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박사 한국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첫 침례신자 선종할 때 26개 직종 명함, 김호직(金浩稙, 1905~1959)
망우리공원 묘역 안에서 유일하게 사유지의 개인 묘역이다. 망우리고개 6번 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유명인사 묘지이다. 망우리고개를 가로지르는 오작교에서 낙이망우교로 이름이 바뀐 다리에서도 거리는 제일 가깝지만, 김호직의 묘역을 참배하려면 망우로에서 망우리공원 입구 들어서자마자 왼쪽 산으로 오르는 골짜기를 타고 올라, 능선 나오기 20m 전 왼쪽으로 꺾어, 50m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단장이 잘된 유택이 보인다. 망우리공원을 정비하면서 진입로를 깎아 시멘트 옹벽을 쳐버렸다. 벼랑 위에 김호직박사묘지입구 안내석이 서 있다. 여름철 나무가 무성하면 접근하기 어렵다. 사설묘지이기에 어렵겠지만 관계 기관에서 안내문과 접근하는 길을 내주길 바란다.
김호직은 1905년 4월 16일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향교 교장 아들로 태어났다. 벽동농업학교를 거쳐, 1924년 3월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며 졸업생 답사를 했다. 전주 신흥학교 박물교사, 이후 생물학을 전공했다. 1930년 도후쿠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5월부터 대구 계성학교 박물교사로 근무하며, 교감 박정근의 여동생 박필근과 결혼했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에서 생물학과 영양학을 가르쳤다.
김호직은 우리의 전통적인 식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한반도의 역사·기후·풍토가 우리의 식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연구했다. 즉, 오랜 문화사적 배경을 가진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그 영양가를 조사했다. 한편 우리의 역사·기후·풍토가 우리의 식생활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태학적으로 연구하여 1944년 『조선식물개론』을 펴냈다. 우리나라 음식물의 우수성을 조명하고 우리나라 음식물에 대한 연구법을 제시했다.
1945년 9월 숙명여자전문학교 재건에 전력하여 교장을 역임하고, 1946년 2월 국립수원농사시험장을 거쳐 1947년 12월 농사개량원 부총재가 되었다. 1948년 11월 대한민국 정부 대표로 FAO 제2차 총회에 출석했다.
1949년 2월 정부 파견 제1호 유학생으로 도미, 1950년 2월 코넬(Cornell) 대학에서 영양학석사(M.N.S.) 학위를 이어 1951년 귀국 9월 동 대학원에서 논문 『콩단백의 영양학적 연구』에 의해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부산 수산대 학장에 취임, 1953년 2월 국민 영양 계몽·개선·농사교육 보급에 공헌하여 대통령상을 받고, 그해 3월 연희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5년 3월 교육부 차관에 취임, 1956년 11월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 제9차 총회에 정부 대표로 참석하고, 서울대 대학원 생화학 강사·학술원 회원·유네스코 한국 집행 위원·서울시 문화 위원·한국 생물 과학 협회 부회장·한국 영양 협회장·도의 생활 연구회장·창신육영회 이사장·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선종 당시 명함에 26개 직함이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유학파이며 이학박사 종교 교육 사회 등 다양하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실천력 종교적인 신앙의 힘과 몸에 밴 봉사정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60여 년 전의 대한민국의 인재풀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인물로, 건강을 살피고 돌보와 콩박사로, 널리 자신의 뜻을 펼쳤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크다.
한국을 떠나기 전 개신교 장로교인이었던 김호직은 미국 유학 생활 과정에서 학교 친구였던 올리버 웨이맨의 전도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속칭 모르몬교의 신앙을 접하였고, 1951년 7월 29일 46세 나이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침례를 시스케하나 강에서 받았다. 그가 물에서 올라올 때 강하고 부드러운 음성 두 귀에 들려왔다.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 이후 그의 삶의 지남차가 되었다. 1952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는 영양학자∙교육자∙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개척자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시작은 1950년 6·25 한국전쟁 시기에 유엔군으로 한국에 파견된 군인 가운데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린 것이 처음이었다. 주로 부산에서 모임이 활발하였는데, 부산의 여러 대학에서 영어 공부 모임을 광고하여 이에 관심을 가진 젊은 대학생과 함께 성경 공부 모임을 꾸려나갔다. 귀국한 뒤 김호직 역시 부산 모임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귀국 후 1951년 문교부 차관·부산수산대학교 현 부경대학교 학장·건국대학교 축산대학 학장으로 교육행정과 후학을 기르며, 콩의 영양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여 콩을 주요 재료로 하는 특허등록번호 448호의 보강식을 발명했다. 이 밖에도 우유와 고기에 의한 영양개선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논저로는 「소맥분 보강에 대한 연구」·「콩단백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국민영양의 계몽·개선과 농사교육 보급에 이바지한 공으로 1953년에 대통령상을 받았다.
1957년에는 개신교 주류의 반대를 뚫고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재단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1959년에는 세계식량농업기구의 세미나에 초대되어 인도로 출국하였으나 고혈압으로 쓰러져 불편한 몸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1959년 8월 28일 서울시 교육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학생들에게 잡부금을 걷는 문제’의 토론을 벌이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1959년 8월 31일 연세대 부속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 행렬에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차량이 통제되었다. 건국대 축산학과 59학번 제자 60여명이 꽃상여차 상여줄을 전후좌우에서 붙잡고 행진했다. 건국대 체육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정부요인을 비롯하여 1천여 명이 참석했다. 모르몬교 의식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의 인도로 망우리 사설묘지에 안장됐다.
장남 김신환(1932~2019)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서울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뒤늦게 성악에 눈을 떴다.
1957년 파리 성악콩쿠르에 한국인 최초로 1위로 입상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의 최후 계승자로 알려진 그는 1776년 개관한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 최초의 동양인 솔리스트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한국 오페라의 초석을 다진 성악가로 귀국 뒤에는 영남대 음대 교수, 서울시오페라단 창단 및 초대 단장, 예술의전당 이사장, 한국예술가곡진흥위원회 초대 공동대표 등을 지내며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서울올림픽 문화훈장(1988),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 훈장(1992),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한국최우수예술인상(1995) 등도 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김신환 국제 콩쿠르’를 설립하는 등 후진 양성에 공헌했다. 6.25 한국전쟁 군악대 참전으로 호국원에 안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