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충 관점의 요즘 전시
서울 광진구의 한 복합몰 갤러리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의 〈내일의 낙원 LEE GIHUN: After Everything〉은 미술계 일부, 해외 갤러리들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기훈 작가의 국내 첫 원화전이다. 젊은 청년 작가들이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개성 있는 회화 언어를 구사하며 세계 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어 뿌듯하다.
과거, 예술은 정치 권력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지배 이념을 미화하는 수단으로 동원된 문화의 시녀였다. 특히 한국은 더하다. 그 관행이 예술계의 온갖 비리와 가치 전도, 저질 예술을 초래했지만, 꿋꿋하게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있으니 반갑다. 해외에서 인정받으면 비로소 국내 시장에서 다시 돌아보는 현상, 해외에서는 외면하는데 한국인이 선호하면 전 세계로 다시 퍼지는 유행도 있다. 사람의 마음은 남의 관점에 경도되는 동조(同調, conformity)도, 상대 관점을 내 생각으로 수용하는 내면화(內面化, internalization)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모든 게 지나치면 비극이다.
유행은 그렇게 돌고 돌지만, 가면을 쓴 동물을 통해 미래 인간을 투영한 ‘가면 놀이’ 연작은 무서운 예언서라는 느낌, 예언서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호불호는 쉽게 말할 수 있어도 작품 가격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수준, 이기훈의 천재성이 제 대접을 다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국은 천재를 말살하는 사회 분위기를 오래 조성해온 나라다. 앞으로 숨은 고수들이 모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자신의 몸값을 제대로 쳐내는 세상을 희망해 본다.
작품 감상평
어두운 배경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림인가, 판화인가, 선명하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많은 붓 터치를 감내하다니, 믿기지 않는 노력, 고도의 집중과 표현에 애쓰는 젊은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붉은 형상과 대비되나, 서로 돋보이지 않는 배경색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시선을 붙잡았다. 그 형상들은 단순히 눈에 띄는 색채가 아니다. 주변의 어둡고 탁한 배경, 공장의 잔해, 전선, 흐린 하늘, 넘실거리는 파도, 눈 없는 눈동자 등과 대비되면서, 이미 사라진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서로 돕는다. 미래에 올 자들이 우산을 들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의 잔여물을 기다리는 모습은 그림 전시를 보며 눈물을 주르륵 떨구는 오랜만의 감동이었다.
수채화와 아크릴이 먼저 넓은 면을 깔고, 그 위에 오일파스텔이 겹겹이 쌓이면서 만들어내는 질감은 생각보다 훨씬 강렬했다. 오일파스텔의 부드럽고도 거친 선은 형태를 또렷이 고정하기보다, 형태가 흐트러지려는 순간에 다시 잡아두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손가락 끝의 압력과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한 표면은 디지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무게감이 붉은색과 만나면서 작품은 시각적 자극을 넘어 신체적으로 다가왔다. 아크릴이 평평하고 건조한 면을 만들어낼 때, 오일파스텔은 그 위에 촉각적인 층을 덧입혔다. 선이 겹치고, 면이 문질러지고, 때로는 거의 긁히듯 그어진 자국들이 쌓이면서, 화면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과 노동의 흔적이 남긴 물질로 변했다.
그 물질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보는’ 행위를 ‘만지는’ 행위에 가깝게 만들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일파스텔 입자들이 드러났고, 멀리서 보면 그 입자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응축되어 붉은 형상을 더욱 선명하게 밀어 올린다. 붉은 형상은 대부분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 혹은 동물과 인간이 뒤섞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물이 차오른 거리나 무너진 풍경 속을 걷고, 불을 들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가면은 얼굴을 가리지만, 동시에 그 가면을 쓴 존재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롭다. 아이들이 동물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은 괴이한 질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의 위장술처럼 느껴진다.
양과 토끼, 곰과 물고기, 토끼와 물고기가 뒤섞인 형상들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삼키고 삼켜진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 형상들이 물을 건너고, 불씨를 들고, 서로의 몸을 떠받치는 장면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 연민이 과연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서사가 작품 곳곳에 스며 있었지만, 그 방주는 구원의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물이 차오르는 풍경 속에서 아이들이 생명을 안고 걷는 모습은 희망으로 읽힐 수도 있었지만, 그 희망 자체가 이미 제도화되고 조작된 이야기라는 의심을 남긴다.
조지 오웰은 당대에 폄훼되었다
그 의심은 자연스럽게 조지 오웰을 떠올리게 했다. 오웰이 그린 세계는 감시와 통제, 언어의 왜곡을 통해 진실을 숨긴 사회였다. 그의 생전, 그리고 그 이전에 자행된 인류의 대학살을 비유와 은유의 언어로 풀어낼 수밖에 없던 시대가 이기훈의 작품 속에서 가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다시 작동하는 듯했다. 가면은 정체를 숨기지만, 동시에 가면 쓴 존재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를 확인, 서로를 감시하는 듯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너진 세계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지만, 그 나아감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내일의 낙원’이라는 제목은 그 불확실함 위에서 더욱 무겁게 들렸고, 아직 오지 않은 그 낙원을 향해 걷는 존재들은 오늘의 잔해 속에 서 있다.
작가의 어릴 적 시골에서 국립공원과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공존하던 풍경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이 같은 양가 시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인간의 개발이 남긴 상처가 동시에 존재하던 그 풍경을 작품 속에서 붉은 형상과 어두운 배경의 대비로 재탄생시킨 결집에 놀랐다. 그 대비의 응집은 단순한 색채 대비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의 모순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이기훈이 그 천재성을 작품 세계와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작가이길 희망한다. 재능에 자만하고 감언이설에 넘어가 재산을 탕진하고 허송세월한 전 세대 천재들처럼 삿된 한국인으로 남지 않기 바란다. 그 지독한 많은 붓 터치가 세상에 경종이 되고 창이 되어, 인간의 이기심을 관통하는 거울이 되기 바란다. 한국 사회는 많은 천재를 환영하고 그들을 기꺼이 즐길 사회가 되어야 한다. 시기와 질투로 폄훼하고 이간질하는 이념 꼰대를 마음껏 조소하게 해야 한다.
사회문제, 환경문제는 작품 속에서 직접 외치는 직설을 피했다. 대신 풍경의 배경으로, 형상의 움직임으로, 색의 대비로 스며든다. 공장의 연기가 자욱한 하늘, 전선이 교차하는 풍경, 물이 차오른 거리 속에서 아이들이 걷는 모습은 기후 위기와 산업 문명의 잔해를 동시에 환기한다. 그러나 그 환기는 비판의 언어로 고정되지 않았다. 오일파스텔의 거친 선과 아크릴의 평평한 면이 만들어내는 질감은, 관람자가 그 풍경을 ‘판단’하기보다 ‘감각’하게 만든다. 손가락 끝의 압력이 남긴 자국은 디지털 이미지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진짜’의 흔적이고, 그 흔적은 관람자에게도 자신의 신체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누구인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의식한 적 없는 것은 아닌가. 내일의 낙원이란 결국 오늘의 욕망이 만들어 낸 잔해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은 작품이 직접 던지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작품 앞에 서 있는 동안 스스로 떠올리게 되는 것들이다.
전시 공간을 나오면서도 그 붉은 형상들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기법의 신선함과 강렬함 뒤에 남은 잔상은 기법 뒤에 깔린 시선이다. 특이점을 넘어선 사회와 이념, 인간의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면을 통해 굴절되고, 다시 붉은색으로 응축되어 관람자 앞에 놓여 있다. 이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한 단면을 다시 보게 되는 경험, 가면 뒤에 숨은 얼굴들이 서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 시선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그 질문은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편리함과 고독을 동시에 주는 붉은 형상이 남긴 잔상 속 도시로 돌아오면서 한국인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외로운 편리함이 인간을 얼마나 슬프게 만드는지 생각했다. 옷깃을 여미게 되는 쌀쌀한 날씨에 가면이 살짝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