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리옹, 마르세유 거리에서는 2026년 가을에도 ‘모든 것을 멈춰라(Block Everything)’를 외치는 시위가 되살아났고, 예산안을 둘러싼 내각은 거듭 무너졌다. 성장은 0%대에 머물며 사실상 정체에 가깝고, 공공부채는 GDP 대비 117~118%를 넘어 3조5천억 유로를 웃돈다. 2027년 대선을 앞두고 여론은 극우 국민연합(RN)과 극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사이로 갈라져 있다. 한때 ‘유럽적 삶의 방식’의 수도였던 나라가, 이제는 대륙이 맞닥뜨린 구조적 위기의 실험실이 되었다.
공짜 평화의 끝, 그리고 재정의 전쟁
냉전 이후 유럽이 누린 평화 배당금은 국방비를 복지와 교육으로 돌릴 수 있게 해준 숨은 재원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그 전제는 사라졌다. 나토 회원국들은 이미 2% 기준을 넘겼고, 2025년 정상회담에서는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의 5%를 방위에 쓰겠다는 목표까지 내걸었다. 독일은 국방비를 급격히 올려 나토 기준으로 GDP의 2.6~2.7%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유럽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는 수년 사이 명목으로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늘었다.
문제는 돈이 어디서 오느냐다. 프랑스의 방위비는 GDP 대비 2.1~2.2% 안팎으로, 독일보다 느리고 동유럽 전선 국가들보다 훨씬 낮다. 핵억제력과 해외 투사 능력을 가진 나라치고는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재정적자가 GDP의 5%를 넘고, 이자 지급만 연간 600억 유로를 웃돈다. 국방비를 더 올리면 연금·의료·지방교부금 중 어딘가를 깎아야 한다. 2023년 마크롱 정부가 강행한 연금 개혁(정년 상향)은 거리의 반발과 의회 교착 속에 2028년 1월까지 동결됐다. 개혁의 재정 효과가 미뤄진 대신, 정치적 비용만 남았다.
안보는 더 이상 ‘공짜’가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안보를 사는 대가로 복지를 줄일 정치적 합의를 만들지 못했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거리의 거부권이다. 노조와 청년, 은퇴자 집단이 교차하는 시위 문화는 단순한 사회 갈등이 아니라, 국가가 미래 비용을 현재 세대에게 전가하지 못하게 막는 사실상의 거부권 장치다. 그 결과 정부는 긴축을 시도하다 무너지고, 무너진 뒤에는 다시 적자를 키운다.
값싼 에너지와 중국 시장의 이중 붕괴
독일 모델은 러시아 가스와 중국 시장에 기대어 작동했다. 그 모델은 이미 깨졌다. 유럽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보다 대략 두 배, 중국보다 50%가량 높다. 화학·철강·자동차의 생산 기지가 미국과 아시아로 빠져나가고, 폭스바겐을 비롯한 완성차 업체들은 대규모 감원을 발표했다. 중국은 더 이상 유럽의 최종 시장이 아니라, 전기차·기계·자본재에서 유럽을 밀어내는 경쟁자다. 독일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급감했고, 일부 분석은 독일 GDP 부진의 상당 부분을 ‘중국 쇼크 2.0’과 에너지 비용에 돌린다.
프랑스는 여기서 독일과 다르다. 원전 비중이 높아 전력 가격이 독일보다 낮다. 제조업 비중도 독일의 절반 수준이라 중국발 산업 충격의 직접 타격은 상대적으로 작다. 항공우주와 명품, 농식품, 원자력 기술은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상대적 완충’은 착각을 낳았다. 산업 공동화가 덜하다고 해서 성장 엔진이 있는 것은 아니다. 2026년 프랑스 성장률은 0.6% 안팎으로 전망되고, 1분기 역성장 뒤 2분기 제로 성장으로 기술적 침체 언저리에 섰다. 실업률은 8.1~8.3%로 다시 올랐고, 청년 실업은 21%를 넘는다. 스페인 청년 실업 23.4%, 이탈리아 18.4%와 함께, 남유럽·프랑스형 ‘젊은이의 나라 없는 나라’가 고착되고 있다.
더 깊은 문제는 기술 주권이다. 글로벌 시가총액 최상위권에 유럽 빅테크는 없다. GDPR로 대표되는 규제 환경과 위험 회피적 자본 시장은 스타트업이 미국 규모로 크는 것을 막았다. 데이터와 클라우드, AI 인프라는 미국 플랫폼에 의존하고, 태양광·배터리 공급망의 실익은 중국이 가져갔다. 프랑스는 ‘스타트업 국가’를 외쳤지만, 그 구호는 재정 적자와 정치 불확실성 앞에서 빛이 바랬다. 기업들은 2027년 대선 전까지 관망한다. 투자가 멈추면 생산성도 멈춘다.
인구: 프랑스조차 자연감소의 문턱을 넘다
유럽연합의 합계출산율은 1.3명대 초반까지 내려왔다. 이탈리아 1.18, 스페인 1.10 수준은 이미 ‘재생산 불능’에 가깝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유럽의 예외였다. 가족수당과 보육, 비교적 높은 여성 경제활동이 1.8명대를 지탱했다. 그 예외가 깨졌다. 2025년 합계출산율은 1.56으로 1차 대전 이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고, 출생 64만5천 명 대 사망 65만1천 명으로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연증가가 마이너스가 됐다. 인구가 소폭 늘어난 것은 순이민(+17만6천 명 추정) 덕분이다. 65세 이상이 전체의 22%로, 20세 미만과 거의 같아졌다.
마크롱이 ‘인구적 재무장’을 말한 것은 수사가 아니라 공포에 가깝다. 연금과 의료비는 이미 재정의 핵심이고, 베이비붐 세대가 80대로 진입하면 지출 곡선은 더 가팔라진다. 이민으로 노동력을 메우는 방식은 작동해 왔으나, 통합 실패의 정치적 대가는 누적됐다. 교외(banlieue)의 분리, 반복되는 폭동, 치안과 정체성 논쟁은 극우의 가장 강한 연료다. 국민연합은 이민 제한과 정년 62세(일부 60세) 회귀를 동시에 약속한다. 경제학적으로는 모순이다. 노동력을 줄이면서 연금 수급은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일관된다. ‘우리 돈을 우리 노인에게’라는 감정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내부를 무너뜨린 결함: 하나의 통화, 스물일곱 개의 재정, 그리고 거리의 거부권
유로화는 독일에는 평가절하된 수출 엔진이었고, 남유럽에는 환율 조정 수단을 빼앗은 족쇄였다. 그 구조는 여전하다. 위기가 오면 북유럽은 규율을, 남유럽과 프랑스는 연대를 요구한다. 프랑스는 독일만큼 수출 기계가 아니면서도, 이탈리아만큼 시장에 내몰리지 않을 만큼 크다. 그래서 개혁은 늘 ‘조금만, 나중에’가 된다. 균형재정 강박과 시위 정치가 동시에 작동하는 나라에서, 인프라와 미래기술 투자는 만성적으로 밀린다.
2024년 이후 프랑스 정치는 이 결함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총선으로 의회가 분점되고, 예산안을 둘러싼 총리가 잇달아 교체됐다. 2026년 여름 채권시장은 프랑스-독일 국채 스프레드를 다시 벌렸고, 신용평가사들은 적자 경로를 상향 수정했다. 2027년 대선 시나리오 중 유력한 것은 르펜(또는 바르델라) 대 멜랑숑의 결선이다. 한쪽은 이민 통제와 복지 방어, 다른 한쪽은 부채의 일부 소각과 재정지출 확대를 말한다. 시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둘 다 현재의 재정 제약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유럽의 기술 실패는 여기서 정치 실패와 만난다. 규제로 성벽을 높이 쌓았으나, 그 안의 혁신은 빠져나갔다. 재생에너지 전환은 도덕적으로는 앞서 갔으나, 공급망은 중국에 내줬다. 디지털에서는 미국 플랫폼의 식민지가 되었고, 안보에서는 미국의 정보·미사일방어·전략자산에 의존한다. 전략적 자율성을 말하면서도, 그 자율성을 살 재정을 만들지 못한 것이 2020년대 유럽의 초상이다.
몰락이 그리는 미래,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
유럽의 쇠퇴는 ‘대륙의 몰락’을 넘어 전후 자유주의 질서의 한 축이 빠지는 사건이다. 전후 유럽은 미국의 안보, 세계화의 시장, 내부의 복지국가가 삼각형을 이루며 작동했다. 그 삼각형이 동시에 흔들린다.
첫째, 안보 면에서 유럽은 ‘규범 권력’에서 ‘군사 주권의 재건’으로 전환 중이다. 그러나 전환 속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폴란드와 발트 3국은 GDP의 4~5%를 방위에 쏟고, 독일은 재무장에 나섰으며, 프랑스는 핵과 외교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되 재정의 벽에 막혀 있다. 미국의 안보 공약이 거래 조건으로 바뀌는 세계에서, 유럽은 단일한 전략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각국이 제각각의 속도로 재무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위기가 에너지·물류·인플레이션을 다시 흔들 때마다, 유럽의 내부 균열은 커진다.
둘째, 경제 면에서 세계는 효율의 세계화에서 안보의 블록화로 이동한다. 중국의 과잉생산과 미국의 산업정책은 유럽을 양쪽에서 압박한다. 유럽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갈래다. 보호주의로 기존 산업을 지키는 길, 미국·아시아와 동맹형 공급망에 편입되는 길, 그리고 내부 시장을 완성하고 공동 재정·공동 산업정책으로 ‘하나의 유럽’을 만드는 길. 현실에서는 세 길이 뒤섞여 표류한다. 공동 차입과 공동 방위 산업은 진전되지만, 프랑스의 재정 위기와 독일의 산업 위기, 동유럽의 안보 위기는 속도를 맞추지 못한다.
셋째, 정치 면에서 유럽은 중도의 붕괴를 겪고 있다. 극우의 ‘탈악마화’가 진행되고, 독일 동부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주 정부를 장악할 가능성이 처음으로 거론된다. 프랑스 대선은 그 흐름의 정점이다. 르펜 또는 바르델라의 승리는 브뤼셀의 예산·이민·공동외교를 흔들 것이고, 멜랑숑의 승리는 채권시장과 유로존 규칙을 시험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후 프랑스가 자임해 온 ‘유럽 건설의 엔진’ 역할은 약화된다. 유럽연합은 규범의 공동체에서 위기관리의 동맹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이 전환이 세계에 던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자유무역과 다자규범, 인권과 기후라는 유럽발 언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던 번영과 군사적 여유는 줄었다. 중동과 인도-태평양, 아프리카에서 유럽의 목소리는 미국의 거래와 중국의 자본, 러시아의 힘에 밀린다. 세계는 협력보다 각자도생을 선택하고, 유럽은 그 각자도생의 한복판에서 내부 합의조차 만들지 못하는 역설에 빠져 있다.
프랑스가 보여주는 것, 한국이 읽어야 할 것
프랑스는 유럽의 약점이 한곳에 모인 나라다. 높은 복지 기대, 강한 거리 정치, 분점 의회, 고령화, 이민 갈등, 그리고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국가적 자존심. 원전이라는 에너지 자산이 있었음에도 재정과 정치가 무너지면 성장은 멈춘다. 반대로 말하면, 기술 한 축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가 미래 비용을 현재에 배분할 정치적 능력을 잃으면, 외부 충격은 곧바로 체제의 위기가 된다.
한국은 유럽보다 더 가파른 경사 위에 있다. 에너지의 95%를 수입하고, 안보는 한미동맹에, 중간재와 시장은 중국에 깊이 연동돼 있다. 합계출산율 0.7명대는 프랑스 1.56보다 훨씬 심각하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라는 미래 인프라를 쥐고 있다는 점은 유럽과 다른 강점이다. 그러나 그 강점 역시 전력망·용수·인재·지정학이 받쳐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외부 변수에 노출된다.
유럽은 지난 70년의 평화와 복지에 안주하며 세 기둥이 동시에 흔들릴 가능성을 설계도에 넣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목격하는 것은 한 대륙의 경기 순환이 아니라, 전후 질서가 재배치되는 입구다. 프랑스 거리는 그 입구의 가장 시끄러운 표지판이다. 복지를 지키려는 시민과, 나라를 닫으려는 유권자와, 숫자를 맞추려는 재무부와, 표를 계산하는 대선 주자들이 같은 시간대에 충돌한다. 그 충돌의 결말이 유럽의 내일을 규정하고, 그 내일이 한국이 서 있는 세계의 기후를 바꿀 것이다. 뼈를 깎는 변화는 구호가 아니라, 외부 기둥이 무너지기 전에 내부의 분배 규칙을 다시 쓰는 일이다. 그 일을 미룬 나라의 오늘이, 프랑스를 통해 선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