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폭격 보고서를 통해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규정한 미국의 인식을 강조한 것은, 현 정부의 뉴라이트적 역사관에 맞춰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재단이 독도 폭격 사건의 비극적 맥락보다 영토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식민사관을 넘어선 친미 사대주의적 해석으로, 해방 공간의 복잡한 역사를 단순화하려는 시도로 비판받을 수 있다.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미국이 한반도 정치에 개입하여 민족주의적 여론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종하려 한 대리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독도와 대마도 영토 문제가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민족주의 소탕 작업의 전조였다는 주장은, 해방 후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이 미국 개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이 한국인의 대마도 반환 열망을 인지하고 이승만을 통해 이를 표출하게 한 것은, 당시 한국의 민족 감정을 자국 이익에 활용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적 행보를 보여준다.
독도 영유권의 역사적 진실과 미국의 숨겨진 속내를 왜 지금, 이 시점에...
뉴라이트가 수장인 동북아재단의 역사 인식 수준
2026년 7월 6일, 동북아역사재단이 공개한 미국 극동공군사령부(FEAF)의 1948년 6월 24일 자 ‘독도 폭격 사건 보고서’가 있다. 발견의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1948년 6월 8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 중 독도에서 조업하던 한국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한 독도 폭격 사건의 비극을 조사하면서 작성된 기밀문서인 모양이다. 이 문서 작성 주체인 FEAF는 ‘Far East Air Force’의 약자로 단수형일 때는 1941년에 창설된 필리핀 주둔 미 육군 항공대 조직을 말하고, 복수형인 ‘Far East Air Forces’로 쓰일 때는 1944년에 만든 서남 태평양 일대 공군 통괄 부대를 말하는데, 6.25 당시 한반도를 초토화한 전투기 지휘 본부는 이 복수형 FEAF에서 나온 극동군사령부였고, 그 위치는 일본 도쿄에 있었다. 단수 복수는 중요하지 않다. 필리핀의 미군과 일본의 미군이 왜 한 데 엮여 나오며, 6.25 전쟁 기지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그리스 신전을 닮은 제국주의 양식의 메이지 생명관(明治生命館, Meiji Building), 1951년 미군 촬영
현재의 明治生命館 / 건축가 岡田信一郎(1883~1932)의 초기 스케치
핵심은 동북아재단이 보고서에서, “1947년 9월 리앙쿠르 암(독도, Liancourt Rocks)이 ‘한국의 일부(a part of Korea)’라는 것이 ‘분명히 확립(definitely established)’됐다”라고 명시하고 있다고 밝히며 보고서의 초점을 ‘영토 문제’에 둔 것이다. 동북아재단은 노무현 정부 때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등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정부 출연 기관이지만, 이곳에 식민사관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연구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이재명 정부 초기 ‘환단고기’ 언급 때 당황했던 인물인 박지향(1953~)이 수장인데, 나름 정부의 성격에 맞춰 ‘독도는 우리 땅’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 것 같다. 박지향은 윤석열 재임 중 임명되었고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쓴 공동저자 중 한 명으로 뉴라이트를 지향한다.
이 기록을 들어 동북아재단은 광복 직후 미국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1차 사료적 증거라고 설명하며, 역사적 발견을 넘어 한국의 주권 확보와 국제적 논쟁에서 강력한 무기가 될 전망이라고 했는데, 망발의 도가 지나치다. 상세한 내막 누구도 모르는 정치적 열세였던 환경에서 생존자 중 한 명이 150여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던 것은 묻히고, 심지어 6. 25 전쟁 중에도 독도 폭격이 있었는데, 이 사건의 해석을 고작 자국 영토 확인이라고 단정하다니, 이런 자세는 식민사관을 넘은 현대판 친미 사대주의로 역시 뉴라이트 답다. 해방 공간의 혼란하던 당시라면 몰라도 어떻게 2026년에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학술적 연구 견해나 기관의 정치적 판단 이전에 비상식의 전개라고 본다.
영토 불만, 이승만의 등판, 6.25 전쟁의 레퀴엠
1948년 6월 8일의 독도 폭격 사건을 보고서로 작성한 6월 24일에서 두 달이 가까이가 지난 8월에 이승만은 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미국은 발표일을 8월 17일로 기록했지만(KOREA’S RECENT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OIR Report No. 4900, March 30, 1950, DEPARTMENT Of STATE), 한국의 대통령 기록관에는 8월 19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날인 8월 19일부터 국내 언론에서 보도하기 시작했고, 열흘 만에 일본은 반환 근거가 없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대마도 반환 문제는 중국, 소련, 홍콩, 광동에까지 국제적으로 설왕설래하다가 1950년 원단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이 ‘우선 자력으로 통일하고, 대마도 반환은 차후에 서서히 하자’고 했다. 즉, 연합국이 있는 한 일본의 재침략은 없을 테니, 상호 간에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고, 대마도 귀속문제는 사필귀정이니 강화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한 발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 장면, 1948년 8월 19일 AP통신 회견
이승만의 입에서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라는 발언을 했다고 이 자를 역사 인식이 있는 지도자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뉴라이트가 주로 내세우는 이승만 치적 중의 하나지만,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승만은 해방 후 한국이 더딘 출발을 하도록 민족의 발목을 잡은 덫일 뿐이다. 이시영, 이동녕,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김구 등 동시대 많은 민족주의 정치인들을 심도 있게 다룬다면, 근현대사에서 지우려고 애썼던 ‘민족주의’가 미국의 뜻대로 이승만을 통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그야말로 민족의 반역을 위한 통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승만의 대마도 복속 발언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이 한반도 정치에, 그것도 영토 문제에 사전 정보를 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대리 청정 관행이다. 해방 후 실지 회복(失地回復)에 대한 국민의 여론이 높아지며, 여러 단체, 특히 항일운동 전력이 있는 노인들이 도서 주권 문제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에 독도는 미국이 먼저, 대마도는 이승만이 문제를 짚어가며 對 국민 기만전에 나선 것이다. 미국은 해방 공간에서 벌어지는 민족 정서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이승만은 공들여 키운 미국식 녹화사업 1호 인물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 중이었다. 그 관행과 방식은 지금까지도 대중의 정서를 현혹해왔으며, 유시민 같은 작가 지난 30여 년간 정치판에서 해왔던 역할을 떠올리면 된다.
둘째, 독도-대마도로 이어지는 영토 언급 문제가 장차 6.25 사변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민족주의 소탕작업의 전조로 보는 관점이다.
1947년 3.1일절(‘삼일절’이라고 읽는다, ‘삼점일절’이 아니다) 기념식의 ‘소란’에서 시작되어 6.25 전쟁 이후인 1954년 한라산 개방에 이르기까지, 장장 8년여에 이어진 ‘제주 4.3 사건’이라는 희대의 학살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이 사이인 1948년 10월, 그러니까 이승만이 대마도 수복을 발표한 지 두 달 만에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절한 여수·순천의 국방경비대를 학살하며 이들의 무장 반란 사건으로 치부한 여수·순천 사건이 있다. 심할 때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라고 불러서 진짜 반란이 난 줄 알았다. 여수·순천 사건과 제주 4.3, 그리고 6.25는 연속된 영토 문제와 이를 바라보는 미국이 뒤에 개입해 있다. 단순한 소요나 소란으로 치부되는 대중의 민족 감정 폄훼는 매우 듣기 거북하다. 뉴라이트 사학 입장에서는 반대로 한국인의 민족, 민족주의 관련 단어들이 귀가 따가울 것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한민족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역사의 맥을 바꾸고 관점을 호도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과연 얼마나 더 남의 관점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빠져나온 기쁨도 잠시, 해방 공간의 소란은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진실은 영토가 이상하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이 국내 언론에 미국이 먼저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을 하게 한다. 1950년의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OIR(U.S. Department of State,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Division of Research for Far East) 보고서 #4900에서 이 인터뷰 날짜를 1948년 8월 17일로 기록한 것은, 미국이 이틀 먼저, 이승만의 외신 기자회견을 지시한 셈이다. 미국은 ‘In the heart of every Korean is a longing for the return of those islands(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그 섬들의 반환에 대한 갈망이 있다)’라는 미국의 분석을 토대로 이승만이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라고 여론의 눈높이에 맞추게 했다. 그런데 보고서 내용대로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일본이 실제 통제권을 행사한 지 350년(1950년 OIR #4900 시점)이 넘었는데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반응했을까. 이것은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다음 회에서 독도 문제와 대마도 문제 등 도서 지역 영토 문제를 풀어가는 미국의 해법에 관해 설명하겠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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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er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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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폭격 사건을 단순히 "미국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한 증거" 정도로만 해석하는 건 너무 단편적이라는 지적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당시 미군정과 냉전 초기의 전략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네요. 2편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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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k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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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장 가운데는 상당히 과감한 해석도 있지만, 최소한 1948년 전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영토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자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사료는 사실이고, 해석은 계속 검증되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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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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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를 일본과의 양자 갈등으로만 봤는데, 미국의 점령정책과 냉전 전략까지 연결해서 설명하니 새로운 시각이네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역사 해석도 다시 살펴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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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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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단순한 독도 이야기가 아니라 해방 공간과 미군정, 제주4·3, 여순사건, 한국전쟁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네요. 동의 여부를 떠나 자료와 논리를 계속 제시해 준다면 흥미로운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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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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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제는 정치적 진영을 떠나 최대한 많은 사료를 검토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이 글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에 잘 다루지 않았던 자료와 시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는 읽어볼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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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o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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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독도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들의 비극은 잊혀져 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영토도 중요하지만 희생자들의 역사 역시 제대로 조명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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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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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당시 어떤 전략적 계산을 했는지는 충분히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과 추론은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속 편에서 더 많은 1차 사료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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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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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이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같은 문서라도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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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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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소련의 이해관계를 함께 봐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합니다. 독도 역시 냉전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접근해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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