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수많은 의병장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말이 쉽지, 지금 같으면 줄 서서 매국에 앞장설 세상에 꽃다운 나이, 조운식(趙雲植, 1873~1910, 향년 36세)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밀고로 붙잡혀 교수형 당했다.
일제 기간 한반도에서 수십 년에 걸쳐 러시아, 만주에서 제주까지 각각 똘똘 뭉쳤었고 세대가 바뀌면서도 항일 무장 의병장들이 활약을 그치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 죽고 승리한 전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역사로 남은 이유가 더 수상하다고 느껴야만 정상이다. 과거가 궁금하지 않도록 부정적 의식과 은폐로 가득한 서술의 자세는 나라를 위해 목숨 건 분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사실도 아니라고 본다.
무기 없고 자금 없고 밀정 많아서 패배와 비극의 아픈 역사로 남았다고 생각되는가. 그 치욕과 능욕의 과거를 캐는 작업보다 일루미나티가 조선 멸망에 암약한 역사를 찾는 게 더 빠르긴 하지만, 한 명의 의병이라도 더 알려야 그들의 죽음이 벌어진 장소가 한반도 밖이라는 걸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이 한반도 밖이면 안 되는 사람들이 현재 대한민국 삼권(three powers)에 포진해 있다. 사실, 입법·행정·사법이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기 위해 만든 서구를 위한 법 제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삼권 자체가 AI의 힘을 빌려 손 볼 날이 올 것이다. 이대로라면 현 인류 문명은 멸망한다. 과거의 잘못을 축소하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고 가해자는 피해자 행세가 일종의 특권이다 못해 사회 전반이 그런 생태계에 익숙해지고 있어 인간 개체 자체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세상이다.
조운식은 1873년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화북면(化北面) 돌치리(乭峙里)에서 태어났다. 상주는 전통적으로 학문이 발달한 지역으로,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곳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훈훈하고 상서로운 모든 것은 남아 있어도 사라지는 게 많았을 시대였다. 그가 보여준 의병 활동의 조직력과 리더십, 그리고 고유문(告諭文: 의병 활동 권고문으로 오늘날의 대자보, 격문(檄文)이 투쟁을 촉구한 선언서라면, 고유문은 훈계와 설득문) 작성 지시 능력 등을 고려할 때 상당한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각지의 의병장들과 연락하고 협력한 점으로 미루어 폭넓게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항일 투쟁 초기, 인맥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구두로 연락망을 짤 수 있는 훌륭한 메신저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는데 필요한 무기와 자금, 식량이 부족하고 전세가 불리해지고 쏟아지는 밀정이 날뛰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내부의 배신자는 가열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국가의 위기를 개인의 영달 찬스로 삼는 자들이 떼를 지어 일제의 권력에 아부하고 영합하는 세상으로 변해갔다. 그런 의미에서 조운식뿐 아니라, 모든 의병장은 배신을 자양분 삼아 출세하는 자들의 시대로 접어들기 전, 목숨으로 신념을 지켰던 마지막 선비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장가이자 행동가가 무기를 들고,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행동으로 선비정신을 실천했다. 그들의 항쟁이 식민지화를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침탈에 맞서 버틴 저항의 시간이 있어 이 정도 식민지 과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한국보다 수 세기 먼저 서구 열강의 지배 아래 놓였던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 식민지 착취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기억으로 삶의 가치가 결정지어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조운식의 본격적인 의병 활동은 1909년 시작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의 한국 지배가 노골화되고, 1907년 정미 조약으로 한국군이 해산된 직후로, 전국적으로 후기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이미 국권 피탈 이전에 많은 뜻있는 자들이 목숨을 던지며 항일 투지를 불태웠기에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항일 운동 2기라고 볼 수 있다.
조운식은 자신의 고향 주변인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접경 지역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의병 활동했다. 지리적으로 익숙한 곳에서 전투를 벌여야 승세가 있듯, 밀정들도 자신의 ‘나와바리’ 내에서 밀고하고 돈을 벌었다. 그런데 한반도 내 경북 충북 접경 지역만 험준한 곳은 아니다. 그곳에만 의병이 숨을 수 있는가. 소백산과 문경새재 일대가 험준하다고는 해도 겨우 높이 1,400여 미터의 소백산 정도다. 식민지는 착취와 날조다. 공포 정치 속에 도량형을 고치면 사람들의 인식이 그에 맞춰 줄어들기는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 물어야 한다. 과연 이 많은 의병장과 그들을 따라 죽음의 길을 택한 의병들이 한반도에 있었을까 말이다.
조운식은 1909년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의병장들인 한봉수(韓奉洙, 1883~1972 韓奉西, 韓奉瑞 라고도 썼음)·박황성(朴璜成)·이인만(李仁萬)·김용태(金龍泰) 등과 연락을 취하며 창의(倡義)를 준비하였다. 이들과의 연합은 단순한 지역적 연대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의 의병장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뭉친 것은 의병 활동이 지역을 초월한 전국적 저항운동으로 발전했음을 뜻한다. 그해 음력 7월경 조운식은 풍기군(豐基郡) 깊은 산속에서 한봉수, 박황성 등과 함께 정식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한봉수와 박황성이 양총 495정, 탄약 1천 발, 화승총 5정 등으로 무장한 약 50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상당한 규모의 의병부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의 한봉수 항목은 1908년 초 화승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20∼30명 규모의 부대로 설명하고 있어, 양총 495정의 확실한 숫자와 조달 경로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양총 수백 정은 적은 무기가 아닌데, 후에 알리바이 때문에 부풀려진 숫자인지 알 수 없다. 곤봉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했다고 이실직고하기는 인간적으로 면구했을 수도 있다.

한봉수 본인의 공덕비 참여 사진이라는데 저 표정을 잘 살펴보자. 참담함과 불편함이 가득한 표정은 과연 어떤 참상을 목격한 얼굴일까.
이들은 체계적인 조직 구성에 착수하여 우익장 한동해(韓東海), 좌익장 박한성(朴漢成), 호군장 이인우(李仁禹), 조련장 김용태(金龍泰, 생몰년 미상) 등의 지휘체계를 갖추었고, 조운식은 창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대략 8도의 의병장이 약 160여 명 정도이고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한반도 강역 외 연해주 만주 간도 등지의 의병장이 대략 16명이다. 그러나 6.25 사변 때 남북 양쪽의 주요 지휘관과 미국의 지휘관이 총 약 30명이다. 30명의 지휘관 아래에서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살상당했는데, 의병장 160명의 부하와 그들은 도운 민간인 등 총 몇 얼마나 죽임을 당했다고 계산할 것인가. 창의의 근거지를 잘 모르면서 그 규모와 전모를 아는 척하고, 해외에서 파견된 참전 용사들의 후손까지 찾아다니며 세금 쓰는 행위는 본질을 호도하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넌센스다. 차라리 고려인 후손들을 돕는 것이 지당하다.
당연한 일은 피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골라 벌이는 기관의 사업이 식민사관의 충실한 이행자들의 역할이라는 점 개선해야 한다. 정부도 쓸데없는 서훈만 남발해 사건의 진위를 헷갈리게 하는 식민사관 논조를 돕지 말고 그 예산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나한테 달라. 누가 진짜 항일 운동을 했었고, 누가 항일운동하는 척을 했는지 밝혀 식민지역사의 전모를 확대 재생산해보겠다.
창의 대장이 된 조운식은 무엇보다 의병 활동의 명분과 목적을 명확히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휘하의 정치옥(鄭致玉, 생몰년 미상)에게 창의의 취지를 설명하고 고유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 고유문은 ‘국체를 회복하여 황실을 튼튼하게 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본분’이라는 내용으로, 전통적인 충군 애국 사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튼튼한 황실이 아니라는 위기 상황이 풍기에도 전달된 것이지만, 그렇다면 궁궐 안팎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조운식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근대적 민족주의에 근거해 전통적인 충군 사상과 외세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에게 일제에 대한 저항은 단순한 외침 격퇴가 아니라 임금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는 도덕적 의무였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는 나라님 자리인 대통령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며 정치적 위신을 비난하기 일쑤이며, 신체적으로 암살하고 자살하도록 여러 분야에서 책동하고 있고 이 책동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속하고 있다. 반면에 지난 세기 초, 후손들이 나라님을 향해 침을 뱉을 줄 전혀 모르고 그들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쓴 고유문을 각처에 배부하며 의병 모집의 기본 문서로 활용했고 이를 통해 조운식의 의병부대는 1910년까지 충북 보은(報恩)·청산(靑山), 경북 상주 등지로 활동 범위를 확장하며 지속해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조운식이 이끈 의병부대의 활동은 크게 군자금 모집, 밀정 처단,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군자금 모집 활동은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1909년 음력 7월 9일 조운식은 충북 보은군 탄부면(炭釜面) 덕동(德洞)의 면장 이상락(李相洛)을 찾아가 10만 냥의 거액을 요구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과 10월에는 청주군 청천면(靑川面) 면장 진필오(陳必五), 산외이면(山外二面) 면장 홍모(洪某), 보은군 속리면(俗離面) 백현리(栢峴里) 심승복(沈承復) 등을 상대로 고유문을 보이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둘째, 친일 밀정에 대한 처단은 의병 활동에서 기초적이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내 안의 동족, 동료, 친인척, 자식 등이 곧 밀정이 된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1909년 음력 8월경 조운식은 경북 상주군 화북면(化北面) 용화리(龍化里) 조동(棗洞)에서 친일 밀정 정화춘(鄭化春)·김경모(金京模)를 처단하였다. 이는 의병 활동에서 정보 보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배신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음을 보여준다.
셋째, 일본 당국과의 직접적인 충돌도 빈번했다. 1909년 음력 9월 17일에는 충남 회덕군(懷德郡) 태전역(太田驛) 습격을 계획하였으나 인원 부족으로 실패하였고, 같은 달 19일에는 충북 청산군에서 김한기와 전홍기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충돌하여 전응유(全應有)·전경화(全敬化) 등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조운식의 의병활동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국제적 시야를 가지고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1909년 음력 10월 13일 그는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범진(李範晉)으로부터 중요한 제의를 받았다. 이범진은 ‘국내의 모든 의병이 러시아로 모여 병비를 정리한 후, 그해 3월을 기하여 일시에 항거하자’는 대규모 연합작전을 제안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제의를 받을 정도면 조운식은 상당한 전투 능력이 있던 분이었다. 이 제의는 당시 의병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전략적 구상이었고 국내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이 해외 기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저항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조운식은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봉서·박황성·이인만·김용태 등 부장 4명과 부하 350여 명을 무장시켜 이범진이 있는 러시아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조운식의 원대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9년 음력 10월 15일 그는 박치량(朴致良)·이자성(李子成)과 함께 충북 영동경찰서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는 그가 국내에 남아 추가 의병 모집활동을 벌이던 중 발생한 일로, 밀정의 정보 제공이나 일제의 집중적인 추적 수사의 결과로 추정된다. 체포 후 조운식은 1910년 2월 14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조운식은 이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4월 20일 조운식은 경성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36세의 나이였다.

1910년 조운식이 정치옥에 작성하게 했다는 일제의 판결문, 한일합방 이전 이미 일본의 수사가 얼마나 치밀했는지 이 판결문만으로도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기 불과 4개월 전의 일로, 그는 조선이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하고 순국했지만, 머지않아 망국이 올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다만, 백 년 후 후손들이 나라의 대표를 개 무시하는 이 현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들의 백 년 동안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민족이 분열한 상태는 한국인 유전자에 심각한 변형이 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토착 왜구가 뿌리내린 이 나라는 친일 반민족 유전자가 아니면 모두 암살하거나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은 모두 알려져 삼척동자도 다 아는 기만술이지만, 한국인들은 인간을 기만하는 인간의 속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순진함이 있다. 망할 만해서 망한 게 아니라, 망할 때까지 살상 무기를 제공하면 한국처럼 된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그 게임을 하는 나라가 있지만, 순진해질 때까지 기만하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는 돈에 눈이 멀어 나라님을 욕보이며 제 밑을 들어 남에게 보여주는 국민이 유권자로 이웃으로 살아간다. 인간이 얼마나 더럽고 추해지는지 보려면 남북한의 트루먼 쇼를 지켜보면 된다.
조운식의 의병 활동은 일제강점 초기 민족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이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국권 회복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비록 그의 계획은 실패해 조국 광복을 위한 그의 의지와 희생정신은 다음 세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계승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이라는 코미디로 퉁쳤다.
참고자료
이용철, <대한제국기 趙雲植의 의병투쟁 연구>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