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과 동독 소도시 광장에서는 2026년 가을에도 서로 다른 함성이 겹쳤다. 한쪽은 작센-안할트 주의회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40%대 득표로 1위를 차지한 뒤 “파시즘은 대안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시위대였고, 다른 한쪽은 연금·이민·전기요금·공장 폐쇄를 묶어 “이 나라는 더는 우리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유권자였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내각은 집권 1년 반을 겨우 넘긴 채 지지율 바닥을 기고 있었고, 전국 여론조사에서 AfD는 27~29%로 제1당, 기민·기사연합은 20% 안팎까지 밀렸다. 한때 유럽의 기관차이자 수출 기계의 모범으로 불리던 나라가, 전후 대륙형 산업국가가 맞닥뜨린 구조적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평화 배당금이 사라진 자리
냉전 이후 독일이 누린 여유는 세 겹이었다. 낮은 국방비, 러시아 파이프라인 가스, 중국 시장의 수요.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선의 확장은 그 전제를 한꺼번에 지웠다. 나토는 2035년까지 방위 본연에 국내총생산의 3.5%, 광의의 안보에 5%를 쓰겠다는 목표를 걸었다. 독일의 방위비는 2025년 GDP 대비 약 2.2%에서 2026년 2.7% 안팎으로 올라간다. 2027년 국방부 본예산만 1,097억 유로로 잡혀 연방 예산의 약 5분의 1이 되고, 정부는 2029년까지 3.5%를 앞당기겠다고 한다. 그 돈은 절약에서 나오지 않는다. 2025년 3월 개헌으로 부채 제한(Schuldenbremse)을 풀어 국방비 중 GDP 1%를 넘는 부분을 예외로 두고, 12년에 걸쳐 5,000억 유로짜리 인프라·기후 특별기금을 만들었다. 재정 금욕의 나라가 한순간에 재정 바주카를 꺼내 든 순간이었다.
재정적자는 2025년 GDP의 3% 안팎에서 2026년 4%대로 벌어지고, 2028년에는 4.3~4.6%까지 커질 전망이다. 국가부채 비율은 아직 64%대지만 68~70%를 향해 올라간다. 독일은 유로존의 중심국이다. 독자 통화라는 완충이 없고, 스스로 적자 경로가 곧 유럽 전체의 금리와 규칙이 된다. 국방비를 더 올리면 연금 보장률, 장기요양, 시민수당, 산업용 전기 보조 중 어딘가를 건드려야 한다. 메르츠 정부는 연금 수급 연령과 병가 수당을 손보려다 연립 파트너인 사민당과 충돌했고, 작센-안할트 참패 다음 날 사민당은 개혁안을 다시 열자고 요구했다. 개혁의 재정 효과는 미뤄지고 정치적 비용만 남았다.
안보는 더는 공짜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은 안보를 사는 대가로 복지를 줄일 정치적 합의를 만들지 못했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거리와 여론조사의 거부권이다. 반AfD 시위와 반이민·반 에너지전환 정서, 동독의 박탈감과 서독 대도시의 도덕 정치가 교차한다. 정부는 개혁을 시도하다 흔들리고, 흔들린 뒤에는 다시 특별기금과 적자를 키운다. 위기는 금리 폭등이 아니라 성장의 질과 정치의 균열로 나타난다.
수출 기계의 균열
독일 모델은 값싼 에너지와 중국 시장, 자동차·기계·화학의 중간재 사슬 위에 세워졌다. 파이프라인 가스는 끊겼고, 액화천연가스는 운송·재기화 비용 때문에 예전 가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보조금을 얹어도 미국·중국의 두 배에 가깝다. 정부는 2026년부터 에너지 집약 산업에 도매가의 최대 50%를 보전하는 산업용 전력 요금제를 도입했으나, 전환의 비용을 세금으로 떠받치는 임시 장치에 가깝다. 2026년 중동 충돌은 유가와 도매 전력을 다시 흔들었고, 가계 에너지 부담은 소비를 짓눌렀다. 연구소들이 가을 전망에서 성장률을 올려 잡은 바로 그 순간에도 에너지 가격을 핵심 리스크로 따로 적어 둔 이유다.
경상수지 흑자는 2025년에도 GDP의 4.5%를 유지했다. 그러나 흑자가 곧 경쟁력은 아니다. 대중국 상품수지 적자는 2025년에만 280억 유로가 더 벌어져 720억 유로에 달했고, 세계 시장 점유율은 계속 빠지고 있다. 2026년 성장률 전망은 기관마다 0.5%에서 1.4%까지 갈리지만, 공통점은 잠재성장이 1%를 밑돈다는 것이다. ifo는 10년 말까지 잠재성장을 0.1%로까지 내려다보았다. 고용 공단 기준 실업률은 6.3%에서 크게 내려가지 않고, 노동 공급 자체가 줄어드는 나라에서 고용 없는 회복이 구조화되고 있다.
자존심의 핵심은 폭스바겐·BMW·메르세데스, BASF와 티센크루프에 있었다. 그 사슬이 중국의 전기차와 과잉생산 앞에서 흔들린다. 폭스바겐은 최대 10만 명 감원과 국내 공장 4곳 폐쇄를 검토하는 단계까지 갔고, 중국 시장 점유율은 예전의 절반 아래로 내려앉았다. 유럽 신차 시장에서 중국 브랜드 점유율은 10%를 넘었다. 화학과 철강도 고에너지 가격과 탄소 비용 앞에서 설비를 줄이거나 해외로 옮긴다. 재생에너지 전환은 전력 믹스에서는 앞서갔으나, 간헐성과 계통 비용은 공장의 입지 조건으로 돌아왔다. 기업들은 주 선거와 예산안, 2029년 총선 전까지 관망한다. 투자가 멈추면 생산성도 멈춘다.
이민 완충의 한계
합계출산율은 2025년 1.32명으로 떨어졌다. 1997년 이후 최저치다. 독일 국적 여성만 보면 1.20명이다. 2025년 출생은 65만 4천 명, 사망은 약 100만 명으로 자연감소가 34만~36만 명에 달했다. 2022년 이후 네 해 연속 30만 명을 넘는 적자다. 인구가 소폭이라도 늘어나던 것은 순이민 덕분이었으나, 2025년 순이민은 22만~26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그 결과 연말 인구는 약 8,350만 명으로, 2020년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외국인 주민 증가폭도 15년 만에 가장 작았다. 65세 이상 비중은 계속 올라가고, 노동연령 인구의 부양 부담은 가팔라진다.
연금과 건강보험, 장기요양은 이미 재정의 핵심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80대로 진입하면 지출 곡선은 더 가팔라진다. 이민으로 노동력을 메우는 방식은 2010년대 성장의 숨은 엔진이었다. 그러나 주택·학교·치안·사회부조의 정치적 대가는 누적됐다. 난민 숙소와 치안 사건, 동독 소도시의 공허함, ‘두 개의 독일’ 논쟁은 AfD의 가장 강한 연료다. 바이델과 크루팔라는 대규모 송환과 국경 통제를 말하면서 동시에 연금과 산업 일자리의 방어를 약속한다. 경제학적으로는 긴장이다. 노동력 유입을 줄이면서 고령 복지와 재무장 비용을 동시에 지키겠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일관된다. ‘우리 돈을 우리 노인과 우리 공장에’라는 감정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삼각형
전후 독일은 미국의 안보, 유럽 단일시장의 규칙, 내부의 사회국가와 수출 기계가 삼각형을 이루며 작동했다. 그 삼각형이 동시에 흔들린다. 안보 면에서 독일은 규범과 수표를 수출하는 민간 강국에서 군사 주권의 재건으로 전환 중이다. 전차와 방공, 우크라이나 지원, 나토 동부 전선의 주둔은 새로운 기둥이다. 그러나 전환 속도는 병력과 탄약, 그리고 여론에 묶여 있다. 폴란드는 GDP의 4%대를 방위에 쏟고 발트 3국은 5%에 근접하는 동안, 독일은 예산의 숫자를 끌어올리되 징집제와 사회 합의의 벽에 막혀 있다. 미국의 안보 공약이 거래 조건으로 바뀌는 세계에서, 독일은 유럽의 책임을 되뇌면서도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병력과 탄약을 아직 채우지 못한다. 에너지와 물류와 물가가 흔들릴 때마다 “공장이 먼저”라는 구호는 커진다.
경제면에서 세계는 효율의 세계화에서 안보의 블록화로 이동한다. 중국의 과잉생산과 미국의 산업정책은 독일을 양쪽에서 압박한다. 보호주의와 보조금으로 잔존 산업을 지키는 길, 인도·인도 태평양과 동맹형 공급망에 편입되는 길, 유럽 안에서 산업정책을 키우는 길이 뒤섞여 표류한다. 방위산업과 인프라 특별기금은 진전되지만, 에너지 가격과 생산성 정체, 동독의 원심력은 속도를 맞추지 못한다.
정치면에서 중도가 붕괴하고 있다. AfD는 항의 정당이 아니라 주 정부를 넘보는 제1당 후보다. 기민련은 시장의 얼굴로 잠시 집권했으나 주택·이민·에너지·공장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면 그 집권은 소진된다. AfD의 승리는 유럽 인권협약, 기후 목표, 대외원조, 대러시아 노선을 흔들 것이고, 좌파 블록의 재집권은 부채 제한의 잔여 규범과 산업 보조금의 한도를 시험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후 독일이 자임해 온 규칙을 만드는 유럽의 중심 역할은 약화된다.
정밀기계와 자동차, 회계 규칙과 재정 규율이라는 독일발 언어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하던 값싼 에너지와 군사적 여유와 인구의 여력은 줄었다. 세계는 협력보다 각자도생을 선택하고, 독일은 그 한복판에서 내부 합의조차 만들지 못하는 역설에 빠져 있다. 독일은 평화를 러시아 가스와 중국 시장과 부채제한으로 샀다. 공장이 먼저 떠나는 나라에서, 안보 비용을 현재 세대가 거부하고 인구 비용을 이민으로 미루고 산업 전환 비용을 보조금으로 덮는 한, 성장은 1% 언저리에서 맴돌고 정치는 거부권의 경연이 된다. 2026년 가을의 독일은 아직 몰락한 나라가 아니다. 다만 전후 가장 성공한 대륙 모델이, 그 성공의 전제가 사라진 뒤에도 같은 문법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