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담화는 전쟁 선포가 아니다. 9월 21일 서부전선 DMZ 수색로 개척 중 터진 지뢰 폭발과, 우리 군·유엔사의 조사 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앞으로 DMZ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충돌을 ‘한국의 도발에 대한 보복’으로 선점하려는 명분 구축이다. 담화 제목 자체가 그 구조를 보여준다. 「도발의 장본인들은 자작광대극의 대가를 각오해야 할 것」. 책임은 이미 서울에 있고, 다음 총성은 보복의 권리라는 각본이다. 수위는 높지만 전면 군사도발 단계는 아니다. 위험한 지점은 전쟁 여부보다, 작은 접경 사건이 연쇄적으로 확대되는 입구를 북한이 먼저 설계했다는 데 있다.
사고의 실체는 분명하다. 21일 오전 육군 25사단 관할 DMZ,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수색로를 개척하던 간부 3명이 폭발로 다쳤다. 대대장급 중령을 포함한 중상자가 나왔고, 한 명은 발목 절단 수술을 받았다. 현장에서는 북한제 수지(플라스틱) 대인지뢰가 확인됐고, 폭발한 것을 포함해 최소 4발이 한곳에 몰려 있었다. 유실되어 떠내려온 형태가 아니라 매설된 형태였다. 강신철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매설”이라고 못 박았고, 국경선 요새화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지뢰열의 흔적은 뚜렷하지 않고 매설 시점은 1년 이상 전으로 추정된다. 유엔군사령부 역시 30일 입장문에서 MDL 이남 북한 대인지뢰를 확인했다며 정전협정 위반으로 판단했다. 북한군이 “단 한 번도 국경선을 넘지 않았다”는 김여정의 주장은, 현장 물증과 정전협정 감독기구의 판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김여정은 이 사건을 “도발 시기와 수법에 있어 10여 년 전 목함지뢰 사건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명백한 자작극”이라고 불렀다. 출처도 모르는 지뢰를 밟아놓고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지껄이는 추태이며, 책임을 먼저 씌운 뒤 물적 증거를 꾸며내려는 행태가 황당함의 극치라는 식이다. 국경선 요새화는 ‘군사적 목적과 무관한 철저한 주권 행사’라고 못 박았다. 동시에 “총탄 한 발이라도 우리 땅에 탄착되면 많은 것을 각오해야 한다”, “경고사격이 아닌 실지사격을 가하면 즉시적이고 가차 없는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했다. 대응행동 지침은 이미 국경선 방어구분대에 하달됐고, 3군단 21보병사단 DMZ 방향에 전술적 반격수단을 증강하겠다고 특정했다. 서울의 자작광대극의 극적절정은 재미가 없을 것이며, 모든 후과의 책임은 도발을 기획한 당사자가 진다는 경고로 끝맺었다.
사고 현장과 위협 축선이 어긋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폭발은 1군단 25사단 서부전선에서 났는데, 김여정은 ‘최근 도발이 잦은’ 3군단 21사단 방향을 지목했다. 사고 지점에만 보복을 가두지 않고 중부전선까지 압박 범위를 넓히겠다는 신호다. 이미 지침을 내려보낸 뒤 대외 선언한 것은,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실사격으로 재해석할 여지를 일선에 준 것과 같다. 담화의 목적은 지뢰 책임 부인만이 아니다. 향후 우발 충돌의 해석권을 선점하는 것이다.
2015년의 사다리가 이 담화를 읽는 열쇠다. 당시에도 북한은 자작극을 주장했으나, 조사 결과 MDL을 넘어 매설한 목함지뢰로 결론 났고 장병 2명이 다리를 잃었다. 남측이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를 재개하자 북한은 서부전선에서 포격을 가했고, 남측이 155mm로 대응하면서 국지전이 일촉즉발까지 갔다. 고위급 접촉 끝에 북측이 ‘유감’을 표하고 남측이 확성기를 중단하는 타협으로 봉합됐다. 김여정이 그 사건을 다시 꺼낸 것은 향수를 파는 일이 아니다. ‘너희가 확성기와 실사격으로 먼저 나가면 우리는 보복할 명분이 있다’는 각본을 미리 읽어주는 것이다.
북한의 예상 카드는 단계적이다. 해당 축선에서 병력·화력·장애물을 눈에 보이게 증강하는 국지적 대응, 확성기·전단·사이버전을 포함한 심리전 맞대응, 경고사격이나 월선 시도에 대한 제한적 사격, 서해 NLL 등 다른 전선으로의 압박 이전. 전면전으로 바로 가는 선택은 북한이 감수하기 어려운 비용이다. 진짜 위험한 경로는 ‘북한이 전쟁을 시작하느냐’가 아니라, 책임 공방→경고방송→경고사격→실사격 해석→포병 지원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한 발의 탄착을 ‘우리 땅에 떨어졌다’고 규정하는 순간, 담화는 실행 문서로 바뀐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응은 맞불식 확성기·포격의 즉각 재개가 아니라 ‘확인-경고-비례대응’이다. 조사 결과와 물증, 유엔사 판단을 국내외에 투명하게 공개해 ‘자작극’ 프레임을 증거로 깨야 한다. DMZ 경계와 수색 절차, 지뢰 탐지 장비를 강화하되 월선·지뢰·총격에 대한 교전규칙(ROE)을 흔들리지 않게 유지해야 한다. 경고사격과 실사격의 경계를 일선이 자의적으로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북한의 함정을 피하는 길이다. 동시에 북한이 실제 무력행동을 하면 지체 없이, 그러나 비례적으로 대응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모호함이 오판을 부른다. 비례대응은 침묵이 아니다. 물증이 있는 정전협정 위반을 국제적으로 고정하고, 추가 매설·월선·실사격에는 상응 조치로 값을 물리겠다는 뜻을 사전에 밝히는 일이다.
정치권의 유혹도 위험하다. 야당은 확성기·전단 재개와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사고 초기 발표 지연과 유엔 일정과의 겹침을 은폐 의혹으로 몰아붙인다. 정부·여당은 확전을 피하려는 신중함과 책임 회피 사이에 선이 흐려 보일 수 있다. 둘 다 북한의 프레임을 키울 수 있다. 장병 피해에 대한 진상과 예우, 초기 보고의 정확성은 별개의 국내 과제이며 덮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북 군사 대응의 수위를 국내 정쟁의 도구로 올리면, 북한이 원하는 “서울이 먼저 판을 키웠다”는 서사만 완성된다. 강경함이 용기가 되고 신중함이 비겁이 되는 이분법이야말로, 담화가 노리는 국내 균열이다.
김여정 담화는 전쟁 선포가 아니라 DMZ 국지충돌에 대한 선제적 명분 구축이자 보복 억제 경고다. 북한은 ‘한국군이 먼저 실탄을 쏘면 보복한다’고 반복 명시했다. 우리 군이 불필요하게 그 문턱을 먼저 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반대로 물증이 있는데도 침묵하거나, 유엔사 판단을 국내 정치 논리로 희석하면 정전협정 위반을 기정사실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증거 공개, 경계 강화, 명확한 ROE, 실제 무력에는 비례적·즉각 대응. 이 네 가지를 동시에 지키는 것이 지금은 가장 안전한 길이다. 담화는 전쟁이 아니라 국지전의 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그 입구에서 누가 먼저 발을 들이느냐가, 앞으로 며칠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