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의 1950년 대마도 보고서는 일본의 자료를 기반으로 대마도 영유권 논쟁을 일본에 유리하게 해석하며, 한국의 주장을 국내용 민족주의적 요구로 치부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대마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 지배 역사를 강조하면서도, 고대사적 맥락과 한국의 역사적 인식을 의도적으로 축소하여 미국의 신세계 질서 패권 유지에 부합하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해방 후 한국인들의 강한 반일 감정과 역사적 정체성 회복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으며, 미국은 이를 공론화하여 한국 내부의 민족주의적 에너지를 관리하려는 전략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대마도 반환을 주장했던 '우국노인회'는 단순한 우익 단체가 아닌, 일제 식민지배와 신탁통치 결정에 저항하며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독립운동가 중심의 민족주의 단체였습니다.
미국 보고서가 제시한 대마도 역사는 일본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으며, 이는 한국인들의 역사 인지 부조화를 심화시키고 영토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얼마 가지 않아 힘을 잃는 국내용이었다
1950년 미국 보고서는 일본을 위한 논리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OIR)의 #4900 보고서(1950년 3월 30일 자)는, 한국의 대마도 영유권 주장과 과거 대마도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고 마지막에 참고문헌을 소개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미 국무부 보고서를 자주 접하지는 않지만, 한일 간에 놓인 작은 섬 하나를 두고 벌어지는 분쟁에 고대사까지 언급하면서 챙긴 미국 정보부의 꼼꼼함은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인용한 참고 자료는 보고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일방적으로 일본의 자료들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보고서의 전체적인 주장은 일본의 입장을 앞세운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보고서 작성 시점에서 일본이 대마도를 실질 점유한 지 350년이라 전제하고,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연합국의 영토가 된 대마도를 1948년 수립한 한국 정부가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350년이나 실질 지배한 대마도를 현대에 들어 반환 요구할 수 있다는 이 이율배반적인 기술은 고대사를 언급하며 서사를 확장했다. 또한, 기원후 500년경 신라의 영토에서 일본의 영토가 된 이래, 1592년까지 대마도와 한반도 사이에는 영유권에 대한 일치된 의견이 없었다고 하며 대마도가 양측에서 논란거리가 될 여지가 있다고도 표현했다. 그리고 1592년 이후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도 한국이 섬을 통제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거의 없다고 해, 결국, 서기 500년 이후, 메이지유신까지 대마도는 논란의 공간이었던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즉, 지금 현재 일본의 영토인 대마도는 서기 500년 이전에는 확실하게 신라 왕국(the Korean kingdom of Silla)에 소유권이 있었으나, 500년 이후 일본이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더 확실한 일본의 점유 영토가 되었다가, 2차 대전 패전으로 약 77년 만에 연합국 소유로 넘어갔다고 기술했다. 확실한 최근 77년의 소유자를 위해서 천 년이 넘는 길고 긴 역사를 무시하고 불확실한 소유권자로 정의를 내린 미국은, 역사가 짧은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신세계 질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관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이런 관점은 구시대 조선인 지식인 노령층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대마도 영토 반환 요청 등 실력 행사에 나서게 했고, 기나긴 저항의 세월은 1980년대까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미 제국주의 원수’로 보였던 시대상이 공산주의나 좌파의 준동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사실에 바탕을 둔 시대 정서였다고 본다.
1950년 보고서 작성 시점에서 350년 실효 지배 시점을 단순 계산하면 대마도를 일본이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해는 1600년이 된다. 이는 임진년 왜란과 정유년의 왜란 당시는 물론이고 역대 대마도 소우케(宗家) 가문의 다이묘(大名)의 역할, 무엇보다 부산 왜관(倭館)의 역사로 볼 때 1600년도를 기점으로 실질 지배로 특정할 수 있는 전환점이 뚜렷하지 않은 모순이 발생한다. 만일 전술한 500년과 1600년이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사실이라면 세계사 서술은 문제가 있다는 셈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이 보고서가 거짓을 주장하는 꼴이다.
참고로 일제에 의한 식민지 출판물 간행의 시작은 조선의 부동산 조사자료와 고대로부터 전해온 한문 전적의 재간행이었다. 식민지의 요체, 즉, 인적 물적 자원의 원활한 약탈과 타자의 전통문화유산을 일본의 문화로 재편하기 위해 1908년 경성(京城)에 조선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펴낸 <조선군서대계(朝鮮群書大系): 1909년부터 1916년 사이, 총 4기에 걸쳐 간행한 79책이 넘는 역사 백과사전 격 총서>에서 조선의 국경은 남쪽의 대마도 소우케라고 발음하는 종씨 가문이, 북쪽 끝은 의주의 모문룡(毛文龍)이 전담한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남과 북의 국경을 두 이방인에 맡겼다던 일본의 역사 서술이 백 년이 넘게 버젓이 학술서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것을 문제시하는 기관도 없다. 국경 경비가 이방인의 영역으로 넘어간 서사로 인해 우리 스스로 영토를 어떻게 지키고 또는 어떻게 빼앗겼는지를 연구할 풍토조차 어렵게 만들어 논점을 흐린다는 점에서 사실관계를 다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정부의 보고서가 신라를 킹덤으로 표현했다는 점도 의미심장 하지만, 게임이나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단어가 된 현대 시점에서 한반도에 신라 왕국을 기정사실로 삼고 있다면, 왕국과 대마도는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미국은 이 대마도를 일관되게 일본어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 ‘Tsushima’로 표기했고, 한국의 언론과 역사학계는 ‘대마도(對馬島)’라고 표기하고 ‘대마도’라고 발음한다. 일본에서는 ‘對馬島’ 또는 ‘對馬’라고 표기하는데, ‘오사카’를 ‘大阪’ 또는 ‘大坂’라고 표기하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일본만의 지명 속 비밀을 암시하는 일종의 언어유희가 내포되어 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미리 준비한 세월이 얼마나 될지 대부분 한국인은 상상조차 못 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대마도는 시대에 따라 다른 섬, 또는 다른 공간을 거쳐 오늘날의 대마도로 자리 잡았던 역사가 감춰져 있다. 이것은 현대 인류가 역사에서 가장 간과하는 공간 점유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세계 지리에서 완전히 자리 잡은 불변의 영토 고정관념은 근대의 유산에 불과하기에 현대사의 부조리한 혼돈을 풀기 위해서는 그 날조의 역사와 과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영토를 논하지 않는 역사는 배울 필요가 없다
어떤 땅을 실효 지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원주민이라고 부르는데, 특정 영토의 이 네이티브를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역사를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 서구의 패권주의가 주입한 제국주의의 식민지 세계사는 실제 벌어진 일들을 소설처럼 만든 공상과 망각의 세계로 안내해 문학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500년의 대마도와 1592년의 대마도, 현재의 대마도가 다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역사를 담고 있다고 인류에게 기억된다고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 행위이며, 미국의 이 보고서는 지난 세기 대마도 지명의 지정학을 무사히(?) 그리고 저들의 뜻대로 실천해 영토가 바뀌고 나뉜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실천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이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측의 요구에 그럴 만한 타당성을 인정한 이유는 두 가지 필요성이 작용했다고 본다. 하나는, 해방 전후 한국인들이 역사적 관점에서 대마도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던 역사의식이 분명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고 이에 더해 식민지 피지배 기간에 쌓인 반일 감정과 같은 복합적 요소들이 민족주의 국민 정서로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토 반환이 전혀 불가능한 정황을 내다보면서 굳이 이승만의 대외적인 외신기자 회견은 왜 필요했을까. 이는 아마도 해방 공간의 19세기 출생자 중 생존한 많은 노년층이 역사문제, 주로 영토 문제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니즈-일제 지배 아래에서 한바탕 꿈처럼 지나간 자신들의 일생이 헛되이 끝났다는 회한과 과거의 추억이 오버랩된 역사 사회적 인지 부조화에 대한 결연한 요구-와 어릴 적부터 배우고 익혀온 한학 속의 역사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한문을 읽고 쓰던 과거의 교육 체계를 그대로 계승한 세대로 수 세기 전 역사를 머리에 담고 있는 세대였다. 그들에게 지난 350년은 한 권의 통사 정도로 압축되는 사실들이었기 때문에 혼란의 식민지 기간 잠재되고 억눌려 있던 개인으로 치면 자아가, 민족 차원에서 보면 민족 정체성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의 외신 기자회견을 사전에 허락한 또 하나의 이유는 1948년 남한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위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그야말로 분기탱천한 한국인의 에너지를 잠재우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출발로 삼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부정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1919년과 1948년의 건국은 전혀 다른 의미와 시공간의 서사를 숨기고 있는데 뉴라이트가 여러 세대를 넘기면서까지 48년 건국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독도 사건에서 시작한 영토의 문제가 여전히 생생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미국이 한국의 영토 문제에, 나아가 남북 분단과 일제 식민지 치하의 역사에도 매우 깊게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 절대 가볍지 않은 보고서를 가볍게 본 동북아재단의 맹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 유물론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의 영혼과 그 뿌리 의식에 관한 실존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한 19세기 출생자들의 모임을 보고서는 ‘서울노인애국회(Old Men's Patriotic Association of Seoul)’라고 소개했다. 이 의심 많은 노인층을 소규모 우익 정치단체로 분석했는데, 우국노인회(憂國老人會)로도 불렸던 이 단체는 그야말로 명실상부 보수 우익 단체로 지금과 같이 변질한 우익이 아니었다. 이 우국노인회 또는 애국노인회는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초 서울에서 결성되었고, 1946년 1월 6일 자 ‘중앙신문’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老人들도 蹶起, 憂國老人會를 結成(노인들도 궐기, 우국노인회를 결성)
이 기사가 나온 시점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진 직후였다. 그러니까 우국노인회는 이때 전개된 반탁운동과 즉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직된 우익 민족주의계 노인단체 반탁단체다.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는데 미군정청이 다시 들어선 불운을 겪어야 했던 그들은 어떤 상념으로 시대를 바라봤을까. 그들 중에 다가올 6.25 전쟁을 예상이라도 할 수 있던 자들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만일 지금과 같은 정치 편향 상황에서라면 우리는 매국노 짓을 아무렇지도 않고 하면서, 전쟁 불사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모두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를 억누르기보다는 문제를 극대화하면서 밖으로 노출해 공론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이른바 공론화 전략(public escalation)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여론을 수렴해서 대마도 수복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적 색깔을 반영하도록 허락했다고 본다. 그러니까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은 국내용이었다. 그리고 육지가 아닌, 도서 지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섬의 존재는 선박 이동 중에도 어느 정도 가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구는 다르지만, 지도와 지리학습은 2차 대전 이전에도 이후에도 활발히 진행되었기에 아시아에서 자신이 태어나서 걷고 뛰고 냄새 맡던 고향의 하늘과 숲과 기억과 거리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 19세기 출생 노인들이 강하게 의심했던 회귀 본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서울처럼 국토 강산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에서는 어릴 적 살던 동네에 가 보면 도시 개발 때문에라도 기억과 일치하는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기억력과 인지 세뇌는 놀랍도록 간단한 일이다. 역사의 날조와 기억 회로의 모호함이 생태적으로 문화적으로 학습 효과를 가져왔다고 본다. 한국인의 역사인지 부조화는 정신병적 수준이지만, 한국인을 이렇게 만든 타 문화권은 더 심한 사회병리 현상을 겪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겠지만, 현실은 ‘이러다 다 죽어’의 문명 퇴화를 경험 중이다.
대마도 영토 반환을 주장한 우국 노인단체 총재인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 1875년~1948년 10월 7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던 독립운동가로 1946년 1월에 반탁과 즉시 독립운동을 내세우며 단체를 결성했고, 1948년 영토 문제와 한미조약 문제 등에 관한 청원·건의를 서슴지 않았다. 사실, 해방 공간의 소란이 없었고 6.25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남북한 통일 정권-을 지휘할 인물은 얼마든지 넘쳤었다. 자의든 타의든 현재로선 그 속을 다 알 수 없는 이북으로 간 이종만(1885~1977), 조소앙(趙素昻, 1887~1958), 홍명희(洪命憙, 1888~1968)를 제외하면 김구(金九, 1876~1949년 6월 29일)와 홍진(洪震, 1877~1946년 9월 9일), 여운형(呂運亨, 1886~1947년 7월 19일), 이상정(李相定, 1896~1947년 10월 27일)이 초대 대통령감이었다. 북한은 조기에 노선 투쟁으로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했고, 남한 역시 예정(?)대로 암살 등 숙청이 있었다. 역사를 아는 사람, 역사를 말하는 사람을 지치지도 않고 없앴던 지난 81년을 돌아봐야 한다.
좌)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 1875년~1948년 10월 7일)
우) 맨 앞줄 가운데는 변호사 정철승의 어머니와 외조부 윤기섭, 그 뒷줄 안경 쓴 사람이 조성환이다.
언제나 말할 수 있을까. 그 역사….
3)편으로 이어집니다.
댓글
( 0 / 500 )
Platon
7
미국의 1950년 보고서를 단순한 외교문서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영역은 구분해서 추가 검증이 함께 이루어진다면 더욱 설득력이 커질 것 같습니다.
( 0 / 500 )
hong_J
10
시리즈를 읽을수록 '역사는 문서를 읽는 사람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 문서, 일본 자료, 한국 사료를 함께 대조해 보는 작업이 왜 필요한지 잘 느껴졌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0 / 500 )
Pink6
8
독도와 대마도 문제를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 냉전, 미군정, 민족주의까지 연결해 바라본 시각이 흥미롭습니다. 역사 문서는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의 기록을 함께 비교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0 / 500 )
bigBOY
7
1편에서 독도 폭격 사건과 미군 문서를 소개했다면, 2편에서는 그 문서가 가진 역사적·정치적 의미까지 연결해 주셔서 흐름이 훨씬 선명해졌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1948년 기밀문서와 1950년 OIR 보고서를 직접 비교 분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0 / 500 )
namunara
5
우국노인회와 조성환 선생의 활동을 다시 조명한 부분이 특히 의미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오늘날 영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0 / 500 )
Hangi7
5
1편을 읽고도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2편에서 우국노인회와 조성환 선생 이야기까지 이어지니 해방공간의 분위기가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일반 역사책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자료라 계속 읽게 됩니다.
( 0 / 500 )
파수꾼
4
2편까지 읽었는데 단순히 영유권 주장만 하는 글이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와 역사 인식까지 함께 다루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서는 당시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과 관련 기밀문서들도 더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0 / 500 )
김재인
4
역사는 결국 누가 기록하고 어떤 자료가 살아남느냐에 따라 후대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미국, 일본, 한국의 사료를 모두 교차 검토하는 작업이 중요하며, 새로운 기밀문서 발굴이 계속 이루어져야 역사 논쟁도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0 / 500 )
sara
4
1편에서는 독도 문제인 줄 알았는데, 2편에서는 대마도와 해방정국, 미군정, 냉전까지 연결되면서 시야가 훨씬 넓어졌습니다. 내용이 쉽지는 않지만 여러 번 읽을수록 새로운 부분이 보이는 글입니다.
( 0 / 500 )
Rosario
2
영토 문제는 감정만으로 해결되지도 않고, 한두 개의 문서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공개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 역사 연구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 0 / 500 )
신고내용
신고내용을 선택해주세요
회원비난/비하/욕설글 및 댓글도배성 게시물저작권 침해/불법자료 유출허위사실유포개인정보 유출.사생활 침해무단광고/홍보음란물 및 도박 불법 광고물범죄행위 관련 글불법행위 관련 소개물품 판매 및 사기글악성코드 및 스파이웨어 유포기타 사유 및 운영진 판단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Sign in with Google
All information provided by us is free of charge and is for the public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