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발라드(이하 우발)>는 여러모로 주목받을 만한 기획이지만 오랜 기간 묻혀 있을 수밖에 없던 기획이기도 했다. 일단 트로트 관련 기획이나 K-POP 관련 기획, 레트로 관련 기획들이 판을 치는 예능판에서, 차세대 K-POP을 이끌어갈 1020 실력자들을 주인공 삼아 트로트만한 공감력에다 레트로 감성도 담고 있는 발라드 음악으로 오디션 예능을 만드는 기획이 <우발>이다. 제법 신선하면서도 이미 성공한 전작들의 요소들을 두루 갖춘 성공이 보장된 기획 아닌가. 더구나 비연예인들을 포함한 150명의 배심원(탑백귀라고 일컬어지는)들이 각각 똑같이 1인 1표씩을 행사해서 승자를 결정한다는 설정은, 프로슈머의 시대를 정확히 읽은 기획이기도 하고 국민주권시대에도 어울리는 선택이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서랍에 넣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명확하다. 예능에서의 재미는 다양성과 반전을 근간으로 한다. 일단 장르로서의 “발라드”는 “트로트”와 같이 다른 장르와의 경계가 상당히 모호한 대중적 개념이라 포용성은 넓은 편이지만, “트로트”에 비해 확실히 그 폭이 좁은, 서정적이고 템포가 느린 음악적 경향이다. 트로트가 “목포의 눈물”과 같은 민요풍 비가에서부터 “아모르 파티”와 같은 EDM까지도 품고 있는 개념이라면, 발라드 역시 보사노바나 레게와 같은 리듬 음악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긴 해도, BPM 100 이상으로 올라가는 곡을 담기는 어렵다. 따라서 발라드로만 국한된 오디션을 한다고 했을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걱정은, 노래방에 가서 발라드만 줄창 불렀을 때 느껴지는 ‘지루함’과도 비슷한 ‘식상함’이다. 시청자들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 예능은 실패한다.
그래서 제작진들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무대 위에 탑백귀 모두를 올려놓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발>의 무대는 오디션에 참가하는 경연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무대가 아니다. 좀 비약해서 말하면 오히려 탑백귀들을 주인공으로 만든 무대인 것이다.
<우발>의 무대는 여느 오디션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동심원으로 퍼지는 음악의 파동을 연상시키듯, 가운데의 원형 무대를 빙 둘러싸면서 무대 바닥 높이서부터 경사로처럼 위로 올라가도록 150개 의자와 각자의 불빛이 배치되어 있다. 탑백귀들은 이 자리 배치 덕에 원형무대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다. 반면 경연 참가자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360도 방향에서 지켜보는 300개의 눈동자들과 150개 자리마다 놓여진 LED등, 그리고 수많은 카메라에 포위된다. 전면에만 관객이나 카메라가 있어서 돌아서면 쉽게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여느 오디션 무대와 달리 도망갈 곳이 없는 심판대에 선 느낌인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경연자일수록 쉽게 주눅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반대로 탑백귀들은 참가자를 원형 무대에 분리해 놓고, 무대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 단으로 사실상 연결되어 있다. 또한 무대에 시선을 두면 자연스럽게 무대 너머 또 다른 탑백귀의 표정과 감정까지도 확인할 수 있으니, 그들끼리의 연대감은 극대화된다. 1대 150의 싸움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우발>의 무대인 것이다.
또한 경연자가 무대에 섰을 때 가장 낮은 위치에 연예인 탑백귀 자리가 있는데, 그곳이 자연스레 전면이 되는 것은 탑백귀 자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참가자는 서서 그 자리를 내려다 보게 되지만 그 자리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제법 큰 의자들이 놓여있고 조명도 집중되어 있고, 특히 마이크가 놓여있다. 150명의 심사위원들 중 맨 앞의 8자리를 차지한 그들만이, 경연자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고 그들의 사연과 노래를 논평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배치는 흡사 콜로세움의 황제 자리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 상징의 연장 안에서 보면 음악이 연주되는 중에 하나 둘 켜지는 탑백귀들의 합격불은 그야말로 검투사의 생사를 가르는 로마시민의 ‘엄지척’ 신호인 것이다. 참고로 로마의 황제는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제1시민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구별된 자리에 앉아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지만 결국 시민들의 동의(엄지 신호로 흔히 상징되는)가 없으면 검투사를 죽일 수 없었다.
<우발>의 무대는 이렇게 구조 자체는 일종의 서스펜스를 만들도록 고안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이 프로그램은 오디션 예능이며, 치열한 경쟁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승리하는 서사를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경쟁은 냉혹하고 성장은 좌절 없이는 불가능하다. 합격과 탈락, 승과 패가 갈려지는 공간으로서 <우발>의 무대는 이전의 오디션 예능을 독설로 불태웠던 심사위원들과 팬심으로 무차별 투표를 독려하던 프로슈머의 대결장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발>의 제작진들은 이런 서스펜스가 감도는 무대를 만들어 놓고는 완전 반대로 기능하도록 대본과 연출 방향, 그리고 심사 방법을 고안해 냈다. 콜로세움을 마당극 무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작진들은 이전 오디션 프로그램들에서 거듭 사용된 성공 방식, 즉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의 비수 같은 악평과 악마의 편집을 버렸다. 온라인 투표나 실시간 문자 투표 등 팬덤의 규모를 키우는 방식도 딱 한 번 파이널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오로지 현장에서 직접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어 안달 난 열정적 소비자들을 개인의 사연과 음악을 소비해 온 경력을 중심으로 공모를 통해 뽑았다. 음감, 리듬, 편곡의 특성 등 음악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보다는, 노래를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기억을 평가에 반영하게 되는 ‘찐발라드’ 마니아들을 모은 것이다. 심지어 연예인을 제외한 140명을 선정할 때엔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 등도 고려했다고 하니, 일종의 소셜 믹스도 시도한 것이다. 게다가 연예인 탑백귀를 섭외할 때도 시즌1까지는 MC 전현무를 포함해서 총 9명의 연예인 중 5명을 가수로 섭외해 음악인이 과반을 넘도록 했는데, 시즌2에서는 시즌1 우승자와 준우승자를 뺀 8명 중에는 가수가 고작 3명에 불과하다. 대신 배우팀이 더욱 보강되어(차태현, 문근영, 주우재 등 3명이 합류) 정서적 공감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하도록 배려했다.
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자식 같은 가수 지망생들의 노래를 듣게 된다. 참가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올 때마다 탑백귀들은 그들의 앳된 얼굴과 나이를 확인하면서 ‘어떻게 이 어린 친구들이 이런 노래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과 의구심을 먼저 가진다. 하지만, 저마다의 사연들을 접하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홀로 사는 자취방의 텅빈 냉장고를 보여주는 15살 예승이나, 왕따 피해를 입고 16살에 독립해야 했던 로이, 당진에서 서울까지 왕복 5시간을 엄마와 함께 노래 공부하러 오간다는 진서 등의 사연을 접하다 보면 문득 부모의 마음이나 이모 삼촌의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물며 작년 12월에 아버지를 잃고 그 부재를 조부모의 사랑으로 채우고 있다는 소연이나,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단둘이 반지하방을 전전하다 경기도 공무원들의 도움으로 혼자 청소년 쉼터로 옮겨와서 살고 있다는 수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그들이 부르는 발라드는 듣다 보면 처음엔 시간여행을 하듯 노래를 듣게 된 그날로 돌아가게 되지만, 이내 부르는 아이들의 상처가 파도처럼 덮쳐와 그날 그 순간에 이 아이들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된다. 엉겁결에 내 기억 속에 끼어든 그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들의 삶에 이미 뛰어든 것이다.
시간 여행 중에 특별한 만남을 경험 중인 탑백귀들은 이 무대의 실제 주인공이니만큼 심심치 않게 카메라에 잡힌다. 그들이 버튼을 누르면 합격등 불빛이 조명이 되어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있는데, 악마의 편집 대신 따뜻한 핑크색 불빛에 젖은 얼굴들이 다양하게 클로즈업 되어 컷트가 넘어갈 때, 시청자들은 각각의 얼굴들이 담고 있는 공감의 폭과 깊이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이렇게 심판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대상인 경연자들에게 빠져 박수와 합격불 밖에 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디션 예능에선 정말 희귀한 장면이다. 불빛과 불빛은 이렇게 연대로 더욱 확산되다가 버튼을 누른 사람이 백 명을 넘어선 순간 쏟아져 내리는 불꽃의 타래로 승화된다. 이 아름다운 순간은 경연자에 대한 탑백귀들의 축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토록 퍼주고도 탐백귀들은 아쉬워 발을 동동 구르며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이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상처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했을까. 우리는 그동안 정말 제대로 살아온 것일까? 우리가 만든 이 사회는 정말 괜찮은 걸까?
어쩌면 이런 특별한 경험은 하게 되는 이유는 발라드 음악의 특수성에서 찾아야 한다. 발라드라는 음악적 흐름은 80년대에 완성되어 90년대에 만개했고, 밀레니엄을 넘어서며 글로벌하게 진화한 음악적 성취다. 70년대만 해도 대중음악계는 신중현의 록으로 상징되는 미8군 무대의 밴드 음악, 민요와 엔카가 뒤섞이면서 대중가요의 상징이 된 트로트, 68혁명의 시대정신을 이어받으며 청바지, 통키타에 얹어 저항정신까지 수입한 포크로 3분할 되어 있었는데, 한국적 정서를 포크에 담으려던 김민기의 후예들과 신중현의 뒤를 이어서 미국 상업 음악을 토착화시키려 했던 아티스트들은 검열과 퇴폐 몰이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악마화를 오직 음악적 도전과 성취로 견뎌야 했다. 그들은 연인을 빼앗긴 화자를 내세워 처절한 애가(哀歌)들을 쏟아내었고, 그 음악들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청춘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대중은 이런 노래들을 어떤 음악적 특색을 갖고 있든지 상관없이, 발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화운동의 확장과 맞물려 더 확장되었고, 발라드라 불리는 거대한 음악적 흐름은 이영훈과 유재하, 부활 등을 거치면서 K-발라드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80년대와 90년대의 격동을 발라드는 정서적으로 기록했고, 폭발적으로 소비되었다. 밀레니엄을 거치며 아이돌 음악과 함께 더욱 창조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나간 ‘우리들의 발라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흐름까지 서양의 팝 대신 한국의 대중가요로 바꿔놓았고, 이젠 ‘우리들의 발라드’를 해외의 유명 가수들이 커버하거나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로제의 <number one girl>은 K-발라드의 정체성을 담은 대표적인 발라드로 무려 9주 동안이나 빌보드 차트인 되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발라드를 소비하면서 발전시켜온 세대들은 ‘우리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에 어울리는 ‘우리들’의 연가를 만들었고,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노래 장르로 만드는 일에도 성공한 것이다.
<우발>의 제작진들은 이 역사를 바탕으로 완전히 다른 오디션 예능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30여 년에 걸친 질고의 세월을 우리들의 발라드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면서 온몸으로 견뎌 낸 사람들을 심사위원석에 앉히겠다는 발상은, 어쩌면 그들의 투쟁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한 섬세한 위로이며, 그들의 인생을 최대한 공감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일종의 도발이기도 하다. 오디션 예능이란 틀을 통해 발라드와 함께 살아온 세대에게, 다음 세대들과 공감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감은 단순한 중재가 아니다. 다음 세대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따끔한 질책인 것이다.
어느새부터 힙합이 안 멋져진 것처럼, 어느새부터 발라드를 만들고 공감해 왔던 세대들도 안 멋지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새부터, 헌법에 새기지 않아서 그랬는지 광주 정신을 잊고, ‘우리들’이란 기호 아래서 서로를 돌보는 노력을 게을리하면서, 엄청난 불공정이라 해도 내 편이 저지르고 있다면 방관하고 옹호했다. 입으로는 민주와 정의를 외쳤고 아직도 외치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적인 ‘꼰대’가 되어 정의로운 선택보다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며 살았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에게 다시는 경험해서는 안 될 내란까지 경험하게 해 놓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내란의 주범들이 법을 농락하고 있는 상황인데, 국회의원만 6선이나 하고서도 여성 가산점에 힘입어 광역지자체 도지사가 된 전직 법사위원장은, 도가 재정 위기라면서 소방예산까지 일방적으로 깎았다. 재정 빨대를 운운하며 감액의 합리화를 시도하더니 이젠 입법으로 해결해야 하는 소방관 인건비 국가부담을 자신의 공약인 양 외치고 있다. 국회의원이 아니라서 권한이 없는데, 정부와 국회에게 짐을 떠넘기기엔 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여성 청소년의 생리대 값이나 영유아 보육교사 수당까지 깎아서 주목받은 그는, 내년 예산에서는 중증장애인들의 권리 중심 일자리 880개에 배정된 127억의 예산도 0원으로 만들 예정이라 한다. 그 때문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 배우의 쌍둥이 언니 역을 놀라울 만큼 잘 소화했던 다운증후군 장애인 서은혜 작가는, 소식을 들은 이후 매일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본인 혼자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공동체가 파괴된다면 숨이 막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가 가진 공감능력이, 여성이면서 남편이 장애인이라는 사실도 흡사한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한 도지사에겐 왜 없는 것일까? <우리들의 발라드2>에서 1라운드를 훌륭히 통과한 수아 역시 음악 공부를 계속 못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학교 밖 청소년들, 가정 밖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도 이미 줄였거나 줄일 예정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첫 대결 회차에서 수아는 윤상의 <사랑이란>을 불렀다. “예전의 자기처럼 살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불렀다”고 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서 그 상황을 관조하듯 부르는 것 같아 가슴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다. 자식에게 무한히도 너그러웠던 전직 판사이자 6선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하기야 광주 정신의 본산인 빛고을의 광역지자체장도 169억이 없다면서 유초중고 학생들의 44일분 급식비를 깎았단다.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일까? 그 정도는 다이어트하듯 한 끼 씩 굶어도 된다 생각한 것일까? 극우와 싸우며 내란을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은 언제부터 민주와 진보를 이렇게 잔인하게 만든 것일까?
예능보다 정치가 여전히 후지다. 드라마보다 정치가 여전히 못 됐다. 그러니 발라드와 함께 살아 온 세대들이라면, 이렇게 후지고 못 돼먹은 정치를 바로 잡아야만 하지 않나? 오디션 예능 <우리들의 발라드2>는 자식 대신 부모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부모나 부모 친구가 심사를 보지 않는다. 돈으로 대신 노래할 사람을 찾으라 하지도 않는다. 더더욱 ‘수아의 불행이 오히려 우승에 대한 동기가 될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위하고 있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합격불을 누르고,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라 박수를 보내고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들 안에 들어와 우리 가족이 된 수아의 마음을 절절히 느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를 끌어 내려서라도, 우리 수아가 절대 꿈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나서서 지키라는 것이다. 당신이, 콜로세움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공감의 마당극 무대였던 원형 무대에 앉아있는 것이 맞다면, 당신의 젊음을 저당 잡혀가며 ‘거부를 거부’했던 그때 그 시절처럼, 마당극이 끝나면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나가서, 외치고, 싸우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들’ 자식들의 꿈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