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제조업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독일과 일본을 한꺼번에 제친 것은, 숫자의 기록을 넘어 한국 경제의 체질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수록된 IMF 주요국 통계에 따르면 2026년 2분기 한국의 경상흑자는 1,166억 3천만 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독일 522억 8천만 달러와 일본 506억 2천만 달러를 합쳐도 1,028억 9천만 달러에 그쳐, 한국이 137억 4천만 달러 앞섰다. 세 나라의 통계가 모두 확인되는 1996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주요 36개국 가운데 중국에 이어 2위다. 상반기 누적으로도 1,910억 1천만 달러로 역시 2위를 지켰고, 7~8월 두 달간에도 881억 9천만 달러로 독일·일본 합계를 웃돌았다. IMF는 올해 연간 흑자를 4,219억 달러 안팎으로 전망하며, 증가 폭은 190개국 중 가장 클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은행 역시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당초 예상한 4,500억 달러를 웃도는 수준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이적인 흑자의 원동력은 반도체 수출이다. 올해 2분기 반도체 수출은 1,138억 9천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81.6% 급증했고, 3분기에는 1,480억 2천만 달러로 218.7% 늘었다. 물량보다 가격 상승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로 메모리 수요가 폭발하면서 같은 물량을 팔아도 수출액이 크게 불어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9월까지 누적 전체 수출의 40%를 훌쩍 넘는 비중이 반도체에서 나왔을 정도로, 한국 경제의 대외 흑자는 이제 사실상 반도체 사이클에 깊게 연동되어 있다. 과거 중후장대 산업이나 석유화학, 자동차 등 여러 품목이 고르게 기여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흑자의 질적 성격이 크게 달라진 셈이다.
그런데 나라가 이처럼 돈을 잘 벌고 있는데도 주식시장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코스피는 사상 최고 종가인 9,114.55에서 10월 23일 5,550.30까지 39% 넘게 하락했다. 경상흑자와 주가가 매일 같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흑자는 결국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이고 그것이 기업 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방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자료를 기준으로 10월 하순 코스피의 12개월 선행 PER은 4.41배에 불과했다. 2008년 금융위기나 2020년 코로나 충격 때의 7~8배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흥미로운 점은 반도체를 제외하고 계산하면 PER이 10.3배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20년 평균인 10.4배와 거의 같다. 즉, 반도체 외 기업들은 이익 수준에 맞게 평가받고 있는 반면, 지수를 끌어내린 것은 PER이 3배에도 못 미치는 반도체 종목들이라는 뜻이다.
시장이 반도체 이익을 의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반도체 업종에는 “PER이 낮을 때가 오히려 이익의 정점일 수 있다”라는 오래된 경험이 있다. 이익이 크게 출렁이는 업종 특성상, 실적이 가장 좋을 때 주가가 상대적으로 싸 보이는 ‘PER의 함정’이 자주 나타난다. 2018년 SK하이닉스가 연간 영업이익 20조 8천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하며 PER이 4.6배까지 낮아졌지만, 이후 주가가 42% 하락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금 시장은 바로 그 패턴을 경계하고 있다. 현재의 반도체 호황이 AI 투자 열기에 힘입은 일시적 가격 효과라면, 이익이 정점을 찍은 뒤에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을 미리 가격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 확인 무대는 10월 28일 SK하이닉스와 29일 삼성전자의 3분기 실적 발표다. 이번 분기 숫자 자체보다 내년 이익 전망을 어떻게 제시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IMF도 이 흐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의 경상흑자가 내년과 2028년까지는 4천억 달러를 웃돌지만, 2029년에는 2,956억 달러, 2031년에는 1,775억 달러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흑자의 대부분이 수출 물량 증가보다는 반도체 가격 상승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AI 투자 속도가 둔화하거나, 미국 마이크론과 중국 창신메모리 같은 경쟁 업체들이 메모리 자체 조달 비중을 높이면 가격이 내려가고, 흑자도 그만큼 빠르게 줄어들 수 있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쏠림은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흑자가 커진 만큼 충격도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성과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들어 낸 흑자는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문가들은 올해와 내년을 미뤄 온 구조조정과 산업 다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흑자로 생긴 여력을 반도체 이후를 이끌 새로운 성장 동력에 투자하고, 수출에 비해 취약한 내수 산업을 육성해 경제의 안전판을 두텁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도 수출이 둔화할 때를 대비해 서비스업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투자 기반을 확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가계 입장에서도 호황 분위기에 기대 빚을 내 투자 규모를 키우는 것은 위험하다. 경기가 갑자기 식으면 가장 큰 충격을 받는 것은 레버리지를 쓴 투자이기 때문이다. 산업통상부가 매달 발표하는 수출입 동향에서 반도체 수출 증가율이 몇 달 연속 둔화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경기 전환의 신호를 포착하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한국 경제와 주식시장의 미래는 결국 이 반도체 의존 구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의 저평가는 시장이 미래의 불확실성을 가격에 선반영한 결과일 수 있다. 만약 3분기 실적과 내년 가이던스가 시장 우려를 불식하고 이익 지속성을 확인시켜 준다면, 과도하게 낮아진 반도체 밸류에이션은 반등의 동력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가격 효과가 약해지거나 경쟁이 격화된다는 신호가 나오면, 흑자 규모가 줄어드는 속도와 주가 조정의 폭이 동시에 커질 위험이 있다. 비반도체 기업들이 이미 적정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지수 전체의 상승이 반도체에만 의존하지 않고 분산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체 지수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반도체 이익의 방향이 코스피의 중기 방향을 좌우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결국 한국 경제는 지금 매우 특이한 국면에 서 있다. 대외적으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흑자를 기록하며 제조업 대국들을 앞질렀지만, 그 흑자의 대부분이 한 산업의 가격 사이클에 기대고 있다. 주식시장은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선반영하며 낮은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이 괴리가 일시적인 과잉 경계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선반영인지는 앞으로 몇 분기 동안의 반도체 실적과 글로벌 AI 투자 흐름이 결정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이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재투자하고, 산업 구조를 얼마나 다변화하느냐가 중장기 성장의 질을 가를 핵심 과제가 된다. 기록적인 흑자는 자랑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다음 사이클을 준비해야 할 시간을 벌어 준 기회이기도 하다. 그 기회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국 경제와 주식시장의 미래가 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