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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ther Corea or Korea, 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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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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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1883.11.20. [제3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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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1. 02
Cap_XII_Regnantium_in_Chinis_Tartarorum_prosapia;_eorundem_in_Astronomia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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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상감 기록은 1883년 음력 10월 1일 일식 현상을 시헌력법에 따라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며, 당시 조선이 서양 천문학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줍니다.
  • 같은 날 임금의 명령으로 여러 관직에 대한 대규모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이는 개화기 조선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새로운 기구의 설립 및 운영에 대한 의지를 반영합니다.
  • 평안도 감사의 보고는 장기간의 가뭄, 우박, 이른 서리 등 기후 변화로 인한 흉년을 알리며, 당시 백성들의 삶이 자연재해에 크게 좌우되었음을 시사합니다.
  • 성균관 유생들이 동료의 억울한 구금에 항의하며 포도청을 습격, 옥문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준 사건은 당시 사회의 혼란상과 지식인층의 불만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 본문은 한성순보의 '최초'라는 위상 뒤에 가려진 외세의 영향과 대중의 적대감을 지적하며, 역사 서술에서 표면적 사실 너머의 복합적인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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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기사(內國紀事)
관상감 계문(觀象監啓)
음력 10월 1일 무신(戊申)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시헌력법(時憲曆法: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에서 개발된 태음태양력으로, 조선에서는 1653년부터 시행.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등이 주도하여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중국의 역법 체계에 적용, 24절기의 정확한 계산과 태양, 달의 운동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에 따른 일식분(日食分:일식 때 해가 이지러진 정도)은 8분 16초이며, 초휴(初虧:달이 태양을 가려 식(食)이 시작하는 순간)는 묘정(卯正) 2각 10분으로 서북쪽이며, 식심(食甚:일식이나 월식 때 해 또는 달이 제일 많이 가려진 때)는 묘정 3각 2분으로 정북쪽이고, 복원(復圓:일식이나 월식에서, 태양이나 달이 본래의 둥근 모양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은 진정(辰正) 초각(初刻) 3분으로 동북쪽입니다. 일식이 일어난 시간을 계산하면 총 9각 9분(약 2시간 14분)입니다. 식심 당시 수차(宿次:별자리에 있어서의 태양의 위치)는 황도 대화궁(大火宮) 7도 12분으로, 항수(亢宿) 4도 17분에 해당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유지공록(諭旨恭錄: 임금의 명령을 삼가 기록함)
같은 날 전교(傳敎)에 따라 내위문 독판(內衛門督辦) 김병시(金炳始)는 이용사(利用司)와 군무사(軍務司)를 겸관(兼管)하게 하고, 조정하(趙寧夏)는 농상사(農桑司), 정범조(鄭範朝)는 감공사(監工司), 김유연(金有淵)은 전선사(典選司)를 맡아 아울러 협판(協辦)으로 삼는다. 윤태준(尹泰駿)은 농상사(農桑司)와 군무사(軍務司)를 겸하고, 민종묵(閔種黙)과 구완식(具完植)은 농상사(農桑司), 김윤식(金允植)과 박정양(朴定陽)은 감공사(監工司), 한규직(韓圭稷)은 군무사(軍務司), 이조익(李喬翼)과 조준영(趙準永)은 이용사(利用司), 한장석(韓章錫)과 어윤중(魚允中)은 전선사(典選司)를 맡아 아울러 참의(參議)로 삼는다. 조동희(趙東熙)는 농상사(農桑司)와 군무사(軍務司), 신기선(申箕善)은 전선사(典選司)와 농상사(農桑司), 이중칠(李重七)은 감공사(監工司), 민응식(閔應植)은 농상사(農桑司)와 이용사(利用司), 왕석창(王錫鬯)은 농상사(農桑司)를 맡아 아울러 관할하도록 한다. 삼가 기록함.
 
평감농형장계(平監農形狀啓: 평안도 감사의 농형 장계)
같은 달 초 2일 감사(監司) 김영수(金永壽)가 치계(馳啓)하기를 “본도(本道)의 농사 상황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니, 가까운 산간 지역은 척박하고 일찍 추워지며, 평야 지역은 가물고 척박하며 바람이 많습니다. 비록 비가 적절히 내린다 하더라도 각종 곡식이 모두 잘 익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다행히 올봄에는 땅이 일찍 녹아 농사일을 빠짐없이 진행할 수 있었고, 또한 바람과 비가 때맞추어 내려 논농사와 밭농사 모두 풍년 조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름 이후로 가뭄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가을 초에는 바람과 우박이 갑자기 내렸으며,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날씨가 흐리고 추워져 서리가 일찍 내렸습니다. 전체 도내(道內)를 살펴보면, 농사가 결국 흉년을 면치 못하였으나 산간 지역이 해안 지역보다는 심한 편이고, 논농사가 밭농사보다는 다소 양호합니다.”라고 하였다.
 
주진대원(駐津大員: 주천진관원)
같은 달 초 4일 외아문(外衙門)에서 아뢰기를 “중국 주진 대원(駐津大員:중국 천진(天津)에 주재하며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관원)을 더 미룰 수 없으니, 이제 공조 참판(工曹參判) 김선근(金善根)을 뽑아 가까운 시일에 출발하게 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하교(下敎)하기를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경략사입경(經略使入京)
같은 날,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입경하였다.
 
의정부초기(議政府草記)
같은 달 6일 의정부가 초기(草記) 하기를 “지금 포도청(捕廳)에서 보고를 보건대 「성균관(成均館) 반인(泮人)들이 저희의 동료 한 사람이 애매하게 적초(賊招: 도적·역적의 진술)에 이름이 거론되어 현재 갇혀있다 하여, 수백 명의 무리를 모아 포도청에 돌입하여 옥문(獄門)을 때려 부수고는 저희 멋대로 그 적(賊)을 석방하고, 부장(部將)을 때려죽였사옵니다. 그 통에 갇혀있던 도둑 10명이 함께 없어졌으니, 이러한 변괴는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었으므로 소요를 일으킨 이명호(李命浩) 등 5명을 본청(本廳)에 가두었고 홍복동(洪卜同)과 원춘식(元春植)은 현재 도피 중이어서 체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사온데 설사 그 무리가 억울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공소(控訴)할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거침없이 공청(公廳))에 들어와 사람을 때려죽이고 갇힌 도둑들이 달아나게 한단 말이옵니까. 그들의 범죄행위를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바이오니, 지금 갇혀있는 놈들을 추조(秋曹, 刑曹])로 이송하여 엄히 다스려 실정을 파악한 후, 주모자 몇 놈을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梟首)하여 본을 보이고, 도피한 자들도 시한을 정하여 빨리 잡아들이게 해야 하겠사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의정부초기(議政府草記)
같은 날 의정부 초기에 “근일 들어 도둑이 발생하는 환란이 곳곳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전(畿甸: the capital region) 지역에서도 밝은 불을 지르고 포(砲)를 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도처에서 겁탈과 노략을 일삼으므로 여행자(行旅)들이 길을 가지 못하고 공납(公納)도 지연되는 실정이오니, 바라옵건대, 안으로 포도청과 밖으로 각 진영(鎭營)에 엄명을 내리시와 포군(砲軍)을 동원하고 경순(警巡)을 특별 강화하여 끝까지 뿌리를 뽑도록 하고, 그중 힘을 다해 체포하는 자에겐 별도로 시상을 할 것이며, 만약 늑장을 부리는 자는 좌우의 포장(左右捕將: 포청 대장)이나 각 진(鎭)의 영장(營將: 으뜸 장수)을 엄중히 논죄(論罪)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의정부초기(議政府草記)
같은 날 의정부가 초기하기를 “지금 성균관에서 보고한 내용을 살펴본바, 「그 원인을 자세히 캐보았더니, 성균관 반인(泮人) 한 사람이 거리에서 기물을 벌여 놓으려 하였는데, 갑자기 포교(捕校)가 도둑으로 의심해 잡아갔으므로 그 반인의 일가붙이들이 그 소식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쫓아가서 잡혀간 자를 빼앗고 일제히 포청으로 달려가 호소를 하려던 순간, 포졸들이 달려들어 반인들을 때리는 바람에 그들은 노소(老少)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뿔뿔이 도망쳤고, 현방(懸房:푸줏간)을 부수어 막중한 어공(御供)을 장차 올리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합니다. 방금 포청의 논보(論報)로 인해 이미 복계(覆啓)한 바 있으나, 이제 성균관의 보고 내용이 또 이와 같으니, 생각건대 자세히 조사해서 사실이라면 잘못 잡아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나, 어찌 현방을 부수어 어공에 지장을 초래한 지경에 이르게 합니까? 애초에 뒤따라가 붙잡은 포교와 추후에 난동을 부린 포졸은 모두 형조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철저히 조사하고, 죄의 경중에 따라 법률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한성순보는 근대 최초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보면, 갑신정변으로 박문국(博文局)이 소실되며 흐지부지되었던 사실을 주목하지 않아 외세의 프로파간다를 반영한 역사가 묻힌 최초 신문에 불과할 수 있다. 오늘날 조선·중앙·동아일보가 반민족적 보도와 기득권 옹호로 굳어진 언론이어도 사람들이 몰려가 신문사에 불을 지르는 상황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박문국이 공격받았던 당시의 적대감과 사회적 위기감은 얼마나 격렬했던 것일까.
 
역으로, 한성순보가 근대 최초 신문이라는 거창한 위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방화벽을 공고히 한 것과 마찬가지니, 과거 식민지 지배로 국권 피탈을 당할 때 적들은 얼마나 교묘한 자체 방어를 기획했을지, 당시 조선인, 현대 한국인 모두 상상이 가능한 유전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방화(放火) 자체가 그 신문의 성격이나 책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나, 그 파괴의 배경을 살피지 않은 채 ‘최초’라는 위상만 기리는 역사 서술, 문제가 심각하다. 애초 탄생의 목적을 상실한 채 그릇된 위상을 떠안고 있는 신문이 바로 한성순보로, 이 외 여타 수많은 종류의 서적과 간행물은 헤아릴 수도 없는 목적과 의도 아래 발행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필요하다.
 
144년 전인 1882년, 조선인에 책임이 있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은 임오군란 때 일본에서 페달로 밟는 근대 활판 인쇄기를 도입해 만든 이 한성순보는 창간에서 인쇄소인 박문국 화재와 재건에 이르기까지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 1859~1938)가 관여했다. 이노우에는 갑신정변의 기획자로 알려진다. 관보와 내외 시사에 중점을 둔 한문 신문은 독자를 한문 해독이 가능한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했지만, 우선은 그 기사 내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대중이 분노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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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上角五郎
 
1883년 음력 10월 초하루(계미년 계해월 무신일)의 금환일식(金環日蝕) 현상은 한반도뿐 아니라, 한반도 밖 북반구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천문좌표다. 삼국사기 기록 중 개기일식 56건도 인도, 티벳, 러시아 아무르, 시베리아, 투바, 중국 신강성, 복건성 등에서 그 좌표를 찾을 수 있는데, 역사뿐 아니라 과학조차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증거지만, 이 문제를 파고드는 기관은 없다. 한국인이 한반도 안에서만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했다는 문명론이 아니면 안 되는 역사는 한국인뿐 아니라, 전 인류가 공동으로 하향 평준화한 역사를 초래했다(Crime doesn’t pay).
 
일식이 관측된 초하루, 유지공록(諭旨恭錄)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의 인사가 있었다.

 
 
 
 
1
김병시 金炳始
1832~1898
부친 金應根
2
조영하 趙寧夏(趙甯夏)
1845~1884
생부 趙秉錫 → 양부 趙秉虁에게 입양
3
정범조 鄭範朝
1833~1897
조부 鄭元容 → 부친 鄭基世 → 정범조 → 아들 鄭寅昇
4
김유연 金有淵
1819~1887
조부 金載玉 생부 金鍈. 양부 金鑅
5
윤태준 尹泰駿
1839~1884
생부 尹泰冕→ 양자 尹禹植
6
김윤식 金允植
1835~1922
부친 金益泰, 모친 전주 이씨
7
박정양 朴定陽
1841~1905
부친 朴齊近
8
한규직 韓圭稷
1845~1884
부친 韓承烈
9
이교익 李喬翼
생몰년 미확인
직계 미확인
10
조준영 趙準永
1833~1886
직계 미확인
11
한장석 韓章錫
1832~1894
부친 韓弼敎
12
어윤중 魚允中
1848~1896
부친 魚若愚
13
조동희 趙同熙
1856~1934
친조부 趙斗淳 → 생부 趙秉燮. 양부 趙秉集, 양자 趙重獻
14
신기선 申箕善
1851~1909
부친 申羲朝
15
이중칠 李重七
생몰년 미확인
방목 소개 자료에 부친 李容進으로 기재. 방목 원본 확인 필요
16
민응식 閔應植
1844~?
생부 閔泳愚 → 양부 閔漢俊에게 입양
17
왕석창 王錫鬯
생몰년 미확인
청나라 출신. 직계 미확인

 
이 중 마지막 인사, 왕석창(王錫鬯, 1857?~1921? 생몰년 불확실하고 자료 사진이 없음)은 청나라 사람으로 임오군란 진압 때 들어온 오장경(吳長慶, 1834~1884)의 부하로 입국해 군국아문 참의로 활동했는데, 1883년 당오전과 화폐 유통의 폐단, 연좌제 폐지 등을 상소하며 이름이 남았다. 근대 청의 영향력이 커진 시기 조선 행정에 참여한 중국인 고문 성격의 인물로 갑신정변 후에도 왕실, 내정에 간섭한 정황이 있으나, 임오군란, 갑신정변의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한 현재로서는 그 전모를 다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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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長慶
 
왕석창이 임명된 농상사(農桑司)는 농업과 양잠 부서인데 현재 한반도는 양잠을 산업으로 하기에는 춥다. 박정희 때까지 근대 산업인 화문석, 양잠 등을 ‘재현’했던 정책이 어느 세월에 사라졌다는 사실도 역사 이해를 위해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농상사(農桑司)는 농상사(農商司)라고도 표기했는데 1884년 갑신정변으로 폐지된다. 청나라 사람이 화폐 개혁에서 연좌제, 양잠에까지 관여했던 시대, 궁궐 내 양잠 시설, 서울 잠실, 잠원동, 성북동 선잠단까지 모두 현대 지정학에서 동일한 공간이었다는 논리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이 의미가 다르듯, 같은 역사가 같은 공간에서 일어났는지, 다른 공간에서 발생했는지 구분하는 안목도 필요하다.
 
같은 날, 초하루 전선사(典選司)에 임명된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이 나흘 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 입경한 기사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윤중의 사망은 묫자리 분쟁으로 역사는 본다. 망국에 있어, 가담자도 책임자도 반역자도 기록되지 않고, 오로지 고종, 민비, 흥선 대원군만이 무대에 있으니, 빌어먹을 한국사를 식민사관으로만 익힌 사람들은 어떤 가치관으로 이 땅에 머무르고 있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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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中


음력 10월 6일, 거리에서 포(砲: 권총인지 대포인지 기관총인지 알 수 없음)를 쏘는 사태가 발생해 노략질과 방화, 도둑질을 일삼는 가운데 반인(泮人: 성균관 일대의 반촌(泮村)에 거주하던 청부 업자로 쇠고기 판매를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들)들이 포도청에 잡혀갈 만큼 어리석고 태평하게 장사하러 나왔을까. 민간인에게 총기류는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항일 운동이 시작되고 개인들이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흩어진 것은 본토를 외지인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한낱 장사꾼들 시비로 몰아 건 한성순보 기사, 오늘날 사법부 판결이 정상을 벗어난 이유가 이런 역사에서 기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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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이 주도한 양력은 일찍이 조선에서 시행되었다는데 한성순보 간행 때까지 왜 음력을 사용했는지, 어느 곳에서 양력을 사용한 기록이 있는지 궁금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국내로 돌아와 부친에 미움받아 독살당하며 그 일행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한 역사도 원인을 망국의 죄인에게 돌리는 패배 서사의 패턴이지만, 아담 샬에 보낸 소현세자의 한문 원문 편지도 남아 있지 않다. 누가 한문을 라틴어로 번역했는지, 라틴어는 왜 지금 사어(死語)가 되었는지, 그 시대를 숨긴 서유럽의 몰락은 아이러니다. 소현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알고 그에게 선물한 아담 샬의 책들도 원칙적으로는 라틴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책들이다. 원본이 있다면 공개하라. 해 아래 새것도 없지만, 거짓도 없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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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感滿足
8
한성순보를 근대 최초의 신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창간되었느냐보다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으며, 누구의 시각과 이해관계를 대변했느냐는 문제일 것입니다. 언론의 역사를 발행 연혁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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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bridman
6
역사는 왕과 권력자 몇 사람의 행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관직을 맡았던 사람들의 가계와 정치적 관계, 외국인 고문들의 활동까지 추적하다 보면 기존 역사 서술에서 놓친 부분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인물 하나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때로는 한 시대 전체를 다시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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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ho
6
왕석창, 어윤중, 김윤식 등 당시 관직에 임명된 인물들의 관계와 행적을 하나씩 추적한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역사책에서는 몇 줄로 정리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복잡한 국내외 관계와 권력의 이동 속에서 활동했습니다. 왕과 몇몇 중심인물만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당시 행정과 외교를 움직인 사람들의 실체를 복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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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4
일식 관측 기록과 서양 천문학, 청나라의 역법,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교류를 함께 다룬 대목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그 원인과 영향까지 한반도 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지식, 기술과 권력은 국경을 넘어 움직였습니다. 한국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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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77
4
정설이라고 배워 온 역사도 결국 누군가의 기록과 해석을 거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성순보의 창간을 근대 언론의 출발점으로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창간을 주도한 사람들과 당시 국제정세, 발행 목적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역사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기존 지식에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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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민
4
역사는 기록된 사실만큼이나 기록되지 않은 사실도 중요합니다. 박문국의 화재와 갑신정변을 단순한 사건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갈등과 외세의 이해관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의미 있습니다. 익숙하게 배운 역사일수록 원자료와 다른 관점에서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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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4
1883년의 한성순보와 오늘날의 언론을 연결해 살펴보는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신문은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시대의 권력관계와 정치적 이해가 투영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언론의 탄생과 성장 과정에 어떤 세력이 관여했는지 추적하는 작업은 오늘날 언론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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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jo
3
이번 글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역사적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식의 관측 좌표, 인물의 계보, 관직의 변동, 외국인의 조선 내 활동까지 서로 연결해 질문을 던진다는 점입니다. 다만 기존 역사 해석을 뒤집는 주장일수록 사료의 출처와 교차 검증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역사는 권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검증을 통해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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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
1
임오군란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의 정치와 행정에 미친 영향은 단순한 외교관계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언론과 인쇄기술의 도입 과정에 외국인이 깊숙이 관여했다면 그 배경과 목적도 역사적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외세의 영향력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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