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9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제시한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국가가 서야 할 자리가 담겨 있었다. 전쟁에 관여하거나 개입하는 파병은 없다. 군이든 자산이든 그런 형태의 파병은 하지 않으며, 그 원칙은 지금까지 지켜왔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동시에 자국 상선과 원유 수송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은 필요하며, 이미 아덴만에 나가 있는 청해부대의 활동을 강화하는 방안은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파병’이라는 두 글자에 모든 것을 넣으면 안 되는가
이 두 문장을 한 덩어리의 ‘파병’으로 묶어버리면 사고가 거기서 멈춘다. 전쟁 당사자가 되어 전투병을 보내는 일과, 위험해진 항로에서 우리 국민과 선박을 지키는 일은 같은 글자가 아니다. 다른 나라들 역시 자국 선박과 항로를 위해 군사 자원을 움직이며, 후티처럼 실제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위험과 전쟁 당사자 지위는 같지 않다. 구분을 지키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남의 전쟁의 보조전력이 되거나, 에너지 동맥이 끊겨도 손 놓고 구경하는 나라가 된다. 둘 다 주권 국가가 할 선택이 아니다.
기름이 안 들어오면 규탄만으로 나라가 도는가
호르무즈는 지정학 교과서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숨구멍이다. 세계 해상 원유의 약 5분의 1이 이 좁은 수로를 지나고, 한국 원유 수입의 대략 70% 안팎이 중동에 의존하며 그 물량의 거의 전부가 이 해협을 경유한다. LNG의 상당량도 같은 권역에 묶여 있다. 유가가 오르면 수입액이 불어나고, 나프타와 석유화학과 운송과 물가로 연쇄된다. 2026년 미-이란 충돌이 장기화하고 해협 통항이 제약되며 홍해까지 위험이 겹치는 지금, ‘미국만 규탄하면 되는가’라는 질문은 추상이 아니라 공장과 주유소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전쟁 개입의 문을 슬그머니 열자는 말은 아니다. 기름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을 상상하되, 그 상상이 참전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에너지 안보의 해법은 세 층으로 나눠 생각해야 한다. 외교적으로는 종전과 통항 보장, 다자 해상 안전 협의에서 한국이 당사자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중동 의존을 낮추고 도입선을 다변화하며 비축과 대체 항로를 제도화해야 한다. 군사적으로는 이미 대해적·호송 명분으로 나가 있는 청해부대처럼, 우리 선박 보호에 한정된 최소 방호를 유지해야 한다. 세 번째를 앞의 둘 없이 확대하면 전쟁 개입이 되고, 앞의 둘만 하고 세 번째를 방기하면 선원과 유조선을 내버리는 나라가 된다. 대통령이 말한 최소한의 활동은 바로 그 상한선이다.
청해부대는 2009년부터 아덴만에서 우리 선박을 호송해 온 부대다. 국회 동의가 있고 작전 구역은 원칙적으로 아덴만이다. 최근 왕건함이 드론 위협에 맞춰 방호를 보강한 것은 그 해역의 현실에 대한 대응이지, 그 자체로 호르무즈 참전 함대가 된 것은 아니다. 이 부대를 연합 전투 편성으로 재포장하는 순간 명분과 법적 근거와 장병 안전이 한꺼번에 흔들린다. 강화는 가능하되 목적과 구역과 지휘권과 교전규칙을 우리 주권의 문서로 못 박아야 한다.
왜 미국-이란 전쟁에 한국군을 넣으면 안 되는가
미국-이란 전쟁에 한국군을 넣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감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번 충돌은 한국이 공격받은 전쟁도, 유엔이 한국에 집단안전보장을 요청한 전쟁도 아니다. 동맹이 요청했다고 자동으로 정의가 되는 구조는 동맹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외주에 맡기는 것이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이 ‘재건’과 ‘동맹’으로 포장됐지만 전쟁의 정치적 소유권은 시종 미국에 있었고, 한 번 올라간 무대에서 철수의 주도권은 줄어들었다. 외국군 지휘 아래 배속되는 순간 우리 장병의 생사는 헌법과 국회가 아니라 타국 작전의 필요에 묶인다. 전시작전통제권조차 온전히 가져오지 못한 나라가 중동에서 또 다른 외국 지휘 체계에 병력을 올리는 것은 주권의 이중 위임이다.
보복의 기하급수도 못 본 척할 수 없다. 이란과 후티는 이미 해협과 홍해의 상선, 역내 시설을 압박 수단으로 쓴다. 한국이 연합 전투 편성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국적 선박과 공관과 교민이 보복 목록에 올라간다. 보호하겠다고 보낸 병력이 보호 대상을 넓히는 역설이다. ‘정찰’, ‘기뢰 제거’, ‘기술 지원’, ‘비전투 자산’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지만 목적 조항이 느슨하면 모두 전쟁 지원으로 읽힌다. 허용 가능한 활동은 우리 국적과 우리 선원과 우리 화물에 한정된 방어적 호송이어야 하고, 공세와 봉쇄와 정권 교체 지원은 원천 차단해야 한다. 파병은 성명서가 아니라 청년의 신체다. 명분이 흐릿한 전쟁에 한 명이라도 묻는 것은 동맹의 체면을 생명보다 위에 두는 일이다.
구호가 협상력을 깎지 않게
반대도 현명해야 한다. 국내의 강한 반대 여론은 정부가 워싱턴과 줄다리기할 때 실제 카드가 된다. “우리 국민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절의 국내 비용을 낮추고 대외 설득력을 높인다. 그러므로 파병 반대의 과제는 목청이 아니라 설계다. 협상력을 높이고 손해를 줄이며 명분을 지키면서 실리를 챙기는 쪽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사안이 터질 때마다 철 지난 ‘미제 반대’ 한 줄로 모든 구조를 덮어버리는 습관은 그 설계를 죽인다. 선박 보호와 전쟁 개입을 구분하는 정밀함이 사라지고, 정부가 거절의 근거로 쓸 설득력도 함께 사라진다.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것은 구호를 외치는 일이 아니다. 한국이 더 이상 타국의 전쟁 일정에 병력을 맞추지 않는 국가가 되는 일이다. 국민이 싸워야 할 전선은 중동의 참호가 아니라 국회 동의의 문턱, 파병 목적과 구역과 지휘와 철수 조건을 법률로 묶는 일, 에너지 의존 구조를 바꾸는 일, 전작권 전환을 정쟁의 볼모에서 빼내는 일이다. 함정 한 척을 더 보내는 일이 아니라, 보내지 않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 반제국주의다.
이재명의 선을 지지하는 이유
이재명의 선을 지지하는 이유는 전쟁 불개입을 모호한 수사로 남기지 않고 공개 자리에서 반복해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지는 맹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청해부대 강화가 아덴만 호송의 연장인지 호르무즈 연합작전의 우회 진입인지, 지휘권이 한국 합참에 있는지 사실상 외국 사령부에 넘어가는지, 교전규칙이 우리 선박 방어에 닫혀 있는지 ‘항행의 자유’라는 넓은 말로 열리는지를 국민이 검증해야 한다. 경계가 한 글자만 밀려도 원칙은 무너진다.
종착점은 전작권과 자주국방이다
매번 이런 벼랑에 서는 까닭은 동맹이 존재해서가 아니다. 동맹 자체와, 동맹이 한국군의 사용권을 사실상 선점하는 구조는 다르다. 전작권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 파병 논쟁은 언제나 왜곡된다. 겉으로는 ‘갈 것인가’를 토론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거절할 수 있는 국가인가’를 시험받는다. 자주국방은 구호가 아니라 정보와 감시, 해상 교통로 방호, 미사일과 드론 대응, 에너지 비축, 방위산업, 그리고 동맹의 요청을 헌법 절차로 거를 수 있는 제도다. 스마트 강군도 전작권이 없거나 해외에서 다시 외국 지휘에 병력을 올리면 반쪽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의 결론은 분명하다. 미국-이란 전쟁에 한국 전투병을 보내는 일은 없다. 우리 상선과 선원과 원유를 방치하는 일도 없다. 반대를 구호로만 소비하지 않고 정부의 거절을 뒷받침하는 국민적 압력으로 조직한다. 그 압력의 종착점은 중동 참전이 아니라 전작권 회수와 자주국방이다. 남의 전쟁에 청년을 바치지 않는 나라, 자기 배와 자기 기름길은 스스로 지키는 나라, 동맹을 관리하되 동맹에 주권을 넘기지 않는 나라. 이재명이 그은 선은 그 이론의 입구다. 입구를 지키지 못하면 길은 다시 남의 작전도로 열리고, 입구를 지키면 한국은 전쟁의 조연이 아니라 자기 운명의 당사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