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미가 만든 3,500억 달러 패키지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무기로 들고, 한국에게 ‘시장 접근을 유지하려면 현금을 들고 오라’는 것이다. 한국은 자동차·부품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가로, 전략산업에 현금 2,000억 달러, 조선 협력에 1,500억 달러를 약속했다. 사업 선정 시한은 트럼프 임기가 끝나는 2029년 1월까지이고, 현금 쪽은 연 200억 달러 한도로 나눠 넣기로 했다.
이 구조를 ‘투자 협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외교 문서의 언어다. 내용을 보면 더 가까운 말은 시장 접근을 담보로 한 ‘조건부 송금’이다. 미국이 말한 논리는 단순하다. 한국이 대미 수출로 흑자를 냈으니, 그 흑자의 일부를 관세라는 형태로 거두거나, 아니면 미국이 지정하는 사업에 돈으로 넣으라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겉모습은 협상이다. 속은 거절하면 관세, 받아들이면 현금이다.
이 선택이 억지에 가까운 이유는 세 가지 사실에서 드러난다.
첫째, 무엇을 살지 고르는 최종 권한은 한국에 없다. 2025년 11월 14일 MOU에 따르면 2,000억 달러 사업은 미 상무장관이 위원장인 투자위원회가 추천하고, 미국 대통령이 고른다. 한국 산업부 장관이 위원장인 협의위원회는 사전에 의견을 낼 수 있다.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투자만 추천한다’는 문장은 들어 있다. 그러나 추천의 문턱을 누가 해석하고, 최종 도장을 누가 찍는지는 분명하다. 돈을 내는 쪽과 물건을 고르는 쪽이 다르다.
둘째, 수익 배분이 동등한 합작이 아니다. 원리금을 갚기 전에는 한미 5대 5다. 갚은 뒤에는 한국 1, 미국 9다. 20년 안에 회수가 어려워 보이면 비율을 조정할 수 있다는 안전장치가 있다. 그래도 기본 설계는 명확하다. 위험이 큰 앞구간은 반반, 돈이 남는 뒷구간은 미국이 가져간다. 2026년 9월 들어 미국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한국이 넣자고 한 우산형 SPV(한 사업의 손실을 다른 사업 수익으로 메우는 구조)를 약화시키고, 프로젝트별 손익으로 바꾸려 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렇게 되면 ‘상업적 합리성’은 문구로 남고, 부실 사업의 구멍은 한국 계정에 남는다.
셋째, 미국이 미는 후보 사업과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업이 어긋난다. 2026년 9월 현재 1호로 거론되는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은 총사업비 약 223억 달러, 설비용량 약 6.3GW다.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라는 명분은 있다. 그러나 사업비는 198억에서 미국 요구 250억을 거쳐 223억으로 올랐다. 2호로 거론되는 미국 내 대형 원전 8기는 1기당 약 150억 달러, 합치면 약 1,200억 달러다. 미국은 웨스팅하우스 AP1000과 소수 지분(5~10%)을 말하고, 한국은 한수원 APR-1400 최소 2기와 지분 15%·이사회를 말한다. 트럼프의 역점인 알래스카 LNG는 한국이 상업성이 약하다고 본 사업이다. 그런데도 협상 테이블에서 반복해서 올라온다. 루이지애나 LNG 터미널, 중서부 탄소포집, 사용후핵연료 재활용은 빼는 쪽으로 정리됐다는 전언이 있지만, 남는 세 개만으로도 2,000억 달러 한도가 빠듯하다.
여기에 선집행 압박이 겹친다. 미국은 연 200억 달러 한도의 상당액을 2026년 말까지 먼저 보내라고 한다. 한국은 올해 소액, 내년부터 본집행을 상정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9월 18일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한 지점이 바로 회수·배분·손실이다. 같은 주 미 국무부는 외교장관 회담 자료에서 신속한 이행을 앞세우고 반도체 협력을 거론했다. 협상이 늘어지면 관세 카드가 다시 보인다. MOU에도 납입을 안 하면 이자를 미국이 가져가고, 관세가 오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재원 이야기도 이 그림과 맞물린다. 정부는 ‘외환보유고를 헐지 않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공식 조달은 한은·KIC가 외화자산을 굴려 얻은 이자·배당이고, 부족분은 한미전략투자공사(KUIC)의 정부보증 달러채다. 공사 자본금 2조 원은 본자금이 아니라 운영·보증 버퍼다. 그러나 원금을 안 깎아도, 원래 보유액을 불렸을 수익이 미국 프로젝트로 나간다. 한국이 내놓는 것은 ‘노는 돈’이 아니라 공적 외화자산의 미래 증가분이다. 국민연금이나 기업 사내유보와는 다른 계정이다.
조선 1,500억 달러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현금 일괄 납입이 아니라 한국 기업의 대미 직접투자, 보증, 선박금융이다. 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과 수은·산은·무보·해진공이 2026년 6월 협의체를 만들었다. 한화의 필라델피아 조선소가 상징처럼 거론된다. 이 축은 한국 기업이 일감을 가져갈 여지가 있다. 정부도 조선 쪽 수익은 한국 기업에 귀속된다고 설명해 왔다. 그래서 패키지 전체를 ‘강탈’ 한 단어로 덮으면 과장이다. 다만 2,000억 달러 현금 축은 그 표현이 과장이 아닌 지점이 많다. 선정권, 배분, 선집행, 부실 이전 압박이 그쪽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거절하기 어려운가. 경제 숫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정치·군사 구조가 관세 카드에 무게를 싣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은 무역 협정의 배경이 아니라 협상의 바닥이다. 같은 시기 조인트 팩트시트에는 국방비 GDP 3.5% 증액, 2030년까지 250억 달러 규모 미국산 무기 구매, 주한미군 지원 확대가 적혔다. 미국은 한국의 평화적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절차 지지, 핵추진 공격잠수함 건조 승인을 같은 문서에 넣었다. 무역과 안보가 한 테이블에 올라 있다. 관세를 거부하면 자동차·부품 수출이 먼저 맞는다. 그 다음 줄에는 동맹 관리, 전작권, 확장억제, 대북 억지라는 더 무거운 항목이 있다. 한국 정부가 ‘상업적 합리성이 없으면 안 한다’고 반복하는 것은 이 바닥을 알면서도, 바닥 전체를 들어 올리지는 못하겠다는 뜻이다.
트럼프식 거래는 이 바닥을 더 노골적으로 만든다. 동맹을 공동체의 의무가 아니라 지금 당장 계산서를 끊는 계약으로 본다. 일본이 더 큰 패키지를 약속한 것도 한국 협상실의 압력이다. ‘다른 나라도 냈는데 한국만 안 내면 관세가 돌아온다’는 비교가 작동한다. 국내 정치도 같다. 관세가 오르면 수출 대기업과 협력업체, 고용, 성장률이 먼저 보인다. 투자 패키지의 장기 부실은 나중에 보인다. 선거 주기는 후자를 이기기 어렵다.
그래서 질문, ‘이런 강탈에 굴복해야 하는가’는 도덕 문제가 아니라 거절의 가격을 누가 치르느냐의 문제다. 거절의 가격은 즉각적이다. 관세 15%가 다시 25%로 돌아가고, 반도체 대우가 흔들리고, 조선 협력의 문도 좁아질 수 있다. 동맹 문서에 적힌 핵잠·농축 관련 문구도 정치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수용의 가격은 분산된다. 연 200억 달러 한도, 10년 이상, 외화 운용수익과 공사채, 개별 프로젝트의 부실. 눈에 덜 띈다. 국가가 이런 거래에서 자주 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굴복이 아닌 선택으로 남기려면, 한국이 이미 문서로 확보한 장치를 실제 계약에서 지키는지가 기준이 된다. 연 200억 달러 한도의 명문화, 상업적 합리성—한국으로 돌아올 수입이 원리금을 덮는지—의 수치화, 우산형 SPV 유지, 한국인 프로젝트 매니저, 기자재·EPC의 한국 기업 참여, 알래스카처럼 회수가 안 보이는 사업의 제외, 선집행 거부. 이 목록이 빠지면 15% 관세는 받되 2,000억 달러는 회수 가능성이 낮은 미국 국내 정치 사업의 밑돈이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실무 합의에 제동을 건 지점도 여기다. 제동이 관세 리스크를 키우는 것은 사실이다. 제동을 안 걸면 리스크의 형태만 바뀐다.
한국이 이 거래에서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주권은 ‘안 한다’가 아니라 어떤 사업에는 안 한다를 관철하는 일이다. 관세와 동맹을 한꺼번에 뒤집을 힘은 현재 구조에 없다.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 고른 모든 사업에 공적 외화수익을 넣는 일이 동맹의 숙명은 아니다. 동맹은 주둔과 억제의 거래이지, 텍사스 발전소와 알래스카 파이프라인의 손실을 한국 재정으로 메우는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미국은 한국 수출의 성과를 관세와 현금 중 하나로 회수하려 한다. 그 회수의 형식은 MOU와 특별법과 공사라는 제도를 입었다. 한국은 관세와 안보를 동시에 걸려 있어 문을 닫기 어렵다. 그러나 문을 연 뒤 상업성이 없는 사업까지 받아쓰는 것은 동맹이 아니라 이전이다. 2026년 9월의 쟁점은 이미 그 경계선 위에 있다. 굴복 여부는 3,500억이라는 큰 숫자가 아니라, 앞으로 서명될 1호·2호 계약의 회수 조항이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