品
Logo
Corea든 Korea든, 품격은 이름보다 먼저다
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지금
Now
751 Diaspora
유산
Heritage
인문
Humanity
未冷尸
Mirengsi
정치
Politics
언론
Media
Thumbnail
이제 마지막 남은 중심은 미국이다. 트럼프와 같은 미국 중심주의가 전면에 나온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category-icon

천하天下

칼럼
baba77

중심이 사라진 세계와 민족주의의 부활

Views
0
2026. 10. 07
  • 개인의 헌것에 대한 애착을 통해 제국의 흥망성쇠와 문명의 순환이라는 거시적 통찰로 나아가는 글입니다.
  • 제국의 쇠퇴는 보편주의의 약화와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지며, 이는 역사적 필연이자 중력과 같은 질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 미국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는 현 상황에서, 폐쇄적 민족주의가 아닌 자강과 개방을 겸비한 새로운 민족주의 설계를 통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제국이 남긴 유물이 결국 유령처럼 변하듯, 현재의 보편적 질서 또한 영원하지 않음을 강조하며 주체적 생존 전략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나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다. 헌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최신식 블루투스 스피커보다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를 더 좋아한다. 사람도 새로 사귄 사람보다 오래 알던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러니 나는 이혼을 하거나 새 파트너를 찾을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아내는 내 방에 쌓여 있는, 젊은 시절 외국 생활을 하며 모은 책과 잡지와 골동품을 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습성이 나와 그녀를 묶어 주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내 골방에 특별한 자치권을 주었다.
 
로마나 이스탄불에 출장 갈 기회가 생기면 나는 유적을 찾아다닌다. 대리석 건물 앞에 서서 그때 사람들이 지금 우리보다 더 높은 물질적 수준을 누렸다는 사실에 놀란다. 로마 제국이 재정 위기와 인구 감소로 기울자 로마라는 도시는 촌스럽고 가난한 도시로 쪼그라들었다.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배출하던 명문가의 자손들은 라테라노 궁의 교황청으로 들어가 주교가 되어 겨우 생계를 이었다. 고대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의 화려한 문화와 부,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던 군사력은 한순간에 증발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세상은 언제나 진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제국이 물러간 자리에는 예전부터 그 땅에 있던 것이 다시 올라온다. 갈리아와 브리튼에서는 로마식 도시 생활과 라틴 행정이 얇아지고, 그 아래 잠들어 있던 토착 질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로마의 도시·행정 질서가 무너진 뒤 베르베르 세력과 이후의 이슬람 질서가 그 자리를 채웠다. 로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로마가 강제하던 중심이 무너지자 주변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영국이 제국의 지위를 잃은 뒤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제국을 유지하려고 만들어 둔 제도와 경제 시스템, 해외 인프라와 남은 식민지 관계는 이익보다 부담이 되었다. 파운드 블록과 해군력, 영연방의 허울은 한동안 위엄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영국 본토의 활력을 짓누르는 무게였다. 침체는 불가피했고, 영국인들은 과거를 회고하며 살게 되었다. 미국에게 이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미국이 패권의 자리를 잃는다면, 그 거대한 군대와 월가 파워엘리트의 화려한 삶, 할리우드와 베벌리힐스의 명품점, 심지어 백악관을 비롯한 정부 건물조차 유지비가 달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어두운 건물로 변할 수 있다. 제국의 건축은 제국의 현금흐름이 끊기는 순간 유령이 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소련 제국이 무너진 뒤의 러시아 도시를 보면 된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회색 아파트 단지, 녹슨 놀이터 기구, 더러운 벤치, 그 옆에 버려진 주사바늘은 한때 초강대국이었던 나라의 민낯을 보여 주었다. 제국이 강요하던 이데올로기와 질서가 사라지면 민족주의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확장과 수축에 가까운 중력이다. 중심이 팽창할 때는 보편주의가 설득력을 얻고, 중심이 수축할 때는 각 민족이 제 집을 다시 짓는다.
 
북한도 그 법칙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북한이 국가사회주의에서 김일성 민족주의 국가로 기울어진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이라는 중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체제 유지의 근거를 세계 혁명에서 민족의 신화로 옮긴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은 사회주의 중심의 몰락 이후 시장경제로 방향을 틀었다. 북한은 그 길을 끝까지 가지 못했다. 영화를 사랑한 독재자 김정일은 1998년 방북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만나 금강산 개발과 경협에 관심을 보였다. 남한식 개발 국가의 성과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1984년 합영법을 만들고, 1991년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지정했으며, 이후 나진-하산 같은 국경 협력 구상도 내놓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혁은 체제 붕괴를 두려워한 채 멈췄다. 민족주의의 내용물을 빵이 아니라 핵으로 채운 것이다. 1994년 한반도 핵위기를 레버리지로 삼아 제네바 합의를 끌어내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민족국가로서 생존 시간을 벌었다. 개방은 시늉이었고, 핵은 보험이었다.
 
유럽도 중심이 흔들린 뒤의 방황을 보여 준다. 냉전 이후 유럽 통합은 야심 찬 기획이었다. 그러나 관료주의가 두꺼워지고, 동성애·인권 담론을 포함한 정치적 올바름이 공동체의 우선순위를 재배열하는 동안 산업과 에너지의 기초는 약해졌다. 러우전쟁이 던진 전기·에너지 청구서 폭탄을 맞고 나서야 그 허약함이 드러났다. EU는 여전히 어디로 가고 무엇을 먹고살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다. 보편 문명의 간판은 남아 있으나, 그 간판을 지탱하던 값싼 에너지와 안보 배당은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 남은 중심은 미국이다. 트럼프와 같은 미국 중심주의가 전면에 나온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전성기의 미국은 민주주의적 도덕과 자유시장 질서를 위해 국익과 자국민의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자처했다. 지금의 미국에게 그런 말은 사치다. 동맹국이 돈을 내지 않고 투자하지 않으면 관세를 올리겠다는 심사는, 이미 미국이라는 주식회사를 손절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감을 준다. 제국주의가 무너지면 비 온 뒤 버섯처럼 민족주의가 새로운 느낌으로 올라온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다.
 
410년, 서고트족의 용병 대장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을 때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썼다. 로마가 죽은 자리에 신의 나라가 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상의 제국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그 공백을 다른 질서로 메우려 했다. AI 기술 혁신으로 미국의 금융시장이 활황을 보이는 동안에도 국채 금리의 출렁임은 심상치 않다. 번영의 표면 아래 유지 비용과 신뢰 비용이 동시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힘을 조금이라고 의심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친일·친미 언론이나, 미국 대통령을 새로운 현대적 천황처럼 모시는 사람들은 존버 정신으로 미국 만세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라는 중심이 옅어지는 시기에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민족주의라면, 어떤 민족주의를 만들 것인지 설계를 시작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폐쇄와 원한으로 뭉친 민족주의가 아니다. 제국의 잔해 위에 주저앉아 과거만 읊는 영국식 회고도 아니고, 핵으로 시간을 버는 북한식 생존 민족주의도 아니다. 중심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지킬 힘과 바깥과 거래할 개방을 동시에 가진 민족주의다. 남의 함대와 남의 이념에 혼을 맡긴 채 보편을 흉내 내는 나라는, 그 보편이 철수한 날 가장 먼저 멈춘다. 로마의 대리석이 폐허가 되고, 소련의 이념이 회색 아파트로 남듯, 미국의 질서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때 남는 것은 결국 제 땅에서 제 언어로, 제 제도와 제 산업으로 버티는 사람들뿐이다. 그 버팀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 설계는 중심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댓글
( 0 / 500 )
paran26
8
골동품과 유적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해 문명의 흥망성쇠와 국제질서의 변화까지 확장되는 흐름이 독특합니다. 결국 오래된 것을 들여다보는 이유도 현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강대국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 0 / 500 )
joongsub
6
로마에서 소련까지 이어지는 사례를 통해 ‘중심의 쇠퇴가 주변의 재등장을 부른다’는 논리를 설명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미국의 쇠퇴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질서가 바뀌더라도 한국이 스스로 버틸 기반을 갖추고 있느냐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 0 / 500 )
기억속으로
5
민족주의를 폐쇄와 배타의 언어가 아니라 산업·국방·제도·개방을 함께 갖추는 자기보존의 원리로 보자는 대목에 공감합니다. 강대국에 기대는 것과 강대국과 협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 0 / 500 )
나무77
5
다만 미국의 쇠퇴를 로마나 소련의 몰락과 동일선상에서 보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금융·기술·군사·동맹이라는 복합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글의 핵심은 미국이 반드시 무너진다는 예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립할 수 있는 국가 역량을 갖추자는 주장으로 읽힙니다.
( 0 / 500 )
koa
5
제국의 쇠퇴를 단순한 패권국의 교체가 아니라 ‘중심의 약화와 주변의 재등장’이라는 구조로 설명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역사는 직선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는 문제의식이 잘 드러납니다.
( 0 / 500 )
김기태
3
특히 북한을 ‘민족주의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소련이라는 중심이 사라진 뒤 체제의 정당성을 민족과 핵에서 찾았다는 설명은 북한의 변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분석틀이 될 수 있겠습니다.
( 0 / 500 )
남강82
3
‘중심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설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민족주의를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구호가 아니라, 자기 언어와 제도와 산업을 지키면서 세계와 계속 거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면 지금 한국에도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 0 / 500 )
nadan
3
로마의 폐허에서 시작해 소련과 북한, 유럽과 미국까지 연결한 시야가 넓습니다. 특히 강대국의 질서가 사라진 뒤 무엇이 그 자리를 채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은 지금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데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 0 / 500 )
박병규
2
민족주의가 반드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이념일 필요는 없다는 주장에 주목하게 됩니다. 자기 나라의 산업과 국방을 지키면서도 외부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개방적 민족주의라면 기존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습니다.
( 0 / 500 )
신고내용

신고내용을 선택해주세요
회원비난/비하/욕설글 및 댓글도배성 게시물저작권 침해/불법자료 유출허위사실유포개인정보 유출.사생활 침해무단광고/홍보음란물 및 도박 불법 광고물범죄행위 관련 글불법행위 관련 소개물품 판매 및 사기글악성코드 및 스파이웨어 유포기타 사유 및 운영진 판단
ID
PasswordShow password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Sign in with Google
열린국회정보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열려라국회국회입법예고참여연대참여연대

All information provided by us is free of charge and is for the public good.

ⓒ 2022. P-UM.net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