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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배

오늘은 시인 윤동주 순국 80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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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2. 16

 202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이 일본 도시샤대학서 명예박사학위 받는다. 오늘은 시인 윤동주 순국 80주기이다. 순국 당시 나이는 28세 청년이었다. 대한민국 시인 중에 가장 좋아하고 많이 알려진 위인이다. 일본에서도 시인 윤동주 마니아들로 구성되어 시를 읽고 추모하는 모임이 점차 늘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라는 예상밖에 대답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시인 윤동주를 독립운동가로 서훈하여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훈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함북 청진(淸津) 사람이다.
1936년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민족학교인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졸업한 후 광명중학교(光明中學校)에 진학하여 시(詩)작품을 통한 항일민족정신의 기초를 닦았다.
 
1938년 그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진학한 후 송몽규(宋夢奎) 등과 함께 민족정신과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서시(序詩)>·<별헤는 밤>·<무서운 시간>·<또다른 고향>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2년 경도(京都)에 있는 동지사(同志社)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한 후 동지인 송몽규·장성언(張聖彦) 등과 만나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제를 반대하며 저항정신을 담은 시작품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적 문학관을 확립하는데 힘썼으며 민족문화의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1944년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지는 중국 명동촌 가까운 공동묘지에 이장하여 온 고종사촌 송몽규 독립운동가와 나란히 묻혀 있다.
현충 시설은 동작동 독립유공자 추모비, 성북구에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종로구 자하문 앞 윤동주문학관, 전남 광양시 윤동주 시 정원 등이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한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윤동주尹東柱
본관 파평(坡平),
이명, 아명: 윤해환(尹海煥), 필명: 윤동주(尹童舟), 창씨명: 평소동주(平沼東柱)
출신지 중국
생몰년월일 1917. 12. 30. ~ 1945. 2. 16.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90)
참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間島省, 현 지린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윤영석(尹永錫)과 김용(金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필명은 윤동주(尹童舟), 창씨명은 평소동주(平沼東柱)이다. 부친 윤영석은 1909년부터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이후 베이징과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학우들과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발간하였다. 1931년에 졸업 후,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35년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편입하였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학생회에서 간행하던 교지 『숭실활천』에 「공상」을 게재하였으며, 그 밖에도 「남쪽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썼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다시 룽징(龍井) 광명학원(光明學園)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옌지(延吉)에서 간행되던 잡지 『카톨릭소년』에 「병아리」, 「빗자루」 등의 시를 게재하였고, 발표하지 않은 수십 편의 시를 섰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슬픈 족속」, 「비오는 밤」 등의 시를 썼고, 1939년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유언」, 「아우의 인상화」 등을 게재하였다. 1941년에는 「서시」, 「또다른 고향」, 「십자가」, 「별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등을 발표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하던 잡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게재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1942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도시샤대학 재학 중인 1942년 11월 하순 거주지인 교토시(京都市) 사이쿄구(左京區) 다나카나가하라초(田中高原町) 다케다(武田) 아파트에서 한인 학생 장성언(張聖彦)과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 검거에 대해 논쟁한 뒤, “문화의 멸망은 민족의 궤멸에 다름아니라는 까닭을 역설하고, 조선문화의 앙양에 노력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다음 달인 12월 중순에는 교토시 사이쿄구 긴카쿠지(銀閣寺) 부근 가로에서 “개인주의사상을 배격하고 조선 민족은 끝까지 개인적 이해를 떠나 민족 전체의 번영을 초래할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1943년 2월 초순 거주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한인 학생 송원휘충(松原輝忠)과 국내 학교에서 한국어 과목이 폐지된 것에 대해 논쟁하고 한국어 연구를 권장한 뒤 ‘내선일체’정책을 비방하고, “조선 문화의 유지,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 달성이 필수적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같은 달 중순에는 국내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다루며 조선과 일본 간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 독립이 급무다”라는 취지로 역설하였다.
 
1943년 4월 중순 교토시 사이쿄구 다나카나가하라초 시미즈 에이이치(淸水榮一)의 집(송몽규의 하숙집)에서 송몽규로부터 조선·만주 등에서 민족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한 뒤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이어 “조선의 징병제도는 조선 독립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하게 될 것”이라고 논단하였다. 같은 달 하순에는 교토 시외의 야세유원지(八瀨遊園地)에서 릿쿄대학 학생 백인준(白仁俊)에게 “조선인은 종래 무기에 대해 몰랐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따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러니 장래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가 되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함으로써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또한 독립 후의 통치방식에 대해 “조선인은 당파심 및 정의심(情疑心)이 강하므로 독립 초창기에는 군인출신의 강력한 독재가 아니면 안된다”라고 토론하고 독립 실현에 공헌하기 위해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43년 5월 초순 장성언에게 “조선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하고, 문화적으로 침체된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독립을 실현하는 것 밖에 없다”라고 역설하였다. 같은 달 하순에는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해야 하며, 이 기회를 놓치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될 가능성은 없어지고 결국 조선 민족은 일본에 동화되어 사라질 것이므로 끝까지 일본의 패전을 기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943년 6월 하순 송몽규와 찬드라 보스(Chandra Boss)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의 독립운동에 대해 토론하면서, “조선은 일본에게 정복당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바로 찬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민족의식은 도리어 왕성하기 때문에 언젠가 일본의 전력이 피폐해지고 좋은 기회가 도래한다면 그 때는 찬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반드시 출현할 것이니 그 기회를 잡아 독립달성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라고 서로 격려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 장성언에게 소장하고 있던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을 빌려주며 조선사 연구를 종용하였다.
1943년 7월 중순 송원휘충에게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일제 경찰의 감시로 1943년 7월 14일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일제 경찰에 붙잡혀, 교토 카모카와(鴨川) 경찰서에 갇혔다. 1944년 2월 2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 산입)을 받고, 4월 1일 형이 확정되어 교토구치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이후 5월 11일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이듬해인 1945년 2월 16일 사망하였다.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당시 일제의 생체 실험으로 사망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사망 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尹永春)이 유해를 인수하여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화장하였다. 장례는 1945년 3월 6일 용정 집의 앞 뜰에서 거행되었다.
 
광복 후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 기록하고 시를 쓰는 이윤옥 시인의 오마이뉴스 기사 일부를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 일본 도시샤대학서 명예박사학위 받는다
일본 전역, 윤동주 서거 80주기 맞아 추도 물결... 16일부터 24일까지 행사 이어져
 
16일 낮 12시 30분,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예배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명예박사학위 증정식이 예정되어 있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이 다니던 대학으로 이 대학의 고하라 가쓰히로(小原 克博) 총장은 1875년, 이 대학 설립 이래 고인(故人)에게 수여하는 첫 학위 수여자로 윤동주 시인을 뽑ᅌᅡᆻ다.
 
"지금도 한국으로부터 많은 고등학생이랑 관광객이 끊임없이 본 대학의 윤동주 시비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2025년 2월 16일은 윤동주 서거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도시샤대학은 2025년에 설립 150주년을 맞이하며 그동안 전쟁의 시대가 있었고, 많은 학생이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던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2025년, 일본 사회가 전후(戰後) 80주년을 되돌아보는 한편, 윤동주 시비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우리 대학은 그 역사 속에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2024년 12월, 윤동주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수여식은 2025년 2월 16일)“
 
명예문학박사가 아니라 명예문화박사 학위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의 2017년 제10회 때 학생 두 명과 참가하였다.
그곳에서 윤동주 묘를 최초로 찾아내 절 올리고 한국문학 연구에 힘써온 오무라 마스오 교수께서 학생들과 좋은 일 한다며 격려의 말을 들었다. 또한 모임을 결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수림문화재단 신경호 상임이사의 배려로 2박 3일 숙소와 야스쿠니 신사와 전쟁기념관 동경한국학교 등으로 이동하고 ‘망우역사문화공원과 일제강점기’ 주제로 강의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1】 도쿄(東京): 릿쿄대학(立教大学)
*주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
*때: 2025년 2월 23일(일) 1부 추모 예배와 시낭독
*곳: 릿쿄대학 예배당(이케부크로 채플), 2부 릿쿄대학 캠퍼스 8호관 1층 8101호실에서 니 시하라 렌타(西原 廉太) 총장의 "윤동주 80주기를 생각한다.(尹東柱80周忌に想う)" 주제의 강연 예정 등

【2】 교토(京都) :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① 윤동주 명예 문학박사학위 수여식 (尹東柱 名誉文化博士学位)
*때: 2025년 2월 16일 낮 12:30~ (도시샤대학 예배당(同志社礼拝堂))
*주최: 도시샤대학
② 윤동주 사후 80년・시비(詩碑)건립 30주년 윤동주 추도식
제1부 헌화식 13:30~(도시샤대학 구내 윤동주 시비 앞)
제2부 강연회 15:00~(도시샤대학 예배당)
'윤동주를 말한다:' 고하라 가쓰히로(小原 克博) 도시샤대학 총장
주최: 윤동주를 그리는 모임, 도시샤코리아동창회, 도시샤코리아연구센터 주최
③ 제13회 일본ㆍ한국ㆍ재일동포시인공동 윤동주 시인 추도 모임
2월 17일 (월) 16: 00~ 헌화, 헌시 낭송등
도시샤대학 윤동주 시비 앞
④ 교토예술대학 타카하라 캄퍼스 '윤동주 유혼지비' 앞
*때 : 2월 14일(금): 교토에서 가장 먼저 추도회 진행함
*헌화와 영화 상영 <高原타카하라>상영회 등
*윤동주의 시를 이야기하는 모임 <새벽이 오기 전 어둠 속에서>(문예표현학과 나카무라 준(中村純) 교수 세미나 학생들

【3】후쿠오카(福岡) :윤동주시인 추도80주년 기념식
*주최: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
*때 : 2025년 2월 24일 11시~
*곳 : 추도회는 후쿠오카 모모치니시공원(福岡 百道西公園, 후쿠오카구치소 북쪽)
*윤동주 시, 이어 읽기 2025(尹東柱の詩を読み継ぐ2025)
*때 2025년 2월 24일 14:30~17:30
*곳: 큐슈대학 니시신 프라자 대회의실(九州大学西新プラザ大会議室:早良区西新2-16-23)
*주최: 후쿠오카 윤동주를 읽는 모임, 주후쿠오카대한민국총영사관
▶ 각 일본 모임에 대한 문의는 기자에게 하면 된다.
 
윤동주의 항일 저항시의 바탕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이다. 아버지 윤영석과 연희전문 교수 이양하도 당시 동경 유학생이었다. 항일 저항시를 남긴 김소월 이상화 김동환 김영랑 박용철 장지락(김산) 등은 참상을 목격한 유학생이었다. 이육사는 1924년 4월부터 1925년 1월까지 일본 유학하다 중국으로 넘어갔다. 신석정 시인은 큰형님과 사촌 매형 소설가 정우홍과 이익상 등이 동경 유학생이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에 윤동주와 관련된 분은 아동문학가 소천 강용율이다. 영생고보 4학년 때 한글 탄압이 심할 때 강용율은 외사촌 누이 집에 1년간 머물며 은진중학생 윤동주를 만났다.
이중섭의 평양 종로보통학교 동기인 태경 김병기 화백은 평창동 작업실에서 윤동주의 평양 숭실고보 시절 교류를 추억하였다.
김병기 화백과는 김병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사생대회 초청 강연 일부터 시작하여 10여 차례 만났다. 한 세기 넘게 사신 분으로부터 세기적인 얘기 속에 푹 빠졌다. 태경 김병기 화백으로부터

시인 이상·백석·윤동주·구상, 소설가 김동인·이효석·황순원·김이석, 화가 김관호·길진섭·이중섭·문학수·이쾌대·김환기·유영국·장욱진·김창열, 조각가 차근호, 무용가 최승희, 정치계의 김일성·이승만·김동원·송진우 등과의 소통과 사귐의 여정을 들었다.
 
김병기 화백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한 미술대학생 고희동 김관호 화가에 이어 세 번째 유학생인 김찬영이었다. 화가 김찬영, 《창조》 《폐허》 동인일 땐 필명으로 김유방, 간송 전형필 쌍벽으로 문화재 수집 특히 고려청자에 관하여 최고의 감식과 수집일 때는 김득영 등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였다.
 
김병기 화백의 길이 확 열리는 장안의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한 서모 정충실(윤씨) 무덤이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남아 있다. 김병기 화백이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오지 않은 이유가 그 서모 무덤 때문이었다. 1947년 김병기 화백이 월남하는 계기였던, 그 서모의 당시 조선 최고의 다이아몬드와 살인사건 얘기를 다음에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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