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해방 후 일본 잡지에 실린 정몽주 생애 기사를 번역하며, 5.18 희화화 문제와 연결 지어 역사의 희화화를 비판합니다.
정몽주 기사는 당시 일본의 한국사 연구 흐름과 재일 문학가의 시선을 반영하며, 한국인이 배운 정몽주와는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기사는 정몽주를 단순한 충신이 아닌, 복잡한 시대 배경 속에서 외교관이자 학자,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상세히 조명합니다.
특히 이성계와의 관계와 선죽교 피살 과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도, 후대의 역사 평가가 뒤바뀐 점을 지적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드러냅니다.
결론적으로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이 훗날 그를 기리는 태종이 된 사실을 통해 역사의 모순을 강조합니다.
최근 5.18 학살을 희화화한 커피를 마시게 된 시대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해방 후 간행된 일본 잡지 <親和>에 게재된 기사 한 편을 번역 소개한다. 이 잡지는 우리의 해방 후, 저들의 패전 후 혼란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2차 대전 이전 일본 출판계 역사 전쟁의 여기(餘氣)를 모아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간행된 잡지다. 민간의 관계 정상화를 표면적으로 내세운 고도의 ‘관계 정상화’ 잡지 중 하나지만, 기사를 쓴 저자 金熙明(1903~1977)에 대한 자료는 의외로 많지 않다. 김희명은 재일 문학가로 1920년대부터 일본 문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반제국주의자로 알려지는데 그에 관한 논문이 있기는 하지만, 재일 조선인 또는 재일 한국인 인문학 연구자들의 연구가 활발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쓴 정몽주(鄭夢周, 1338~1392)의 생애 기사는 현대 일본어인 만큼 비교적 쉽지만, 과연 요즘 한국인이 읽었을 때 얼마나 기존의 역사상식과 통할지 궁금하다. 김희명이 정몽주 기사를 씌기 위해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高麗史> 李相伯, <朝鮮通史> 林泰輔, <朝鮮史話> 幣原坦 등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상백(李相伯, 1904~1966)의 한자 이름은 맏 백 자인데 표준 인명에서는 일백 백 자를 쓴다. 이름 자에 신분이나 지위를 상징하는 한자를 피하는 건 좀 우습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한국 사회가 이토록 위계에 민감한 줄은 몰랐다. 이상백은 우현서루(友弦書樓)를 만들어 항일 운동 지식인을 키운 이동진 선생의 차남 이시우의 셋째 아들이다. 큰 형이 이상정 장군이며, 둘째 형이 이상화 시인이다.
하야시 타이스케(林泰輔, 1854~1922) 메이지 시대 조선사 연구 개척자 중 한 명이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는 개척자에서 완성자까지 수백 명은 족히 넘는 계보가 거미줄처럼 엉켜 있다.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 1870~1953)도 그중 한 명이며 역사가이자, 관료, 그리고 교육자였다. 역사는 공격하고 빼앗고 연구하고 교육으로 완성되는 인류 최고의 희화화 작업이다. 탱크 커피보다 재미난 역사가 여기에 있다.
과연 정몽주에 대해 우리가 배운 내용과 얼마나 일치하고 얼마나 유추할 수 있는지 잡지용 기사니만큼 편안하게 감상해 보시길.
포은 정몽주의 생애ー고려 왕조 말 大儒 정치가 金熙明
1. 시대적 배경
정몽주(鄭夢周, 1338~1392), 호는 圃隱 자는 達可, 1337년 고려 충숙왕 복위 6년 12월 경상도 永川郡 東愚巷里에서 태어났다. 요명 夢蘭, 후에 夢龍이라 했지만, 관례 올린 후에 夢周로 바꾸었다. 그는 56세로 생을 마쳤다. 고려조 마지막 공양왕 4년 1392년 4월 4일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573년 전의 일이다. 일본의 元中 9년 後龜山 천황에서 後小松 천황에게 神器가 전해진 해(임금 자리 오른 해)에 해당한다.
몽주는 21세 때 小科에 급제하고 24세 때 좋은 성적으로 大科에 급제했다. 1362년 그의 나이 26세 때 藝文館檢閱로 출세 가도를 시작했다.
후에 ‘東方性理學大祖’로 불릴 정도의 학자가 되어 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은 정치가였는데, 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순국자로 희생의 상징과도 같은 생애였다.
30년 후 고려는 망했고 그는 그 직전에 죽었다. 그가 활약하던 연대는 1362년에 시작해 1392년에 끝나기 때문에 공민왕(11~23년), 폐왕 우(1~14년), 폐왕 창(1년), 공양왕(1~4년)의 시기로 고려 왕조 말기에 가까웠던 때 해당한다는 이야기다.
왜적의 침공이나 내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여진, 거란, 몽고, 일본 등의 포위국가들과 항상 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말에는 특히 원, 요와 전쟁이 이어졌고 일본의 왜구 침공을 받았다. 요와 왜구는 실로 고려의 멸망을 재촉한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3세기 말 무렵, 원나라는 왕위 다툼과 내란 권력 투쟁이 격화했고, 거기에 더해 1세기 동안 압박해 온 漢民族에 대한 열악한 정치적 정책이 이어져 한민족의 반원 항쟁 운동이 봉기했다.
즉, 1368년 1월 吳王 朱元璋을 제왕으로 해 명나라가 일어났다. 8월에 徐達, 常遇春 등의 군사가 大都 北京을 공격해 무너뜨리려고 입성했다. 그때 開封을 北京이라 개칭하고, 金陵을 南京이라고 바꾸었다. 元 順帝는 4월부터 심해진 공격에 배겨 낼 수 없어 大都를 넘겨 버리고 북변의 開平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원은 패망하고 北元이 되었다. 이 두 세력의 균형이 역으로 무너졌을 때, 즉 1368년을 전후하여 고려 왕조는 정치상의 일대 변동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은 동요했고 斥元 親明의 기치를 선명히 하는 자들과 또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 신구 두 파의 싸움이 격화해 왔다. 종래에 사용해 왔던 연호가 明의 연호로 바뀌었는가 하면 다시 元의 연호로 돌아가고 다시 明 연호로 바뀌는 상황으로, 그 변동 때마다 군사 행동이 일어나 반대파가 유죄 또는 말살되었다.
또 원과 고려의 국세가 모두 쇠약해진 틈을 타, 소위 왜구가 고려의 각지에 발호하게 되었다. 일본의 正平 5년 아시카가 모토우지(足利基, 1340~1367)가 關東管領이 되어 北朝의 崇光 천황이 즉위한 다음 해의 일이다. 왜구는 본래 일본 幕府는 아니고 군사적 조직적 침략은 아닐지라도 그 규모는 컸고, 40년의 장기에 걸친 일로, 하루에도 수차례나 피해 본 지방도 있다. 곡물, 布帛(배와 비단), 보물 등을 약탈하는 외에 방화, 살상, 가축류나 부녀자를 납치했다. 일종의 해적 행위로 北邊 각지에까지 창궐했다. 王都 開城 부근까지 침공을 받았기 때문에 수도를 鐵原으로 옮기려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왜구는 이 왕조가 되었어도 상당 기간 이어졌지만, 나중이 되어 양국의 무역 관계가 정상화를 꾀하게 되었다.
고려가 원을 大邦으로 섬겨온 이래 원의 가렴주구는 가혹했고 국력은 매우 소모되었다. 권신들은 농민을 횡탈해 사리를 추구하고 田地 제도는 특권계급의 사욕으로 인해 이용되었다. 연해 각지의 해산물은 외부에 빼앗기고. 그들이 날뛰는 바람에 경작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상태다. 왕자들의 음락, 사치, 낭비와 무신 귀족들의 횡탈, 사찰의 겸병 등으로 전제에 혼란이 생겼다. 국민 생활의 불안은 점점 더 심각해져 농민이나 노예는 여기저기에서 반항 운동을 일으켰다. 또 몇 개의 강국을 상대로 전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군사비는 점점 더 늘어나는 한편, 大邦의 歲貢은 가혹하게 징발되었다. 국민도 정부도 모두 궁핍해져 국가 재정은 무너지고 위기 존망의 때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명의 인간이 난세의 정치가로 살아가는 길에는 그 시대적 배경 외에 당파나 그 밖의 대인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지난 호에 조선 왕조 창시자인 이성계와 그 시대를 썼는데 그중에 본 원고의 주인공 정몽주가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정몽주는 이성계보다 2년 아래로 관직에 오른 것도 이성계보다 늦었다. 이성계는 22세에 이미 아버지 李子春 아래에 임관해 상당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초기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幕下 입장에서, 사실 또 그가 北邊에 종사했을 때는 언제나 성계의 지휘하에 소속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성계가 무관이었다면 몽주는 문관이었다는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국가적 운명을 걸고 싸웠던 주요 정사는 대외적으로는 親元이냐 親明이냐로, 원 또는 명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대립이 중대한 문제였다. 또 내정 문제로서는 田地 제도의 개혁 합리화와 불교에 의한 정치적 주도권을 배척하고 유교 정신을 주로 내세워 정치적 지도 원리를 확립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척불 운동은 단순히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진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의 정체는 친명 정책과 토지 개혁 등의 정치상의 문제가 관련해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은 점차 확대 강화했고 정권 교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성계 일파의 신진정객 사이에서 제창된 이 혁신적 建策은 단순한 이론적 학문적 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사원 경제의 팽창과 승도 과잉의 비생산적인 점을 규탄하고 신흥 세력의 최대 관심사인 국가 재정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환경 속에서 친구 양파로 분열된 중신들은 서로의 생명을 취하거나 뺏기는 상황이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이런 엄숙한 운명의 무대에서 동거하면서 소용돌이치는 탁류 사이를 각각 헤엄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적 별 아래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2. 事跡
정몽주는 공민왕 12년(1363년) 1월, 27세 때 韓邦信 軍을 따라 북방의 元軍과 싸웠다. 반역도 崔濡가 이끄는 1만의 적군이 북방에서 강을 건너온 것을 맞이해 격멸시켰다. 또 그해 2월 여진이 三善, 三介 등지에 침공해 온 것을 공격해 무너뜨렸다. 그 후에도 이성계를 따라 胡拔都의 入寇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왜구의 격퇴에 용감이 싸웠던 일이 있다. 폐왕 우 6년, 1380년 (일본 天授 6년) 9월 이성계의 有名은, 저 전북 雲峰郡 荒山전투에 참가해, 1만여 왜적을 전멸시키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공민왕 18년 1369년 4월 몽주는 書狀官으로 洪師範 등과 함께 明에 사신으로 갔는데, 해상에서 대 폭풍우를 만나 홍은 물에 빠져 죽었고 그는 목숨을 건져 홀로 명에 갈 수 있었다. 명에 도착한 그의 사명은 명 태조가 蜀을 평정한 승전 축하와 유망한 고려 청년을 명에 유학시키는 일이었다. 모두 수미일관하게 사명을 완수했는데 명의 악기를 고려에 수입하는 일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폐왕 우 3년 1377년 (일본 天授 3년) 9월에 외국 禁斷을 요청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사신으로 온 일이 있다. 1366년 (일본 正平 21년) 11월, 金逸이 같은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갔고, 그 외의 그 외에 여러 인물이 하가타(博多)에 파견되었는데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 측에 억류되어 사망한 자도 있고 살해당한 자도 있어 고려에서는 일본 가는 사신을 지옥행이라고 흘리며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분연히 그 악역을 떠맡았다.
당시 일본은 아시카가 요시미치(足利義満)가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로 하여금 남북조 통일을 이루고자 남조의 後亀山 천황의 京都 遷幸을 맞이해 했을 때의 일이다. 막부가 고려사절을 맞이해 친히 외국 禁制를 절충한 것은 여러 차례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은 九州의 이마카와 료준(今川了俊),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 시부카와 미치요리(渋川満頼) 등이 직접 교섭 임무를 맡았던 맡았다. 征西將軍宮이라고 부르는, 하카타(博多) 지방에 권세를 떨치고 있던 가네요시(懐良) 親王이 죽었을 때, 그 권세가 모조리 九州 探題인 이마가와 료준(今川了俊)에게 넘어갔다.
일본 天授 3년 9월 몽주가 하카타에서 회담했던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이마카와 료준이었다. 몽주가 평화를 주제로 한 정상적인 교린 교역의 이익을 설명하는 게 매우 통절했기 때문에, 양자는 부지불식간에 우의를 다지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료준은 몽주의 인격이 원만하고 깊은 학식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來日을 사례했다. 그리고 披虜 300명의 송환을 결정한 외에도 많은 토산물을 증정했다고 한다. 그때 지은 몽주의 시가 있다.
使日本時作
水國春光動 섬나라에 봄빛이 이미 감돌건만
天涯客未行 하늘가 나그네 돌아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봄풀은 천 리를 연이어 푸르르고
月共兩鄕明달빛은 타향과 고향에 함께 밝네
遊說黃金盡 유세하느라 황금 모두 바닥나고
思歸白髮生 돌아갈 생각에 백발이 생기네
男兒四方志 사나이 사방을 유람하려는 뜻
不獨爲功名공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리라
라고 정치가의 입장을 노래했고,
奉使遊桑域 사명을 받들고 일본 땅 유람하며
從人問土風 사람을 통해 이곳 풍습 물어보니
染牙方是貴 치아를 물들여야 바야흐로 귀한 것이고
脫履始爲恭 신발을 벗어야 비로소 공경함이라 하네
柳入新年綠 버드나무는 새해가 되어 푸르고
花如故國紅 꽃은 고향과 마찬가지로 붉도다
客居殊寂莫 나그네살이 몹시도 적막한지라
喜聽足音跫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지네
라고 당시 일본의 풍속을 표현했다.
廢王 禑王 8년 1382년 7월 몽주는 進貢使로 遼東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입경을 허가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請諡使로 進物을 가지고 요동으로 갔는데, 역시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고려의 왕실이나 중신의 일부가 明에는 추종하면서 遼東에는 뭔가 이중성을 띤다고 하는 인상을 요동이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고려 조정은 요동 취급에 있어 신구 양파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폐왕 10년 1384년 2월 몽주는 明의 南京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즈음 고려는 明의 홍무 황제의 감정을 악화시켜 양국 간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게 되었는데 누구도 남경으로 가기를 꺼렸다. 그것은 지난번 명의 사자가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하급관리가 그 사자를 죽여버리는 불상사가 있었고, 명에게 매년 의무적으로 上貢하는 歲貢을 5년이나 체납하고 있다는 불성실이 더해졌던 때이다. 명에서는 朝聘을 금하고 병사를 출동시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陳平仲에게 差遣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그는 전지 치료를 위해 가버렸다. 왕은 몽주에게, “경은 양국 고금의 사정을 관통하고 있으니, 진평중을 대신해 明京 행을 승낙하라.” 하고 사정했다. “君父의 명령은 水火라도 피할 수 없다”하고 몽준은 이것을 즉시 받아들였다. 명의 수도(南京)에 도착한 그는 명 태조의 탄생절을 축하하고 우왕의 諡號를 청했다. 그리고 세공인 말 1천 마리를 바쳤다. 당시 고려의 국고가 궁핍했기 때문에 位 6품까지 관리들이 모두 수중의 금은을 걷게 했고, 魯國公主 어전 소유의 금은 기구를 다 거둬들여 공물로 바쳤다. 명 태조는 몽주의 내가 來賀를 매우 기뻐하며 그 박학다식을 칭찬하고 특히 慰撫 優禮의 대우로 맞이했다. 이듬해 명에서 사자가 와 그의 방문의 용건이 모두 청원대로 허락되었으니, 그 외교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廢 禑王 12년 1386년 8월 그의 나이 50세 때, 또 명에 사신으로 갔다. 이번의 용건은 고려왕의 便服과 陪臣의 朝服 제정에 관해 청원하는 일, 세공액을 감면 받고 이것을 3년마다 한 번 헌납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良馬 5천 마리를 태조에 바쳤다. 태조는 면식이 깊은 그의 청원에 감동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 자리에서 청원대로 이를 허가했다. 덧붙여서 5년간의 미납 세공을 전액 말소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폐 우왕 14년 1388년 3월 몽주 52세 때, 마침 요동에서 파견된 자가 고려로 왔다. 요는 바로 고려에 대해 處女, 秀才, 宦官 등을 징발하기 위해 출병을 준비를 서둘렀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門下侍中 최영(崔瑩, 1316~1388)은 매우 분개해 일전을 각오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거기서, 중신 회의를 열어 검토한 결과, 몽주를 요동해 파견해 우선 일의 진상을 탐색하게 하기로 했다. 조빙이라는 명목으로 그는 요동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요동은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요동 외교에 두 번째 실패를 맛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려 왕조에 대한 요동의 불신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몽주는 지성 높은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그 품성은 유화하고 온화한 데가 있었을 것이다.
3. 학문과 遺稿
정몽주의 학문은 모두 독학으로 얻은 것이다. 그는 이렇다 할 스승이 없다. 그러나 <圃隱集>에 실려 있는 일문으로 金得培라는 학자에게 교양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몽주 26세 때 김득배가 적을 물리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간신으로 인해 살해당해 목을 尙州 거리에 걸었다. 몽주는 문하생이었던 인연으로 이를 정성스럽게 장례 지냈다.
몽주는 三角山에 숨어 대학, 중용을 연구했다. 詞藻(시와 문장) 따위는 높게 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에 열중했다. 이것은 나중에 閔子復이 鄭道傳에게 이야기한 기록에 의해서도 분명하다. 그는 31세 때 예조 정랑 겸 성균박사가 되어 경서를 강의했다. 그런데 그의 강의는 당시에 유행하던 주자 집주가 아니라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후에 胡炳文의 <四書通>이 중국에서 전해져, 처음으로 그의 논리가 우연이 아니라, ‘程朱學’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고려 말에 三隱이라 하여 號에 隱 자가 들어가는 세 학자가 있다. 李牧隱 (穡), 鄭圃隱 (夢周), 吉冶隱 (再)이다. 이 색은 여말 몽주의 스승격으로 대정치학자였다. 斥佛揚儒運動의 선도자였다. 야은은 몽주의 高弟로 성리학을 후세에 전한 큰 역할을 했던 학자다. 목은은 ‘夢周論理橫說竪說, 無非當理, 推當東方理學之祖’라 하여 그에 관해 推頌했다.
몽주의 시문은 꽤 많았는데 거의 散逸해 버렸다. 그 아들 鄭宗誠이 나중에 약간의 시문을 모아 <포은집>을 출판했다. 일본에 사절로 갔을 때 만든 시도, 그의 친척 집에 수십 수가 남아 있던 것이 그 전부이다. 또 50세 때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만든 시문도, 일기도, 문하생의 손에 의해 겨우 이것이 전해졌다고 한다.
<포은집>은 新溪本과 開城本, 校書館本 3종류가 있는데 신계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교서관본이 가장 상세하다. 宣祖 17년 1584년 왕명으로 <포은집>을 인쇄하고 柳成龍(1538~1607, 중종 37년, 선조 40년 영의정)이 교정했다. 이때 斷簡 零墨을 얻어 이것을 拾遺(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하고 永川에서 출판했다. 머지않아 壬辰(1592년, 일본 文祿 元年), 丁酉(1597년, 일본 慶長 2년)의 왜란 소동으로 아쉽게도 산일해 버렸다. 또 효종 10년(1659년, 일본 萬治 2년) 鳳城에서 이를 출판했을 때가 있다. 몽주 11대 후손에 해당하는 鄭纘輝가 여러 가지를 모아 續錄하고 本集과 함께 출판했다. 해방 전까지 開城의 成均館에 판목이 현존했던 포은집은 본집 4권 2책, 속집 3권 1책이었다. 지금은 38도선 너머 저쪽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 밖에 5부 학당을 건립하고 향교를 만들고 또는 義倉을 만들어 조운의 편리를 꾀하고 또 죽던 해 2월에는 大明律에 따라 新律을 선정했다. 그는 문화의 공로자로서 역사적인 인물이다.
4 선죽교에서 죽다
정몽주는 반원 친명정책과 전제 개혁 및 우왕 폐위 후의 창왕 계승에 반대 의견을 가진 曺敏修의 배척, 공양왕의 옹립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성계 일파와 보조를 함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계 일파를 절대 지지한 건 아니었다. 이성계파가 죄상 불명한 것에 극형에 처하는 데 반대해 刑曹의 탄핵을 받아 한때 밀려난 적도 있다. 이성계파가 추진한 공양왕 책봉에 협력하고 9 공신의 한 명이 되어 忠義君이라는 봉호를 받은 일도 있다. 전제 개혁의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는 중립적인 태도를 견제했다. 신구 어떤 세력에도 특수한 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5罪’ 議定 선언이 있었던 후, 이성계파가 왕명에 따르지 않고 구 신하의 처단을 강요하는 지나친 태도에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이성계파에 대한 반발로 적대적인 상태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5罪’ 라는 것은 무엇인가? 공양왕 3년 1391년 5월 私田 개혁을 시행했다. 이것은 이성계 일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으로 신구 양파의 대립은 드디어 격화되고 복잡해졌다. 왕은 困憊(괴롭고 고달픈) 나머지 6월에 각의에서 상소와 강한 발언을 금지하도록 이성계에 간청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고 분개한 나머지 직을 내 던지고 동북 지방으로 은퇴할 결심을 내비쳤다. 이때 이성계파가 구파를 공격하는 최대의 죄목은, 1. 창왕 옹립에 진력한 점 2 .우왕 복위를 꾀한 점 3. 尹 彝, 李 初를 명에 파견하고 국내 출병을 요청한 점 4. 그 사건에 연좌해 金宗衍의 역모를 내응한 점 5. 선왕의 손자(益富)를 陰養해 不軌(반역을 꿰함)를 모의한 점 이것이 5죄였다. 공양왕은 같은 해 7월 정몽주의 주장이 가장 옳고 온당했기 때문에, 그 발언에 따라 분규한 문제의 최종 결론을 단행했다. 즉, 이미 죽은 曺敏修, 邊安烈 일가를 적멸하고 池湧奇, 朴可興은 ‘依舊付處’, 禹仁烈, 王安德, 朴藏은 ‘外方從便’ 그 외에는 모두 ‘京外從便’이라고 하는 行刑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차후 이 문제를 더 논의하는 것은 무고죄에 처한다고 부가 결정되었다. 여기서 어쩔 수 없는 疏隔이 이성계파와 몽주 사이에 구축되었다.
공양왕 3년 1391년 3월, 세자 奭이 명에서 귀국하게 되어 이성계가 黃州로 맞이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海州에서 사냥을 하던 성계는 말해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정몽주 일파는 이것은 하늘이 내린 다행한 일리라며 일거에 이성계 세력을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우선 左散騎常侍 金震陽이 右常侍 李擴 등과 더불어 왕에게 疏하고, ‘이성계의 복심인 趙浚. 鄭道傳, 南誾, 尹紹宗, 南在, 趙璞 등이 조언해 國亂을 선동하고 있다’라고 탄핵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달 초 이들을 멀리 유배시켰다. (역사 연표로는 1392년 3월 무렵)
이성계 일파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李芳遠(이 왕조 태종) 이라는 자가 꽤 날카로운 선견이 있는 남자로 이 사태를 뚫고 반대로 정몽주 일파를 격멸시킬 기회를 노렸다. 화가 도리어 복이 된 것이다.
방언은 아버지 성계를 벽란도에서 맞이해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알렸다. 밤낮으로 달려 개성으로 돌아간 성계는 방원 등의 정몽주 殺誅 계획을 듣고 아연실색했으나, 긴말하지 않았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다. “우리가 왕실에 충절을 다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다. 지금 몽주로 인해 위기에 빠져 불충의 오명을 뒤집어써서는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해 줄까”라고 방원, 芳果(성계의 둘째 아들로 이 왕조 定宗), 趙英珪 등의 이성계파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 해 4월 정몽주는 정보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이런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이방원으로부터의 초대도 있고 성계 문안을 겸해서 이성계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酒宴에 참석해 그는,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無也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歟”라는 노래를 지었다. 방원 일행이 권하는 대로 그 자리에서 만든 것이다. 이 노래가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이 단심가에 놀라 방언 일행은 몽주 살해를 즉각 결행하기로 했다.
몽주는 이성계 저택을 떠나며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 다다랐을 무렵, 조영규가 이끄는 呂敷의 손에 의해 擊殺되었다.(呂敷는 風呂敷의 형태로 보자기로 해석하는 단어로 呂敷 단독으로 쓰이는 단어는 없다. 무엇을 상징하는 표현인지 알 수 없음) 말에서 떨어진 그는 선죽교 한가운데서 숨이 멎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도 반점이 남아 있다는 사람도 있고 피 밴 吳竹이 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충신의 충절을 칭송하는 것이다.
몽주가 죽은 뒤 왕조는 일변했다. 몽주파로 보이는 偰長壽, 李茂, 禹玄寶 등 수십 명이 유형에 처하고, 유죄였던 이성계파들은 모두 소생했다. 이성계파에 반대를 주장하는 자가 있을 리 없다. 王氏라고 해도 무용의 장물에 불과하다. 성계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세력이다. 그러나 역사서에 따르면 ‘이때부터 李党(黨을 오랑캐 당 자로 씀)의 專橫 縱恣하고 그 언론이 黑白 正邪를 뒤집고 지록위마가 심해졌고, 지금 大司憲 閔開의 상소를 보는데 수개월 만에 왕씨를 대신한 성계를 칭하여 秉心忠直이라 하고, 왕씨를 위해 일신을 희생하고 사직 옹호의 임무를 맡아 精忠赫赫하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몽주를 가리켜, 欲以專權, 自恣植黨謀亂, 萬一得成其計, 專擅國柄, 則不唯濁亂朝廷, 必將傾危社稷, 禍在不測(권력을 독점하려 하여, 제멋대로 당파를 심고 난을 도모하니, 만일 그 계책이 이루어져 나라의 정권을 마음대로 전횡하게 된다면, 조정을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직을 기울고 위태롭게 할 것이며, 그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뒤집힌 것은 과연 어떻게 된 것이냐? 만일 성계를 가리키는 말로 몽주를 평하고 몽주를 칭하는 말로 성계를 평한다면 그것이 당연한 이치에 가깝다.’라고 하여 顚末이 轉倒된 것을 지적하고 이성계 일파의 비리를 매우 비판하고 있다.
몽주가 죽은 날은 4월 4일로 향년 56세인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사후 4개월 만인 7월에 고려 왕조는 종언을 맞이했다. 이조 太宗(1401~1418) 때 개성 선죽교에 비석을 세우고 그의 충절을 기렸다. 영의정을 추증하고 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종은 누구인가? 몽주를 살해한 장본인 이방원이다. 역사는 알 수 없는 존재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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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ng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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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를 ‘충신’으로만 기억해 왔는데, 이 글을 읽고 보니 그는 단순한 절의의 상징이 아니라 고려 말 국제정세를 헤쳐 나간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특히 명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국익을 위해 활동한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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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mran
9
흥미로운 점은 일본 잡지가 해방 이후 정몽주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와 닮은 부분도 있지만, 일본 학계와 출판계가 고려 말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엿볼 수 있어 사료 자체로도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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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주
7
이 글은 정몽주 개인보다도 고려 말 사회의 혼란상을 잘 보여줍니다. 친원·친명 갈등, 토지개혁, 왜구 침입, 불교와 성리학의 대립까지 오늘날의 정치적 갈등과도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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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73
6
정몽주를 둘러싼 평가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고려의 충신, 조선의 충절의 상징, 근대 민족주의의 인물, 그리고 일본 잡지 속 역사 인물까지. 결국 역사 인물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 속에서 계속 재해석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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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soo88
6
마지막 대목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이 훗날 그의 충절을 기리고 비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권력과 역사 서술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역사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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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xie
4
"역사는 공격하고 빼앗고 연구하고 교육으로 완성되는 인류 최고의 희화화 작업"이라는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는 역사 상식도 누가 기록하고 해석했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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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a
4
이 글을 읽으며 가장 눈에 띈 것은 정몽주의 일본 사행 기록입니다. 왜구 문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음에도 대화를 통해 포로 송환과 교류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는 군사보다 외교의 힘을 믿었던 인물로 보입니다. 오늘날 한일관계를 생각해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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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4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를 단순히 ‘충신 대 역성혁명가’로 이해했던 기존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다가 마지막 순간 국가의 미래를 보는 관점이 갈라지면서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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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道
2
글 전반에 흐르는 일본 저자의 시선은 분명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동시에 외부자의 눈으로 본 고려 말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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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o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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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에서의 죽음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그 장면보다도 정몽주가 살아온 30년 가까운 정치·외교 활동이 더 크게 보입니다. 한 편의 단심가로 기억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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