교사의 조선 입국 과정의 많은 문제를 생략해버렸다. 박해라는 이름으로 조선이 가해자가 된 역사만 정사로 군림하게 했으니, 왜곡된 한국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역할과 뿌리 깊은 도그마의 폐해는 상상 이상이다.
 
당시 하와이에 필요한 한인 노동자 모집과 도입을 알선한 것은 주한미국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 이었다. 알렌은 직접 하와이로 가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요청을 받고 고종을 설득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종이 백성을 팔아먹었다고 배웠다. 그 탓에 개만도 못해진 왕조사를 그대로 믿고 읊은 우리도 개와 같은 족보를 가진 백성이 된 지난 세월, 식민사관은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천착했다.
 
한인 노동자의 모집에 대한 모든 권한은 데이빗 데쉴러(David W. Deshler, 1872~1927)가 고종으로부터 허가받았다고 해서 이민에 관한 합법성을 모두 갖췄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한말 모든 적폐와 악습에 고종이 관련된 것으로 그려진 역사에 의문을 품지 않는 태도도 한몫했다. 1965년에 시작된 미국 이민 때도 가난해서 잘살아보자고 떠난 이민이었는데, 하물며 망국의 정황을 사실 기반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섣부르다. 궁내부 산하 수민원(綏民院) 설치 이전에, 이미 조선의 조정은 업무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 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를 상정하고 대신 궁궐을 장악한 세력 또는 장악하려고 경쟁하던 세력을 생각해야 한다.
 
데쉴러는 1897년 서울에서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 Great Chosŏn Ramie Spinning, Ltd.)로 우선 재미를 보고 은행과 함께 인력 수출 회사를 차렸다. 대조선저마제사회사는 삼과 모시를 가공해 실로 만든 뒤, 중국 상해 등의 직조공장에 수출하려던 한·외 합자회사로 조선인 경영진 중에 서재필 안경수가 있다. 외지인은 반드시 현지인의 동행이 필요했는데, 그 동행자 중에 근대 역사 인물 몇 명이 번갈아 등장하는 것도 살펴볼 사안이다.
 
이 회사는 일본의 ‘enterprising Yankee(잘 나가는 양키 사업가)’ 중 한 명인 제임스 롤랜드 모스(James Rolland Morse, 1848~1921) 밑에서 일했던 미국인 월터 타운센드(Walter D. Townsend, 1856∼1918)와 데쉴러가 합작한 회사로 아편 전쟁 이후 동양에 거점을 확보한 서양의 강압적 통상(Coercive trade) 또는 약탈 무역(predatory trade) 종사자 중 한 명이다.
 
user-upload-img
대일무역의 선구자 James Rolland Morse <大正過去帳 物故人名辞典 1973>
 
무주 공산화된 조선 땅, 서양인의 관문 제물포에서 데쉴러는 이민사업을 위해 국내에 동서개발회사(The 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만들고 <황성신문>에 자신의 은행에서 일할 영어 가능 젊은이를 찾는다고 데쉴러 은행(Deshler Bank) 광고를 낸다. 광고는 냈지만,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땅으로 가는 것에 저항이 있어 모집이 쉽지 않자, 인천 내리감리교회 선교사였던 조지 히버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가 적극적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모집에 나서 교인들을 설득했다. 경제적 개선과 자녀교육의 이익, 그리고 선교를 위해 개척의 길을 떠나도록 권유했다.
 
user-upload-img
1906년 호놀룰루 감리교회 방문 (앞줄 가운데) 조지 히버 존스

user-upload-img
(좌) Horace N. Allen 安連 (우) David W. Deshler 大是羅
 
하와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백 년 전이라고 해도 기독교 교리 선교 활동과 그들의 행위가 정신적 안정이 아닌, 조선 백성 이민 권고로 귀결되는 상황은 억지스럽다. 믿음으로 설득당한 내리교회 신자 중 일부가 약 2주간의 선박 이동을 거쳐 이 하와이로 이주하자, 존스 선교사는 국내의 감리교선교회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교인들과 훈련된 사역자들을 잃게 했다는 이유로 존스에 대한 원망이 1905년까지도 이어졌다고 하는데, 영흥도에서 하와이 거리가 얼마인데 순진한 백성들을 팔아넘긴 소식을 본국에서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근대 식민지 패권의 정수인 해저 케이블 설치 덕이다. 1902년 12월 28일 미국 서해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배가 2주에 걸쳐 하와이 한 척의 배가 2주에 걸쳐 와이키키 비치 근처 카이마나 비치에 찾아와 카누로 해저 케이블을 연결해 설치한다. 1903년 1월 1일 연결된 케이블로 최초의 메시지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대통령에 보내졌다. 그리고 하와이 사탕수수를 실은 철도가 폐쇄된 것처럼, 1951년 이 해저 케이블도 사용이 중지된다. 아마 바다 밑을 샅샅이 뒤져도 과거 케이블은 흔적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깔린 적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최초 이민 선박에 함께 타지 않은 홍승하(洪承河, 1863~1918) 선교사로 14세인 그의 아들 홍형준(洪亨俊, 1888~?)과 1903년 가을 고국을 떠나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홍승하는 이설이 분분한 인물이지만, 다수인 종교계가 이겨 신민회의 아버지처럼 되어 있다. 사실 신민회를 주도한 사람은 춘곡(春谷) 임치정(林蚩正, 1880~1932), 평남 용강군 출생으로 한학을 오래 수학한 자로 결혼 후 아내를 두고 홀로 노동 이민에 도미한 사실이 당시 조선의 말기적 사회상을 일부나마 상상케 한다. 임치정과 홍승하는 후에 귀국했다고 하지만, 사망 장소가 정확하지 않다. 대부분 이민자는 평생 돌아오지 못했는데 지도자인 이들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을까. 홍승하의 아들, 형준의 사진은 없고, 경기도 남양에서 출생한 형준의 아들 홍가륵(洪加勒, 1913~1850)의 서대문형무소 사진이 있다. 의열단원으로 항일 투쟁에 해방을 맞았지만, 미군 정청의 하수인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해 6.25 발발 후 총살했다. 같은 하와이 출신의 후손인데 항일은 해방 후에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뿌리를 뽑아야 했던 이유, 그게 궁금하지 않은가.

user-upload-img
왼쪽) 임치정
가운데) 홍승하(아들 홍형준 사진은 찾지 못했음)
오른쪽) 홍형준 아들 홍가륵(1935년 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나무 위키)
 
홍승하는 별명이 ‘홍 따귀’로 서울에서 일본 순사와 싸워 마찰이 생겨 도망치다 들어간 집이 아펜젤러의 집이었던 우연으로 선교사가 되었다는 전설과 같은 스토리가 따르는 동명이인 설까지 있는 인물이다. 지금은 인천광역시에 속하지만, 과거 경기도 영흥도(靈興島) 출생 유복한 집안의 독자로 한학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무관학교를 다녔다지만, 관련 기록은 찾지 못했다. 한학 수학자가 전통적 사고에서 개종해 힘든 사역을 위해 아들과 목숨을 건 하와이행을 결정할 만한 결정적 이유도 찾지 못했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 다르게 진행된 한인들의 여정
장대한 하와이 이민 전개의 반면,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간 안창호 부부는 최초 한국인 부부 이민자로 정의한다. 하와이에 온 가족이 함께 떠나고 현지에서 사진 맞선으로 결혼까지 주선했던 역사는 왜 외면하고 안창호 부부만 미국에 이민 간 첫 커플로 거론되는 것일까. 하와이 이민과 미국 본토 이민이 완전히 별개로 취급되고 있는 대목이다. 안창호는 1903년 9월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조직했고, 이는 후에 공립협회가 되었고, 1905년 배우인 아들 필립이 할리우드가 가까운 캘리포니아서 태어났다. 같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한 건 하와이나 본토나 다를 게 없고, 하와이의 미국 본토 편입이 1959년에야 이루어졌다 해도 한인 이민자들이 첫발을 내디뎠었을 때 이미 하와이는 미국령(Territory of Hawaii)이었으니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 단체를 결이 다르게 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는 이유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마도 평양 파괴로 충격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안창호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가 운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해 장로교로 개종하며 맺어진 인맥이 미국 본토 행으로 이어졌는지 모른다. 안창호는 1902년 미국 유학을 목표로 아내와 함께 미국행 배를 탔다. 서재필은 그보다 앞선 세대의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는 주로 노동자층이 하와이로, 지식인층이 유학생으로 본토 행을 택했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도 종파에 따라, 하와이와 본토에서 나눠 배치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본토 출신 선교사는 순수 종교인의 행위라기보다는 인력 송출, 당시 상황으로는 노동자 수출을 위해 하와이로 파견되었다. 영흥도라는 섬의 이민 차출은 일종의 테스트 마켓(test market) 이었는지 모른다. 인신매매와 다름없는 이민사업이 신앙을 시험하는 종교 장사와 정치 단체로 하와이 및 본토에서 뒤섞이며 진화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전 세계로 흩어진 조선의 유민들을 뒤로하고 그 이름도 거룩한 대한제국의 백성 중 모든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은 승자는 이승만, 이승만과 개신교, 그리고 독립운동의 아버지 타이틀은 모두 이 하와이 이민 서사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 명의 휴민트를 탄생시키기 위해 본토 미국과 하와이 이민의 본질은 시공을 초월해 조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역사는 수백 년 이어온 서구 식민지 패권 패착의 역사가 숨어 있다.

댓글
( 0 / 500 )
andrea72
9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단순히 ‘기독교의 항일운동’이라는 한 줄의 서사로 설명하기에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노동이주, 선교, 기업의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합니다. 기존 통설을 의심하고 여러 자료를 교차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 제기에 공감합니다.
( 0 / 500 )
최혁준
8
기존의 역사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주장과 사실을 구분하면서 당시의 1차 자료를 하나씩 확인해 나간다면 하와이 이민사의 또 다른 모습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 0 / 500 )
iljoon7
6
미국 이민자의 눈으로 보면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민을 주도했느냐’보다 ‘그 사람들은 왜 고향을 떠나야 했고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1903년부터 약 7,400명이 하와이로 건너갔고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늘날 미국 한인사회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부터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선조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0 / 500 )
동형
5
특히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이민사를 왜 서로 다른 역사처럼 구분해 설명해 왔는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초기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조직을 만들고 통합과 분열을 반복했던 과정 자체가 디아스포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0 / 500 )
김태훈
5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보면 조국을 떠난다는 것이 결코 낭만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1903년 하와이로 간 사람들도 결국 먹고살기 위해 낯선 땅으로 떠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훗날 종교나 독립운동이라는 이름 하나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0 / 500 )
光鐵
4
하와이 이민을 바라볼 때 노동자 모집, 선교, 미국의 태평양 진출, 조선 정부의 무능과 외세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었다는 관점은 새롭게 생각해볼 만합니다. 한 가지 이념으로 역사를 설명하려는 태도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겠습니다.
( 0 / 500 )
太平聖代
4
미국 한인사회에서 오래 살아보면 교회가 단순한 종교시설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됩니다. 초기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만남의 장소이자 서로 돕는 공동체였고, 동시에 언어와 문화를 지키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민 자체를 기독교의 공적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라고 봅니다.
( 0 / 500 )
hannam
3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단순한 독립운동이나 기독교 선교의 역사로만 바라보기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너무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이민자들의 실제 삶과 여러 단체가 만들어지고 통합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0 / 500 )
最强童顔
3
결국 중요한 것은 누구의 영웅담이냐가 아니라 당시 평범한 이민자들이 왜 고향을 떠났고,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를 만들었는지를 복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민족·종교·제국주의라는 여러 렌즈로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0 / 500 )
demon
1
미국에 사는 한인 입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민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서로 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도 한인회, 교회, 동창회, 상공회 등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데 100여 년 전에는 이런 공동체가 말 그대로 생존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대한인국민회 같은 조직의 탄생도 그런 생활 기반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 0 / 500 )
신고내용

신고내용을 선택해주세요
회원비난/비하/욕설글 및 댓글도배성 게시물저작권 침해/불법자료 유출허위사실유포개인정보 유출.사생활 침해무단광고/홍보음란물 및 도박 불법 광고물범죄행위 관련 글불법행위 관련 소개물품 판매 및 사기글악성코드 및 스파이웨어 유포기타 사유 및 운영진 판단
ID
PasswordShow password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Sign in with Google

All information provided by us is free of charge and is for the public good.

ⓒ 2022. P-UM.net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