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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ther Corea or Korea, 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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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류씨,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1841~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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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역사

칼럼
古韻書生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병장 류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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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8. 05
20여 년 전쯤에 상속받은 서울 명동 좁은 골목의 작고 낡은 적산 가옥을 헐다가 담벼락에서 나온 옛 물건들을 감정해달라고 들고 온 지인이 있었다. 지인의 부모는 명동 일대 영화판에서 일하던 분이었다고 들었는데, 일제 때 문서 수십 장과 일본도가 몇 개 있었다. 얼핏 근세 문서가 포함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확실치 않고, 진품인지 레프리카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급히 사진을 찍고 돌려주었는데, 그 후 컴퓨터가 고장 나면서 자료가 날아가 버렸다.
 
오늘 소개할 고흥 류씨,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1841~1915)은 바로 그 신기루처럼 사라진 역사, 일제의 침략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며 버티던 지방의 한 양반 유생이자 항일 의병장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가 살해당하자, 류인석은 전국의 유생들에게 의병을 촉구하는 격문을 띄워 1차 의병의 선봉에 섰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창의군(13道 倡義軍)’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어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29일 국권 피탈) 이틀 전, 연해주와 간도의 한족(韓族)을 모으고 이상설(李相卨, 1870~1917)과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해 국권 회복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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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8도에 의병환기를 촉구하는 류인석의 자필 격문(남아 있는 자필 문서들과 대조 필요)
본래 조선의 행정구역은 8도제였는데, 갑오개혁 때 전국을 23부·337군으로 개편해 약 1년여를 사용하다가 1896년 8월 다시 8도를 기반, 5개도를 남북으로 나눠 13도제로 바꾼다. 1895년 갑오개혁과 동시에 전국을 수백 개의 군으로 쪼개려면 이미 그 이전에 행정구역을 나누는 작업이 있었다는 것, 조선 8도 3천리 강역,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전부고 그것이 모두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류인석은 유생들에게 ‘處變三事, 擧義, 守義, 殉義(국가와 도의가 무너지는 변란에 처해 선비가 선택할 세 가지 행동 방책, 적과 싸우고 의리와 도통을 지키고, 마지막에 목숨을 바치는 것)’를 논의해 각자의 처지에 맞게 선택하기를 권했다. 을미사변에 단발령까지, 혼돈 속에서도 전국에서 의병 봉기가 한창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 제천(堤川)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여의치 않자, 정화용(鄭華鎔, 1878~1898)의 건의로 서북(西北)지역으로 근거를 이전했던 초기 항일의병의 선구자적 인물이지만, 제천에서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은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류인석이 살았던 강원도 춘천(春川)의 집과 의병이 지나가기만 하면 초토화된 일제의 만행 사진을 흐릿하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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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석이 살았던 춘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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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 지나가기만 해도 몰살당했던 민가
 
그러나, 이동했던 곳에서 활동을 제지당해 淸에 원병을 요청하고 러시아에도 구원병과 무기 구매를 원했으며 러일전쟁으로 힘이 빠진 일본을 공격하고자 했다고 알려진다. 류인석의 이러한 행적들은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도 공유했던 서면이 남아 있고 의병 기록인 <昭義新編>과 <毅菴集>을 남겼다. 의병 이력에서는 당시 이미 관찰사, 군수가 일제에 점령당해버린 상황 탓이었는지 지방의 매국노 관리들을 살해했고, 같은 의병이지만 뜻을 거역한 신분 낮은 자를 처형했다 하여 전통적 가치관인 신분제의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으로 이미 관찰사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류인석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는 평가는 무조건 신뢰하기 어렵다.
 
1910년 중화민국이 건국되는 걸 보고는 조선과 청, 일본의 동양 3국 연대를 모색하며 청과 일본을 금수(禽獸) 취급하던 인종론자의 고전적 화이관(華夷觀)에서 변화, 변용을 꾀한 양반으로, 중화주의냐 실리주의냐 선택의 기로에 있던 때 절충을 꾀했던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평이다. 그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기록이 자세히 전하지 않아 석연치 않은데 대외적 행동을 위주로 기록이 남은 평가도 의심을 살 만하다. 일제가 차지한 땅은 더는 우리가 알던 지명으로 불리지 않기 때문에 의병들이 산을 타고 만주로 옮겨가는 동안에도 행정구역은 계속 변했다는는 식민지 치하를 상상이라도 해볼 필요가 있다.
 
류인석은 1914년 요녕성(遼寧省) 관전현(寛甸県), 당시 봉천성(奉天省) 방취구(芳翠溝)라 명한 장소로 이동했다가, 1915년 그곳에서 74세로 병사했다. 2년 뒤 회인(懷仁), 지금은 환인(桓仁)으로 불리는 곳에서, 그를 따랐던 문인들이 각지에 흩어졌던 원고를 모아 비밀리에 목활자로 그의 호를 딴 의암집을 간행했다고도 하고, 1918년 류인석의 시문집 <毅庵集>을 제작하던 현장을 급습해 일제가 문서를 탈취해갔다고도 한다. 또는 완성된 간행물이 1919년 3.1운동 후 일부를 일제가 압수해 불살랐다고 전해지기도 하니 그 자세한 진위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2010년에는 독립기념관에서 류인석의 시문집인 의암집을 완역해 국역 양장본 5권 1질(5천여 페이지 분량)로 출간되었는데 남아 있는 류인석의 여러 필체와 대조가 필요하다. 그런데 2024년 여름, 1851년부터 1909년까지 류인석이 작성한 문건 13건이 국내에 들어왔다. 일본의 한 고미술상이 갖고 있던 자료를 복권기금으로 구입해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된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이들의 공문서와 편지, 최익현의 서신 등으로 구성된 이 문서들이 1918년 일제 헌병 경찰이었던 아쿠타가와 나가하루(芥川長治, 생몰년 미상, 본명 여부, 출신 알 수 없음)가 의암집 제작 현장을 급습해 문서를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만주 요녕성에서 간행 중이던 문서들을 빼앗겼다면, 2010년 간행 저본은 무엇으로 삼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아쿠타가와는 이 두루마리나 족자 주기(注記) 등에 위와 같은 강탈 과정을 써넣었다고(1939년) 하니, 이를 사실이라고 본다면 2010년의 국역 의암집은 처음 유고집 간행 전후인 1918년 또는 1919년에 1차로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39년에 아쿠타가와가 족자나 두루마기 형태로 배접해 둔 자료와 국역 의암집의 필체도 대조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전근대 모든 사료가 일제의 수거 계획에 따라 강제 약탈당하고 어떤 시점에 이본 또는 수정본이 되어 되돌아 나왔다는 필자의 가설을 이 의암집이 증명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일제가 원고에 손을 댔다는 가정 아래 류인석의 행적을 살펴보면 뜬구름 같은 그의 이력이 조금은 부연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류인석은 3세에 천자문, 6세에 십팔사략을 읽었다고 하니, 그 시절 천재들의 반열에 있음은 물론이고 스승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었다. 과거 조상들이 최소 3세에 문리가 트였다는 기록이 어떤 자료에서 흘러나온 소리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모든 사료는 일제가 한 번 검열을 거친 뒤에 나왔기 때문에, 그 시절 천재들의 학설이 온전히 그대로라고는 볼 수 없어 학문의 깊이는 물론이고, 내용 자체의 변형을 눈치챌 수 없는 형편이다. 이것은 한문을 모르는 현재 세대로서는 역사를 회고할 자격조차 없는 비극이지만, 백 년이 걸려도 다시 복기하는 심정으로 연구하는 길 만이 공동체의 미래와 후손들의 지정학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항로나 주변 유림은 시세보다 의리에 집착하는 화이론자였는데, 이항로 시대에 이미 중화사상이 외세에 흔들리던 시대상은 매우 이른 시기에 중화권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사실을 엿보게 한다. 청에 병사를 청원하는 류인석의 태도로 볼 때, 을미사변으로 의병이 일어나면서 국망의 현실 앞에, 비록 이적(夷敵이든 異敵이든)의 현실적 도움을 얻을 생각을 했다고 평가한다.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을 그 시절 지정학인 화이론은 중국 중심의 유교적 윤리와 문화를 가진 문명인과 주변의 이민족, 즉 야만인을 엄중히 구별 경계해 화(華: 문명)를 존중하고 이(夷: 야만)를 배척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이 사상은 종래 인종주의, 사대주의와 관련 지어 뭇 지식인들의 질타를 받은 이념이지만, 이 주장 역시 일제의 주장이다. 지금은 지식인이 없는 시대이니 마음껏 거론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그 시절 강요받은 역사를 가르치던 교수들은 다 어디에서 뭘 하나 궁금하다.
 
실제 청이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는 시점에도 이렇다 할 청의 자주적 정치는 눈에 띄지 않는다. 중화를 짜장면이 아니라, 고도의 수준 높은 정신문명의 본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현재 중공의 중화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중화 문명 사대주의 수 천 년이 아니라, 류인석의 시대까지도 그들이 중화 그 자체였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겠다.
 
일례로 당시 청의 통치는 2차 아편 전쟁(Opium Wars, 1840~1842)인 애로우 전쟁(Arrow Incident, 1856~1860) 이후, 북양대신(北洋大臣)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만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통상 기구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청은 1861년에, 조선에는 고종 때인 1880년에 3년간 존재했던 기관이다. 두 기관이 같은 이름인 것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기 때문이라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둔 식민사관에 의존한다면 역사를 배울 필요도 의문이 생길 일도 없다. 그런데 이 통리기무아문 설립에 관여한 자 중 한 명인 영국인 세무 관리원인 로버트 하트(Robert Hart, 1835~1911)은 40년간 중화권에서 세무 업무를 맡았었다. 아편은 마약이고, 애로우는 영국 해적 선박의 이름이다. 이런 시대에 세무관리가 참여해 만든 통리기무아문이 수천 년 중화권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적법한 통상 업무를 위한 기관이었다고 위계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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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Chinese Customs’ Hart as caricatured in <Vanity Fair> December 1894
(우) Robert Hart, GCMG
 
다음으로 청에 병사를 요청했다는 ‘청원(請援)’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수상하다. 강원도 춘천사람인 류인석이 갑오경장(1894~1896) 사이에 벌어진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에 분연히 일어나 원세개(袁世凱, 1859~1916)에 병력을 요청하려면 류인석의 지위가 상당해야 하는데 초기 의병장이라는 이유로 원세개에게 사람을 보낼 만한 여유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하물며 제천으로 가 활동하다가 서북지방으로 활동 연고지를 옮겨가는 과정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다. <朝鮮暴徒討伐誌, 1913> 말미에 등장하는 조선 국경 부근, 즉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항일세력의 지도자로 나오는 류인석은 어떻게 제천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가게 되면서 원세개와 접촉했다고 기록 또는 알리바이를 만든 것일까.
 
아마 일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정당성을 위해 한 명이라도 더 관련 서술에 등장하도록 하고, 또 거병에 필요한 자금이나 무기 관련 원조를 우회적으로 지원해 의병들을 모두 처단하는 방향으로 끌어냈다고 보인다. 현대전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전 역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전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무기상을 위한 전쟁은 상대에 무기를 잡아 줘야 싸움 가능하다는 사실,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조선 양반 의병장은 초기 어떻게 무기를 조달해 싸웠을까, 일단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다. 동학란 평정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이 시기 한성순보도 발간하지 않았지만, 일방적인 살육이었다고 예상되는 힌트는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대량 학살을 마치 구원병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 만들고, 실제로 군사나 무기를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매우 과장된 서술로 대등한 관계인양 설정하는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동시에 이 시기 의병들의 관념적 화이관의 충돌-청에 대한 청원과 청원 불가론-도 살펴봐야 한다. 청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을 금수로 여겼던 이들이 어떻게 원병 요청을 한다는 것일까. 이에 대한 노대환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청병 이유를 밝힌다.
 
‘대체로 예전에는 우리가 문명국인 중화였고 그들은 오랑캐였으므로, 오랑캐의 구분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다. 그런데 오늘날 청나라도 본래 오랑캐이지만, 일본과 서양세력은 오랑캐보다도 더 타락하여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금수의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오랑캐에게 힘을 빌려도 된다. (毅庵集 권24, 「呈同志諸公」(1897.9) 338-162a : 蓋彼時我華而彼夷 宜守其嚴防 今日淸固夷狄 而倭洋又夷狄之降爲禽獸者也 爲去禽獸之禍 則庶無不可藉力於夷狄也.’
 
지금 시각으로는 오랑캐, 즉 이(夷)에 대한 고정관념이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지만, 왜구(倭寇)과 양이(洋夷)는 하나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과 서양은 한 무리이므로 서양은 물론 일본에도 문호를 개방해서는 안 된다는 이 주장은 조선 후기 위정척사파(衞正斥邪派)들이 외국과 통상을 반대할 때 제기한 주장이다. 그 대표자는 바로 최익현, 류인석과 청병 등에 관해 서면을 주고받았다고 하지만,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사망하고 난 후, 그의 원고가 손을 타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외세에 가장 강력한 주장을 했던 양반 의병들이 갑자기 오랑캐 청과 군사 문제를 논한다는 억지스러운 전개는 시점을 호도하는 식민사관의 전형적인 기술 방식이다.
 
당시 노론 계를 주도하던 학자로 제자백가에서 천지음양귀신까지 두루 섭렵하던 홍필직(洪直弼, 1776~1852) 은, 화이(華夷)의 분수를 천하 만세의 큰 경계라고 구분했다. (‘夫華夷之分 天下萬世之大閑也.’ <梅山集> 권27 「경속(警俗」 ) 이토록 강한 화이 구분법은 우리가 중화였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지워버리고, 청이 이민족이고 이적이라고 간주하고 추상적인 중화주의로 해석을 바꿨다고 본다. 마치 빨갱이라는 단어가 일제를 상징하던 비하 표현에서 항일운동하는 민족주의자를 좌익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오늘날 여야 국회의원의 ‘맞불 주장’, 소위 역프레임(counter-frame)이다.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나쁜 의도로 먹고사는 동안, 엄한 국민만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위의 왜양일체론과 화이 구분은 일제가 관점을 흐리는 중요 기제 중의 하나이다. 왜구와 서양 해적과의 관계가 이 주장 안에 내포되어 있고 우리가 중화였다는 사실을 호도하는 전략적 서술이 개입했다고 본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국인 스스로 동이족(東夷族)이라 부르는 현상이 이미 대세지만, 우리가 동이족이면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은 설명이 쉬운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 동이여서 지당하다는 숙명론적 식민사관은 벗어남이 이 시기 세계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교적 질서로 세계가 돌아가던 구세계와 그 세계의 종말을 유도하던 세력과 싸움은 분명히 진행되었던 사건이지만, 이토록 깊이 박힌 문명 관념은 생물학적 인류학적 인간의 보편성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존재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홍직필은 이어서 과거 병자호란에 임한 자세, 존명반청(尊明反淸)에 대한 주장도 있지만, 의암록이 주장하는 반복되는 청에 대한 원군 요청 시기, 정작 원세개는 다른 일로 분주하던 시기여서, 류인석의 청원 주장을 액면가로 믿을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류인석 주변 관전현에서는 역사 교육 기관 배달의숙(倍達義塾)을 운영하면서 홍범도(1868~1943)·오동진(吳東振, 1889~?)의 자금 지원을 받아 계연수(桂延壽, ?~1920)가 <桓檀古記, 1911년>를 간행했다. 필자는 1911년 판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나, 우연한 기회에 1911년 판으로 추정되는 환단고기 책 표지를 본 적이 있다. 소장자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끝내 알려주지 않았지만, 분명 오래된 환단고기였다.
 
당시 만주 요녕성은 지금의 만주도 지금의 요녕성도 아니다. 훨씬 더 멀리 서쪽으로 가야 한다. 그 먼 곳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면서 문집을 간행한다는 게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인간으로 태어나 글을 쓰고 읽고 수십 년은 수련해야 과거 시험을 봤던 시절이 존재했기 때문인가. 기록의 민족이었으나, 기록물을 전부 빼앗겼다. 신원 불분명한 비밀경찰 아쿠타가와가 이런 구 문명인들의 원고를 뺏을 무렵, 1920년 8월 15일, 일제는 그 주변에서 조선인 밀정과 함께 계연수(桂延壽)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일본은 환단고기를 열심히 연구해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했으나, 우리는 스스로 감춘 역사책이다. 차라리 위서로 낙인찍을망정 역사 잃고 영토 잃은 사실을 감추려는 세력이나, 당시 류인석의 청 구원병 설을 가공한 세력이나 목적은 하나다. 조선인이 진짜 역사에 눈뜨지 못하게 하는 것….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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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ngbang
8
류인석이라는 인물을 단순한 위정척사 의병장이 아니라 사료와 기록의 문제까지 연결해서 바라본 점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의암집의 전승 과정과 일제의 문서 수거 문제는 실제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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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91
8
글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록을 누가 남겼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역사 해석은 결국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사료가 식민지 시기를 거쳤다면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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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ly
6
류인석의 청원병 요청 문제를 단순히 '친청'으로 해석하지 않고 당시 화이관과 현실 정치의 충돌 속에서 보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 말기 유림의 사고방식은 현대인의 기준으로만 재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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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海
6
이런 글이 좋은 이유는 결론보다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말기와 의병사의 서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남아 있는 원본 자료는 얼마나 되는지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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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bin
5
류인석을 둘러싼 기록의 공백과 단절을 따라가다 보니, 독립운동사는 인물사만이 아니라 기록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료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추적하는 작업 자체가 중요한 역사 연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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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
5
의암집의 간행과 압수, 이본 문제는 실제로 문헌학적으로도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친 문헌이라면 원본과 후대본의 차이를 따지는 작업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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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79
3
글을 읽으며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는 시기를 살았던 유림의 혼란이 조금은 이해되었습니다. 현실과 의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함께 봐야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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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志愛
2
모든 가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통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료를 다시 보자는 제안에는 공감합니다. 역사학은 의심에서 시작되고, 검증으로 완성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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