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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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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新聞(한일합방 직전 1910년 1월 1일 창간되어 일진회 기관지처럼 운영되다가 휴간, 3.1 운동 직후 매일신보에 3.1운동 비난 글을 연재하면서 동아일보와 같은 날 재창간)의 세 신문사 탄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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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7월 24일 간도의 무장 배일단(排日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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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08
  • 3.1 운동 후 창간된 조선, 동아, 시사 신문은 식민 통치에 협력하며 민족 의식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는 한국 언론사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명분 아래 언론을 활용하여 항일 세력을 '불령선인'으로 낙인찍고 민족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며, 교묘하게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 동아일보 기사는 간도 항일 무장 세력을 중국의 양해를 얻어 진압하겠다는 일본의 의도를 담고 있으며, 이는 국제 정세를 무시하고 조선 민족의 자구책을 원천 봉쇄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 105인 사건을 통해 '불령'이라는 단어가 대중에 각인되었고, 이는 항일 세력을 부랑자로 취급하며 공포 정치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식민사관은 고문을 정당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며, 과거의 왜곡된 역사를 직시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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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사지만, 의미는 지대하다. 전 조선인의 운명을 목하, ‘죽음과도 같은 정신병’의 세상으로 던져준 백 년 전 기사라고 생각된다.
 
1919년 3월 1일(음력 1월 29일), 기미 만세 운동의 파급력은 이듬해 朝鮮日報(1920년 3월 5일 창간), 東亞日報(1920년 4월 1일 창간), 時事新聞(한일합방 직전 1910년 1월 1일 창간되어 일진회 기관지처럼 운영되다가 휴간, 3.1 운동 직후 매일신보에 3.1운동 비난 글을 연재하면서 동아일보와 같은 날 재창간)의 세 신문사 탄생을 낳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따로 있었지만, 동아일보도 매일신보 인쇄기를 통해 세상으로 나왔으니 한통속이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기치는 ‘新文明 進步主義’, 전통 신분의 해체로 신분 급상승을 경험한 자들이 만든 ‘대정실업친목회’가 만든 신문이니, 대한민국에서 신문의 역사는 곧 매국의 역사다. 아직도 견고한 이 신문들은 역사를 희석하고 왜곡하는 중간중간 사실을 보도하기에 한국의 장래는 적당히 어둡다.
 
이러한 여론의 역사를 소위 ‘문화통치’로 해석하는 한국의 교육 또한 민족의 미래를 없이해온 자학과 자폭의 사관이 아닐지 자유로운 해석이 필요한 때다. 당시 신문의 존재와 역할은 총독부의 유화적 제스처가 아니라, 무력동원으로는 수그러들지 않는 조선 민족의 자존감을 당시 현대 여론전으로 소모하기 시작한 것이니, 조선 민족의 자구책은 이로써 원천 차단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즉, 3.1 운동 후 바뀐 총독부의 문화통치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문명적으로 대접을 주고받고 해서 일제 식민지라도 인간답게 살 만 해졌다는 인식의 오류를 제공하며, 내부적으로는 민족 말살 정책이 확고하고 착실하게 펼쳐진 시기의 도래를 알린다고 보인다.
 
기사는 단 한 줄, ‘간도의 무장 배일단(排日團)의 존재는 중국의 양해를 얻어 출병해 진압하기 전에는 그들의 근거지 말살이 어렵다’라는 내용인데, 간도 총영사 사카이 요사키치(堺與三吉, 1873~1931)가 한 말을 동아일보 경성지국이 신문에 실었고, 아래 한글도 동일한 취지의 내용을 설명했다. 요컨대, 무장한 항일 단체를 중국, 당시 중화민국-신해혁명으로 淸이 멸망하고 중국공산당이 선포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에 확고부동한 정부가 부재한 사실을 짐짓 모른 체하며, ‘중국의 양해를 얻어’ 조선인을 소탕하겠다는 다분히 작위적으로 무주공산 중국의 도움을 얻겠다고 허언을 남발한다. 대중이 상상하는 중국과 실제의 중국은 달랐고, 그 일부에서 요리하고 주인 행세를 했던 것은 일본이었다.
 
아마도 당시 이 신문을 사보는 대중은 이미 충분히 간도의 배일 무장 세력을 불령 선인(不逞鮮人)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내 집과 내 처자식을 뺏긴 조선인을, ‘원한 품는 인간’으로 정의한 일본이 이 불령(不逞)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1912년 2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미수 사건(105인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공포 정치와 항거할 수 없는 총독부 시스템의 위력을 대중에 선보였고, 대중을 향한 이 ‘불령(不逞)’이라는 단어가 이미 꽤 오래 각인된 의미심장한 용어로 사용되며 1920년 간도의 항일 세력을 부랑자 취급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인다.
 
105인 사건은 1911년 항일 정신이 투철했던 서북 지역에서 조선 총독부에 방해되는 독립군 양성 계획을 발각해 수사하면서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 암살 음모를 엮어 서북지방(평안도 황해도) 신민회를 타도한 사건이다. 일찍부터 서학이 유입된 서북 지역에서 기독교 교육과 민족 교육이 동시에 성장한 지식인 사회가 백인 선교 활동의 애초 목적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의 뒤에 있는 서양 세력이 이 사건을 어떻게 지켜봤는지는 재검의 여지가 있다. 105인 사건의 사진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아들의 컬렉션이다. 마펫은 1889년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0년 조선에 도착했는데 초기에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893년 평양으로 옮겨 북부지역 선교에 집중했다. 마펫의 신학교는 17년간이나 이어졌으며 현 숭실대의 전신이 되었지만, 모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식민지주의 역사관과 식민지 언론이 존재했던 이유를 대중은 깨달을 수 있을까. 오로지 마펫 한 명만은 서양 神을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민족 운동 세력으로 커진 서북 지역의 ‘깨인 자들’이 일제에 제거당하는 걸 살아서 지켜본 증인이다. 실제 있었던 사건은 희석되고 날조되어 허구로 취급받고, 저들의 입맛에 맞게 재편된 내러티브가 실제 역사로 인정받는 이상, 민족적 정신병은 치유될 길이 없는 상상 속 역사 게임이다.
 
데라우치 암살 날조 사건은 중형자만 105인으로, 총 검거자는 7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이 총독 암살을 자백한 것은 전적으로 고문 덕이었다. 고문은 한국 현대사에도 정권 유지를 위해 자행된 상투 수사기법인데 불고문, 물고문, 지지고 찌르기 등으로 105인이 죄를 자백했지만, 식민사관은 조선이 원래 고문, 암살이 쉬운 반인륜적인 형벌을 강조한 국가였음을 내세워 역사의 면죄부를 얻었다. 코에 걸린 코걸이와 귀에 걸린 귀걸이가 피를 흘리며 찢겨나갔어도 이제는 방법이 별로 없다. 얼굴이 애초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사람의 얼굴은 얼을 담고 있고, 그 얼은 역사다. 다 잃었으니, 뭘 생각하는 기능으로 남은 것은 무엇일까.
 
105인 사건으로 얻은 ‘불령(不逞)’이라는 오명 대신 대중은 항일 조직 붕괴 소식과 공포 정치 효과를 확실하게 얻었다. 서구 선교사들이 조선 민족의 자강을 가르쳤을 리는 없으니, 항일은 미국에 도움이 되는 방향은 아니었을 것이고, 총독을 암살한다는 가정은 미국과 일본, 양자에 도움 되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과거를 읽지 못하면 급가속으로 진행 중인 디스토피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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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105인 사건 체포 사진은 삼포삼열의 아들, ‘Moffett Korea Collection’에서
 
동아일보의 이 한 줄 기사로 그러저러한 음모론 역사를 좀 더 소환해보자. 불령(不逞)한 조선인 독자가 곧, 역적이고 배신자이며 부랑자이자 잠재적 범죄자라는 의미가 되니, 이 글을 실은 동아일보도 자국민을 그렇게 간주했다는 뜻이 되며, 조선인으로서 동아일보 기자인 자신들도, 편집장도, 사장도 ‘헬 조선’의 마중물을 자처했다는 의미가 된다. 내 집과 내 재산, 그리고 가문의 역사, 민족의 역사를 야금야금 파고 들어온 일본과 일본 뒤에 숨은 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들의 방식과 제도에 순응하게 된 민족, 그것이 이 1920년 7월 24일 기사에 표현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시야를 확장해 밖을 보자. 백 년 전에도 국제 정세에는 어두웠지만, 지금은 시야가 더 좁아진 한국인들에게 3.1 만세 시위는 게임 스토리만 한 가치는 남아 있을까. 이 시위의 시발점은 세계 1차 대전 종결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1919년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고 그 소식을 일찍 접하게 된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가장 먼저 세계사적 동향에 반응해 2.8 독립선언을 하며 그 영향으로 만주 등 국내 민중들의 3.1 만세 시위를 끌어내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도 3. 1운동도 그 여파라고 볼 수 있는 5.4 운동도, 실은 논외의 이야기다. 민족 자결에 해당하는 민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다.
 
러시아 혁명은 준비된 세력, 영국의 책동 결과요, 조선의 3.1 독립 요구도 애초에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끌 가능성을 차단했던 시위였다는 의미다. 이미 국제 사회에서 조선은 멸망을 기정사실로 한 자료들을 위해 서양인 호사가들이 방문하는 여행지였다. 이 부분은 음모론의 견지를 숨기지 않고 따로 다루어야 마땅하지만,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 ‘3.1운동’을 ‘삼점일 운동’ 으로 읽는 자식을 둔 부모의 부모는 자칭 애국 보수일 수 있다. 그들에게 기독교와 민족 수난은 어떤 의미일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인간의 문명은 어떻게 지속성을 유지해 왔는가. 거창한 제도와 행정이 이끌어 온 것처럼 보이는 것은 후대의 공작일 뿐, 실상은 강간과 고문이 바탕이 되고 검열된 글쟁이의 글이 쌓아 올린 가상의 역사다. 흔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상의 세계라고들 하면서 자신이 선 땅만은 아니길 바라는 이유는 비겁함이 아닐까. 간도 총영사 사카이는 술이 과해 일본에서 중경(重慶)으로 만주(滿洲)로 북경(北京)으로 다니며 술과 여자, 돈을 지나치게 소비했다. 그들에게 중국 땅은 조선 땅이요, 일본 땅이니, 노다지와 신천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신천지가 그 여기(餘氣)를 발하며 민족의 수치를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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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무장 배일단
중국 양해를 얻어 출병하기 전에는 소멸할 도리가 없다고
간도 사카이 총영사 담
 
간도에 있는 배일사상을 품은 조선 사람들은 작년부터 간도 북부 지방을 근거로 삼고 수만의 장정을 모집하여 조직적으로 병식 제조를 가르치며 무기는 러시아 과격파에서 정예한 것을 수입하여 그 근거가 자못 견고하여 현재와 같은 순사로는 도저히 제어할 능력이 없으니 하루라도 속히 중국 정부의 양해를 얻어가지고 군대의 출동을 빌지 않으면 결코 그 근저를 소멸할 수 없다고 사카이(堺) 일본 총영사는 말하더라. (경성지국)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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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益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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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의 이 짧은 기사는 단순한 치안 기사가 아니라 식민 권력이 조선인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봅니다. ‘배일단’이라는 표현 뒤에는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일본은 그들을 불령선인이라는 낙인으로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기록의 언어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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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_brother
6
특히 “중국의 양해를 얻어 군대의 출동을 빌지 않으면”이라는 문장이 섬뜩합니다. 타국 영토에서 조선인 무장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는 일본 총영사의 발언입니다. 식민지 지배가 국내 통치에 그치지 않고 만주와 중국까지 확장된 군사적 질서였음을 한 줄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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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댁
6
쉽게 지나칠 수 있는 1920년 7월 24일의 짧은 기사를 붙잡고 그 시대의 사람들과 권력, 언론과 역사의 관계를 되짚어 주신 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배워온 역사도 누가 기록하고 어떤 언어로 설명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기록을 오늘의 질문으로 되살려 주신 점이 참 뜻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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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o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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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법한 100년 전 신문기사 한 줄에서 당시의 권력과 언론, 항일세력의 흔적을 찾아내신 시선이 인상 깊습니다. 역사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었는가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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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_lee
4
‘불령’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매우 무서운 낙인이었습니다.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을 범죄자와 부랑자로 먼저 규정하면,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가 치안 유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특정 집단을 먼저 위험한 존재로 규정한 뒤 그에 맞춰 사실을 해석하는 언론의 습관이 없는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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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수
3
105인 사건에서 1920년 간도의 무장 항일세력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함께 보면, 3·1운동 이후의 ‘문화통치’를 단순히 식민지 지배가 부드러워진 시기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폭력만으로 억누르기 어려워진 민족적 저항을 언론과 제도, 여론의 영역에서 관리하려 했다는 측면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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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82
3
역사를 단순히 교과서의 사건과 연도로 기억하지 않고,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언어로 서로를 바라보았는지까지 살펴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불령’이라는 단어 하나가 식민 권력이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고 기억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귀한 자료와 문제의식을 함께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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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K
2
역사는 거창한 독립선언문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짧은 신문기사에도 숨어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순사로는 도저히 제어할 능력이 없다”는 일본 총영사의 말은 당시 항일세력이 결코 허구의 존재가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사건만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품었던 저항의 현실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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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ho7
1
100년 전 신문기사 한 줄을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당시의 시대상과 언론의 언어, 항일운동의 실체까지 연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눈으로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특히 ‘불령’이라는 단어에 담긴 권력의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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