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달러패권은 미국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되, 미국인을 고르게 부유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밖에서 보면 패권의 위세지만 안에서 보면 갈라지는 사회다. 이것은 한두 정책의 실수라기보다 기축통화 지위가 만들어 내는 유인과 국내 정치가 맞물린 결과다. 그래서 고치기가 어렵다. 그 체제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달러패권은 오랜 기간 미국의 군사력을 값싸게 유지하는 데 기여해 왔고, 지금은 그 구조가 빚의 이자라는 다른 무게를 지기 시작했다. 이 글은 그 사실을 직시하되, 한 원인을 운명으로 키우지는 않으려 한다.
특권인가 제약인가
1960년 로버트 트리핀은 의회에서 기축통화국의 딜레마를 경고했다. 세계 무역이 늘려면 결제에 쓸 달러가 늘어야 하고, 달러가 세계로 나가려면 미국이 적자를 내야 한다. 그런데 적자가 쌓이면 신뢰가 흔들리고, 적자를 줄이면 세계는 결제 수단이 모자란다. 어느 쪽을 택해도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기축통화 지위를 흔히 특권이라 부른다. 돈을 찍어 물건을 살 수 있으니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트리핀이 지적한 대로 그것은 동시에 제약이다. 세계에 통화를 공급하는 나라는 자기 무역수지를 완전한 주권처럼 다루기 어렵다. 특권과 제약은 같은 지위의 앞뒷면이다.
제조업은 왜 줄었는가
달러 수요는 무역 때문만이 아니다. 각국 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로 달러를 쌓고, 투자자가 안전자산으로 달러 표시 채권을 산다. 그 수요는 달러를 구조적으로 비싸게 만드는 힘이 된다. 통화가 비싸면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은 떨어지고 수입품은 싸진다. 제조업에 불리한 바람이다. 다만 바람을 계절 전체로 읽어서는 안 된다. 전후 수십 년 미국은 같은 달러패권 아래서 세계 제조업의 중심이었다. 고용이 무너진 결정적 구간은 2000년대 초 이후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과 수입 침투, 자동화와 생산성 변화, 상대 임금, 기업의 입지 선택이 겹쳤다.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달러 고평가는 제조업을 약하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지, 유일한 근본 원인이 아니다.” 기축통화가 된 순간부터 공장이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은 복잡한 인과를 기원 이야기로 바꾸는 일이다. 공장이 줄어든 자리를 금융이 채운 것은 맞다. 세계의 돈이 달러 자산으로 몰리며 주식과 부동산과 채권의 값이 올랐고, 그 이익은 자산을 가진 쪽에 더 많이 갔다. 러스트벨트의 쇠락과 월가의 번영을 한쪽이 다른 쪽에게서 빼앗은 일로만 읽기보다, “한 체제 안에서 부문마다 다른 결과가 났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자기 돈을 찍는 나라가 왜 빌려 쓰는가
미국은 달러를 발행하는 나라다. 그런데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린다. 이상해 보이지만 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 화폐 발행은 연방준비제도가 하고, 재무부는 세금과 국채로 자금을 조달한다. 연준은 공개시장에서 이미 발행된 국채를 사며, 재무부로부터 직접 사는 길은 막혀 있다. 발권력을 정치에서 떼어놓겠다는 취지였고, 정부가 마음대로 돈을 찍어 초인플레이션으로 간 역사적 경험이 그 명분의 근거다. 대가는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40조 달러를 넘었고, 순이자 지출은 국방비와 교차하거나 앞지르는 구간이 이어져 연간 1조 달러 안팎에 이른다. 그 이자는 누구에게 가는가. 흔히 중국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다르다. 해외 보유분은 공중 보유 국채의 3분의 1이 채 안 되며, 일본과 영국이 중국보다 많다. 나머지의 큰 몫은 미국 안의 계정이다. 사회보장 신탁기금처럼 정부가 자기 자신에게 진 빚, 연준 보유분, 그리고 뮤추얼펀드와 연기금과 은행과 개인이다.
그러니 1조 달러가 고스란히 자산 상위층으로 흘러간다는 말은 지나치다. 이자의 일부는 회계상 이전이고, 연준의 이익은 상당 부분 국고로 환수되며, 일부는 중산층의 퇴직계정에도 들어간다. 그래도 남는 사실은 있다. 국채와 금융자산을 많이 가진 쪽이 이자와 자산가격 상승의 혜택을 더 받는다는 것. 발권의 이익이 곧바로 균등한 공공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 특권의 다른 얼굴은 그 불균등이다.
전쟁국가를 값싸게 유지해 온 것
국채는 여러 용도로 쓰였고, 그중 큰 몫이 군사비였다. 여기서 달러패권의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세계가 달러를 준비자산으로 쓰는 한, 미국은 다른 나라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적자를 비교적 낮은 금리로 굴릴 수 있다. 외국 중앙은행의 미 국채 매입이 국방 예산을 달러 대 달러로 대신 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입비용을 낮추고 재정의 숨통을 틔워 준 것은 맞다.
거꾸로도 성립한다. 달러가 기축통화로 남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군사력과 제재 능력, 그리고 해상 항로의 안전이다. 전쟁국가와 달러패권은 서로를 떠받쳐 온 짝이었다. 지금 그 짝에 금이 가고 있다는 신호는 있다. 이자가 국방비를 앞지른 것이 그 신호 가운데 하나다. 다만 이자가 더 커졌다고 해서 순환이 이미 멈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다른 나라보다 싸게 빌린다. 압박이 시작된 것과 구조가 붕괴한 것은 다른 문장이다.
이름이 바뀌고 있다
2025년 9월 미국은 국방부를 전쟁부로 부르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2026년 7월 하원은 국방수권법안에 개명 조항을 216 대 212로 넣었다. 1947년 이후 78년 만의 호칭 복원 시도다. 19세기까지 ‘전쟁성’은 흔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사라진 것은 부전조약과 유엔헌장 이후, 전쟁을 국가정책의 정당한 도구에서 밀어낸 언어 질서 안에서였다. 미국의 국방부도 1947년 국가안보법의 산물이다. 그러니 이번 되돌림을 단순한 복고로만 볼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을 힘이 줄어 위장을 벗은 증거로만 읽는 것도 한쪽으로 기운다. 같은 개명을 공세의 언어로 읽는 해석도 가능하고, 행정명령의 문안과는 그쪽이 더 가깝다. 아직 상원과 최종 법률이 남아 있기도 하다. 힘이 줄었는지 드러내려는 의지인지는 이름만으로 판결되지 않는다.
화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22년 미국과 서방은 러시아 중앙은행 외환보유고 약 3천억 달러를 동결했다. 제재의 정당성과 별개로, 세계의 중앙은행이 받은 교훈은 하나였다. 달러 표시 자산은 중립적 공공재만이 아니라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그전까지 달러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결제 수단의 외피를 쓰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 그 외피가 얇아졌다. 두 시점을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보이되, 완벽한 대칭은 아니다. 1944년 브레턴우즈와 1947년 국가안보법이 전후 질서의 두 기둥이라면, 2022년의 자산 동결은 ‘화폐 기둥의 무기성이 드러난 사건’이고 2025~26년의 전쟁부 호칭은 ‘군사 기둥의 언어가 바뀌는 과정’이다. 하나는 제재의 노골화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정치의 상징이다.
세계화냐 보호주의냐는 갈림길의 전부가 아니다
미국이 나아갈 길을 두고 세계화냐 보호주의냐를 묻는다. 둘 다 달러의 지위를 그대로 둔 채 무역의 문만 여닫는 선택일 수 있다. 문을 열어 두면 고평가된 달러는 제조업에 불리한 채로 남는다. 관세로 막으면 일부 수입은 줄겠지만 환율과 보복과 물가가 그 효과를 깎아먹는다. 어느 쪽이든 원인 가운데 하나는 남는다. 그래서 처방이 기대만큼 듣지 않고, 듣지 않으니 불만은 커진다.
다만 ‘달러 지위를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정책도 무의미하다’는 말 또한 과장이다. 산업정책과 환율 협력과 조세와 주거와 교육은 지위를 바꾸지 않고도 분배와 입지를 바꿀 수 있다. 문제는 그 정책들이 달러 요인을 지워 버리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만능과 무력 사이에 공간이 있다.
왜 불만은 엉뚱한 곳으로 가는가
가장 어려운 대목은 따로 있다. 손해를 본 쪽은 분명히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 제조업 지역, 집을 사기 어려워진 청년층, 자산을 갖지 못한 임차 가구. 그런데 이들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손해를 봤는지 한 단어로 말하기 어렵다. 원인이 여럿이고, 그중 통화의 지위는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이익을 본 쪽은 자기 이해를 더 정확히 조직한다. 금융 부문은 대변자가 있다. 그러니 구조를 바꾸자는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는다.
불만은 이민자에게, 무역 상대국에게, 눈앞의 정치인에게 간다. 그러는 동안 격차는 남고 원인에 대한 언어는 짧아진다. 달러패권이 미국을 망친다고 말하려면 이 지점에서여야 한다. 국민계정을 거덜 내서가 아니라, 이익과 손실을 한 사회 안에 나누어 놓고 그 나눔의 이유를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라를 부유하게 한 장치와 사회를 가른 장치는 같은 장치일 수 있다.
미국이 잊은 것
1886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헨리 조지는 연합노동당 후보로 2위를 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앞질렀다. 토지개혁론자가 그만한 지지를 얻은 것은 당시 노동자들이 궁핍의 한 원인을 지대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조지가 한 일은 새 이론을 발명한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던 구조에 이름을 붙여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해지는 이유가 게으름만이 아니라 땅값의 상승에도 있다는 것. 그 이름을 얻자 사람들은 자기 처지를 설명할 언어를 가졌다.
139년 뒤인 2025년, 같은 도시에서 조란 맘다니가 시장에 당선되었다. 공약의 중심은 주거만이 아니라 버스 요금과 보육과 생활비 전반이었다. ‘누가 지대를 거두고 누가 지불을 하는가’ 조지가 던진 이 물음이 그 도시를 떠난 적은 없었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도 그런 이름 붙이기일 것이다. 관세와 이민 규제만으로 끝나지 않는 셈, 특권의 이익과 비용을 누가 졌는지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바깥의 훈수가 아니라 미국 시민 자신의 정치여야 한다. 1970년대 처치위원회가 정보기관을 미국 스스로 들여다보고 의회 감독을 세웠던 자기교정 능력은, 미국이 존경받던 이유의 한 실체였다. 매듭을 묶은 자가 풀 수 있다. 풀지 않으면 남이 자른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 토지에서 나오는 값의 상당 부분은 소유자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만든 것이니 그 일부를 모두에게 돌려야 한다는 생각. 이 사상은 미국에서 나왔다. 토머스 페인은 1797년 『토지의 정의』에서 토지의 가치를 공동의 것으로 보고 국민기금을 만들자고 했다.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자선이 아니라 권리로서. 헨리 조지가 그것을 체계로 세웠고, 19세기 말 『진보와 빈곤』은 미국에서 경이적인 판매를 기록한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흔적은 남아 있다. 펜실베이니아의 여러 도시는 건물보다 토지에 높은 세율을 매기는 재산세를 운용했거나 운용한다. 피츠버그는 20세기 대부분을 그 제도로 살았다. 알래스카는 석유 지대를 기금으로 적립해 주민에게 배당하며,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그 제도는 액수를 줄이려는 시도가 나올 때마다 저항에 부딪혔다. 미국에 낯선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잊은 것을 상기시키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만 이런 것은 아니다. 중국은 토지사용권을 일시금으로 팔아 지방재정을 꾸렸고, 그 거품이 꺼지자 설비 투자로 버텼다. 한국은 은행이 땅값을 담보로 신용을 만들어 내는 구조에 깊이 들어가 있다. 일본은 부동산 거품이 꺼진 뒤 담보의 중심을 땅에서 국채로 옮겼다. 세부는 다르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격을 오늘의 담보로 삼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미국은 그 구조의 가장 큰 판본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미국을 향한 단죄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달러패권이 미국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를 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화폐와 토지와 부채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를 묻는 일’로 이어진다.
미국 시민이 기로에 서 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기로를 예정된 몰락으로 부르지는 말자. 이름이 정확해야 정치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