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도 아니고, 노력에 자동으로 붙는 보상도 아니다. 2026년 10월 3일 밤 도요타 스타디움의 금메달은 승부의 기록으로 남았어야 했다. 한국 U-23은 개최국 일본을 1-0으로 꺾고 남자 축구 아시안게임 4연속, 통산 7회 우승을 가져갔다. 결승골은 엄지성의 것이었고, 이미 군 복무를 마친 세 명을 뺀 스무 명 안팎의 선수는 그 순간 예술·체육요원 편입 자격을 손에 넣었다. 여기까지는 경기의 언어다. 그 기록이 축하의 언어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직후였다. 주장 이기혁은 금메달을 들어 보이며 “군대 안 갑니다”라고 말했고, 양민혁은 메달과 트로피보다 군 면제라는 보상 하나만 보고 뛰었다는 취지로 답했으며, 박승수는 라커룸에서 전역모를 쓴 사진을 올렸다. 모자는 본인이 챙겨 간 것이 아니라 관중석에서 던져진 것이라는 해명이 뒤따랐고, 다음 날 주장과 대한축구협회는 사과했다. 사과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전역모를 쓴 일은 출신의 해명과 무관하게 상징의 훼손이다. 근대국가의 대전제는 단순하다. 전쟁이 나면 국가를 위해 싸우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 세금을 낸다. 그 전제 위에서 국민은 통합된 시민이 되고 동일한 민족이 되며, 국가는 그 대가로 개인을 지킨다. 유대계 미국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시민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할 준비가 있는 사람이아고 말했다. 복무와 납세는 사적 취향이 아니라 시민이 되는 조건이다. 그 조건의 표식을 금메달의 전리품처럼 쓰는 일은, 고대 그리스에서 신전을 훼손하거나 조선에서 조상을 모시는 신주단지에 오줌을 눈 일과 같은 결에 놓인다. 신전과 신주가 공동체의 신성함을 담았듯, 전역모는 그 의무를 이미 치른 사람의 표식이다. 의무를 피한 자리에서 그 모자를 기념 소품으로 쓰는 순간, 수신자에게 도착하는 문장은 하나다. 당신들의 18개월은 내가 피한 벌칙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처벌의 목적은 한 선수의 인성을 단죄하는 데 있지 않다. 예외가 예외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데 있다. 협회가 내릴 수 있는 중징계, 대표 자격의 제한, 혜택의 정치적 정당성을 다시 묻는 공개적 제재는 가능하다. 면제의 기쁨을 공식 언어로 발화하고 복무의 표식을 전리품으로 쓴 일에 대가가 없으면, 다음 금메달은 같은 문장으로 설명된다. 그 대가를 묻지 않으면,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작업을 하다 발목을 잃은 젊은이들의 한도 풀리지 않는다. 병역 면제와 지뢰 사고는 같은 세대의 두 끝이다. 한쪽은 국제대회 성적에 복무 형태의 전환을 받고, 다른 쪽은 같은 의무를 수행하다 신체를 잃는다. 두 사건의 균형을 잡지 않은 채 금메달만 쌓으면, 의무는 재능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부과되는 장면으로만 남는다.
법의 문면은 둘 다 아니라고 답한다. 병무청이 안내하는 예술·체육요원은 병역의무의 소멸이 아니다. 4주 기초군사훈련 뒤 34개월을 해당 분야에서 보내고, 544시간의 특기활용 공익복무를 채우는 보충역이다. 흔히 ‘면제’로 불리지만 정확한 이름은 복무 형태의 전환이다. 편입 기준은 올림픽 3위 이상, 또는 아시아경기대회 1위다. 제도의 출발도 개인의 권리가 아니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에 밀린 성적 이후, 1973년 ‘국위선양’을 명분으로 도입됐다. 인정 대회는 한때 넓었다가 1990년 이후 크게 줄었고, 2002년 월드컵 16강과 2006년 WBC 4강이 잠시 들어왔다가 형평성 논란 끝에 2008년 다시 빠졌다. 2018년에는 야구 대표 선발을 둘러싼 갈등으로 폐지 검토까지 갔으나, 연간 편입 인원이 수십 명 수준이라 병력 효과는 작고 사기 진작 효과는 크다는 판단으로 유지됐다. 2026년 8월 병무청은 보충역 단계적 감축 검토 속에 예술·체육요원도 상당 폭 줄이는 방안이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 제도는 헌법이 누구에게나 열어 둔 권리가 아니라, 국가가 특정 성과에 붙여 둔 정책 레버다. 레버는 목표가 바뀌면 내려간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는 말도 절반만 맞다. 결승전의 승리는 분명 노력의 결과다. 대회 내내 완성도 지적을 받으면서도 결승에서 결과를 만들었고, 양민혁의 결승 크로스는 그 과정의 일부였다. 선수 생활의 정점인 20대 초반 18개월을 부대에서 보내지 않는 것은, 짧은 전성기를 가진 종목에서는 커리어의 단절과 연속을 가르는 차이다. 이기혁에게 그 경기는 입대까지 아흐레를 남긴 현실이었다. 유럽 무대와 국내 무대를 오가는 선수에게 병역 문제가 동기가 된다는 사실 자체를 위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팬들 또한 2018년과 2022년에 그랬듯, 아시안게임 축구를 ‘금메달’과 ‘A대표로 이어질 자원의 병역 해결’을 겹쳐 응원해 왔다. 승리 직후 커뮤니티에 쏟아진 축하의 상당수가 병역을 먼저 말한 것은 그 공동의 계산이 공개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보상은 노력의 크기에 자동으로 붙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같은 밤, 같은 나이의 다른 청년은 그 계산에 들어갈 트랙 자체를 갖지 못한다. 병역판정검사 대상의 절대 다수는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분류되고, 예술·체육요원이 되는 문은 올림픽 메달과 아시안게임 금메달, 그리고 지정된 예술 경연의 극소수에게만 열린다. 공장과 물류센터, 학원가와 연구실, 중소기업 생산라인에서 같은 세대를 보내는 청년에게 아시안게임 결승은 응원의 대상이지 진입 가능한 경쟁이 아니다. 그들이 병역을 ‘피할 기회’로 바꾸려면 세계 수준의 신체 자본, 유소년 시스템, 운, 그리고 국가가 그 종목을 정책 대상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이 동시에 필요하다. 노력의 밀도만으로 비교하면 불공정하다. 축구 유망주의 하루가 고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력의 종류가 국가에 의해 미리 선별되기 때문이다. 시민이 되는 조건이 같다면, 그 조건의 무게도 재능의 시장 가격과 무관하게 같아야 한다.
돈의 문제가 여기에 겹친다. 예술·체육요원은 봉급 없는 명예직이 아니다. 편입자는 소속 구단과 계약하고, 이적료와 연봉이 오르는 시장에서 뛰며, 국가가 정해 준 공익복무 시간을 병행한다. 박승수는 뉴캐슬 소속이고 양민혁은 베스테를로 소속이다. 세 경기 16분을 뛴 선수도, 대회 내내 부진하다 결승에서 도움을 기록한 선수도, 출전 요건이 완화된 현재 규정 아래에서는 같은 편입 자격 안에 들어간다. 시장은 재능에 값을 매기고, 국가는 그 재능의 국제대회 성적에 복무 형태의 전환을 덧붙인다. 이중 보상이다. 이것을 ‘노력의 당연한 포상’으로 부르려면, 포상이 왜 축구와 야구와 수영의 금메달에는 붙고 동일한 강도의 노동과 학업, 그리고 지뢰 작업에는 붙지 않는지 설명해야 한다. 국위선양이라는 옛 명분은 1973년의 냉전 성적표에서는 설득력이 있었다. 프로 시장이 선수의 몸값을 이미 글로벌 기준으로 매기는 2026년에는 그 명분이 얇아진다. 관중은 태극기를 보고 열광하지만, 계약서의 당사자는 구단이다.
그래서 이번 발언이 유독 깊게 박힌 자리는 악의 여부가 아니다. 젊은 남성 여론이 병역의 불균등을 이미 예민하게 달구고 있던 자리였다. 여성 징집 주장, 예술·체육요원 폐지 주장, 대체복무의 형평 논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북한의 도발 수위와 DMZ 일대의 긴장이 그 예민함에 안보의 결을 더한다. 안철수 의원이 이번 언행을 비판하며 아시안게임 특례 재고를 말하고, 지뢰로 발목을 잃은 장병을 대조한 것은 그 결을 정치 언어로 옮긴 것이다. 전역모를 삐딱하게 쓴 사진이, 모자의 출처와 무관하게 ‘전역의 흉내’로 읽힌 이유도 여기 있다. 군대에 가지 않게 된 기쁨을 나누는 일과, 군대에 있는 사람의 표식을 기념 소품으로 쓰는 일은 수신자에게 다르게 도착한다. 신전과 신주가 공동체의 경계를 지키듯, 복무의 표식도 그 경계를 지킨다. 경계를 조롱으로 넘기면 시민의 통합은 말뿐으로 남는다.
역설은 응원 주체에게도 있다. 축구만을 보는 팬은 오래전부터 병역 특례를 선수 수명의 연장으로 정당화해 왔다. 금메달 직후에도 ‘면제 축하’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수혜자가 그 계산을 국대의 공식 언어로 발화하는 순간, 계산을 공유하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린다. 팬은 혜택을 수단으로 용인할 수 있어도, 대표가 혜택을 목적처럼 말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는다. 국위선양은 제도의 명분으로 남아 있는데, 당사자의 입은 그 명분을 지웠기 때문이다. 사과는 필요했다. 주장도, 협회도 그 무게를 인정했다. 다만 사과가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후배 대표가 같은 문장으로 금메달을 설명하는 한, 응원의 밀도는 줄고 특례의 정치적 수명은 짧아진다. 병력 수급 효과가 작다는 2019년의 유지 논리는, 여론이 ‘사기 진작’이 아니라 ‘조롱’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뒤집힌다.
국가가 국위선양과 종목 경쟁력을 위해 잠시 열어 둔 문이고, 그 문 앞에 서지 못하는 다수에게는 닫힌 복도로 보인다. 선수에게는 생계와 커리어의 연속이고, 입대하는 또래에게는 같은 의무가 재능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부과되는 장면이다. 둘을 동시에 인정하지 않으면 이 논쟁은 매번 인신공격으로 끝난다. 선수의 노력을 깎아내릴 필요도, 현역의 시간을 도덕적 우월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말의 자리와 제도의 자리다. 대표의 입은 혜택의 기쁨보다 경기의 무게를 먼저 말해야 하고, 국가는 1973년의 명분이 2026년의 시장과 병력 구조 앞에서도 유효한지 다시 계산해야 한다. 그 계산에는 지뢰밭에서 발목을 잃은 젊은이의 시간도 같은 무게로 들어가야 한다. 면제의 기쁨과 복무의 상흔이 한 세대 안에서 만나지 않으면, 싸우고 세금을 내는 대전제 위에서 시민이 된다는 말은 공허해진다. 시민의 조건은 광장에 나가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아시안게임 병역특혜는 노예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