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이 대단한 사람처럼 그려진 학술적 이력은 식민지 지배 이념의 학문적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서울대학교의 구조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
회고回顧/懷古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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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古160. 유홍준, 노회한 엘리트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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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22
공사를 망각한 특권 의식의 간섭(干涉)
한 제자가 스승을 잃었다. 유홍준이 입신출세하면서 고용 중이던 직원의 손을 놨고 한 집안의 가장이 실직자가 되었다. 스승이 없는 나라 한국의 전형적인 상명하복 인문학 풍토에서 연구자가 맞게 되는 운명이다. 누구도 제자를 키우지 않고, 아무도 제자가 되려 하지 않는 이 땅에 좋다고 외국인 유학생들이 몰려들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한국인끼리는 저주와 악담, 시샘과 투기를 감추지 않아도 외국인이라면 온정을 베푸는 못된 사대주의, 너무나 깊게 각인되어 노예근성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다.
차라리 외국인을 조교로 쓸망정, 한국인이 한국인 제자를 내지 않는 습성, 내 자식이나 내가 연구비를 타지 못한다면 남한테는 절대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 유홍준은 아마도 이런 학계의 모든 관행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않을까. 더구나 그의 전공이 미술사니 미술품의 가치는 평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해석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매겨지기 쉽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미술품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장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여러 경로로 과거의 상흔을 안고 있는 유물에 가까이 있어 그 입수가 쉬웠던바, 국중박에 걸린 전시품, 제주 추사관에 걸린 전시품, 진품이면 진품이라 어깨가 으쓱하고 레프리카여도 기증품, 개인소장품이라는 데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유홍준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마이크를 잡으면 내려놓지 않는다는 소문으로 유명하다. 석박사 학생도 조수도 무시하고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지식 자랑이 끝이 없다고 한다. 학자의 겸양을 자기 소양으로 키운 적 없는 탓이겠지만, 겸손할 필요성을 느끼며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띄운 방송국도 반성해야 할 집단이다. 유행되고 돈이 된다면 개돼지처럼 달라붙는 풍토, 주체적이지 못한 한국인이 유홍준에 투과해 얻으려는 문화 정체성은 식민사관 인재를 양성하는 서울대학교에서 출신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로 출세 가도를 걸었지만, 전부가 자기 글은 아니라고 하는 소문이 있으니 화가처럼 밑글을 써 준 작가가 있어도 되는 일인지 알아보면 좋겠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것은 문화시민인 줄 착각하는 한국인에 대한 대국민 기만행위이며,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이명박·윤석열 밑에서 문체부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한 유인촌이 동성애자라는 소리와 비슷한 반 지성적 수준의 질투심에서 나온 음모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왜 정치·문화·예술이 하나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생각은 제도가 되고, 제도는 정치와 사회의 작동 방식을 빚으며, 그 속에서 서책과 생활용품을 비롯한 유형의 산물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손에 쥐고 쓰며 닳게 한 물건에는 당대의 삶과 희로애락이 쌓이고, 그중 일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과거에 태어나 살다 간 이들을 우리의 조상이라 부른다면, 그들의 삶이 담긴 서책과 생활용품, 예술품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흩어지고 사라졌는지부터 조명해야 잃어버린 역사, 왜곡 당한 역사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미술과 미술사를 다루는 이들이 기득권의 세력 확장에 편승해 이러한 본질적 물음을 회피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공직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책임감을 갖춘 이들이 설 자리는 좁아지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현실에도 문화계가 비판과 자성을 외면한다면, 그 침묵 역시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그는 부인과 외유 중이었다. 오세훈도 서울 시장으로 부인 동반 외유가 있었지만, 언론이 문제 삼지 않았고 서울시민들은 부동산 신고가 갱신을 위해 외면했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이 사퇴로 마무리된 것은 당시 국민의 정치 정서가 거의 밑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의 부부동반 해외 출장 경비는 어떤 원칙으로 운영되는지 기준이 필요하다. 신상필벌이 불확실하고 논공행상에 원칙이 있다면 유야무야하는 세금 착복은 하지 못하게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기업의 고액 연봉자 중에서 포상 휴가로 부부동반 경비가 제공되기도 하지만, 부인이 비행기 삯만 내고 동반 투숙해도 꽤 직급이 높고 회사에 기여도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다하지 않게 된 습성도 식민지와 전쟁이 낳은 물질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한 것이지만, 이제는 문화의 깊이 없이 얕은수로 흥행만 노리는 이 생태계 자체를 의심하고 자성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나고 보니 노무현은 애국자였고 좋은 지도자였지만, 문재인이라는 악인을 측근으로 둔 사나운 팔자로 각인되어버렸다. 그의 비극은 개인의 불행만으로 볼 수 없다. 국가 지도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적대는 강력한 문명의 충돌과 그 여파로 튕겨 나온 한국인 세계의 비극적 풍조라고 본다. 성찰하는 보수가 없고, 능력 있는 진보가 없는 정치판에서 유홍준은 미꾸라지 반기문처럼 논란과 책임의 틈을 능숙하게 빠져나간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섬기던 대통령의 묘역 조성에 관여했다는 점 역시 불편한 질문으로 남는다. 문재인, 유홍준, 승효상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그 공간은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 기억하려는 국민의 염원을 얼마나 충실히 담아냈는가.
과연 한국에서 자주파 대통령은 정치적 생존과 생물학적 안위까지 위협받으며, 지도자와 국민 모두 생명과 존엄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회로 고착한 것일까. 이제 한국 사회는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 문제, 밥상 전시 기획한 국중박 유홍준이 기이한 노무현 묘지 조성에 관여했고 밥 한 끼도 나라의 은혜라고 개인소장품을 전시한 행동의 아이러니로 촉발된 일이다. 원래 이 글의 유래는 임진왜란 승병장 기허(騎虛) 영규(靈圭) 대사(?~1592)가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승병을 모집할 때 구호로 추정된다. 1592년 선조실록 25년 8월 26일, 왕실 종친 호성감(湖城監) 이주(李柱)가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으로, ‘有僧擧義於忠淸曰, 一飯皆是國恩’(어떤 중이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다”라고 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했다.
한자도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위작을 논하니, ‘밥 한 끼도 나라의 은혜’를 주장할 정도의 신념 친일파 박중양이 썼다고 결론지은 과정도 투명하지는 않다. 항일 운동가 박원근(朴源根, 1912~1950) 지사의 글씨·유묵과 비교 대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과적으로는 유홍준이 항일 지사의 글로 알고 수집했다고 해도 동명이인 박원근 지사만 후대에 모욕적인 대접을 받은 셈이 되었다. 유홍준은 사퇴했어도 자신의 소장품 입수 경로를 밝히면 좋겠다.
(좌)朝鮮時報 1923년 6월 22일 1면 쇄신기념호 박중양 축하 글, (우)국중박의 전시에 걸린 문제의 유홍준 소장품
박중양의 글은 생각보다 달필이지만, 그가 해방 후 일본에 보낸 엽서 글체로 보아 박중양이 사용했다는 박원근이라는 이름의 ‘一飯是國恩’이 박중양 서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그만큼 서체가 다양하다는 의미인데 한문을 읽고 쓰는 해독력이 현저하게 낮은 현대 대한민국의 한문 생태계에서 과연 위작을 논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누가 미술 시장에서 유홍준에게 작품을 건네고 가격을 정하고 거래되는지 수상하다. 식민지는 전통의 모든 것, 사상 철학 제도의 무형적 가치와 유형의 삶을 돕던 생활 도구들을 모두 파괴하고 문화유산은 장물로 전락했으니, 고미술은 장물 거래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다.
박중양이 6.25 전쟁 중에 일본의 지인에 보낸 엽서, 누구에게는 전쟁, 누구에게는 식민지 잔재 청소로 천하태평이었던 듯 하다.
국민이 원하는 문화 부국 정서와 무관한 유홍준의 행보가 여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다가 위작(?) 소장품 문제로 국감에서 질타를 받고 사퇴에 이른 현재, 과연 무엇이 논점인가. 친일파 글씨를 항일 지사 글씨로 알고 소장한 게 문제인가. 국중박을 사적 인지도 상승을 위한 기회로 이용해 전시에 개인소장품을 낸 게 문제인가. 친일파 글씨가 아니라면, 또는 친일파 글씨라면 그 자체가 어떻게 문제인가. 이 땅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과 피가 섞인 혼혈아들이 수 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독점하고 있는데 유홍준 하나만 정리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유홍준의 자녀들은 부친의 예술품 리스트가 나돌면 상속세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미술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고부가가치 상품화되는 이상, 작품의 진위 논란은 일파만파로 퍼질 수 있다.
유홍준은 예술을 아는 학자로 공직에 올라 부귀영화를 얻었고 끝내 이재명 선거 캠프에 늙크크로 있어 청문회를 피할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자리를 얻어냈을지 모르나,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마땅한 인사도 없는 미술사학계에서 혼자 독식할 수 있는 무대라고 판단이 섰기에 도전한 모양이지만, 그는 진정 노회한 학자다. 과연 그를 젊은이들이 그 분야 인생의 롤모델로 삼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박물관·미술관에서 일할 꿈을 키운다면 유홍준의 출세 이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넘쳐나는 각종 기념관의 일자리가 얼마나 투명하고 깨끗하게 채용되는지 그 시스템과 구조의 문제는 심연의 늪에 빠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기관에 입점하는 편의점이나 카페조차 특혜 시비가 따른다.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이라는 언론 기사, 부끄럽다.
저작권 시비를 피해 온 위력 너머
제주도에 가면 추사 기념관이 있다. 과연 특혜 없이 그 기념관이 생겼을지 의문이다. 근본은 없어도 유홍준의 소장을 더러 볼 수 있는 이상한 곳에 기념관을 건설하느라 들인 토지 구입 예산과 전시관 설계와 건축 비용, 큐레이터(채용의 투명성 포함)의 전문성 등이 어떻게 보장된 것인지 궁금하다. 대한민국 문화재 및 미술사가의 리더격인 유홍준이 이 정도 수준이니, 내리 지자체 예산으로 기념관·박물관 만드는 게 일종의 관행이자, 관련 퇴직 공직자의 호구책을 위한 큰 사업이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교민들까지 가세한 국고 털기 예술 사업은 과거 인물의 시대적 고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알량한 상식으로 문화의 질적 저하와 유산의 가치를 훼손하며 세금 낭비로 인한 국력의 소모가 크다.
다산 사 형제 생전의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정조 17년 1793년 10월 26일 실록 기사에는 영국의 사절단 수장 조지 매카트니(Lord Macartney, 1737~1806) 백작이 건륭제(乾隆帝, 1711~1799)를 만나고 광동(廣東)으로 내려가 총독을 만나기 전, 조선의 역관 홍택복(洪宅福, 1749~?)이 작성한 영국 사절단의 선물 목록을 의주 부윤 이의직(李義直, 생몰년 미상)이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있다. 이 보고가 있고 7년 후 정조는 사망한다. 이 기사는 조선 멸망의 직접적 원인을 놓고 볼 때 시사점이 많은 자료다. 이 기사가 누락 되지 않고 실록에 남아 있는 건 천운일지 의도적일지 모르겠다. 천주교 신앙이 국가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되면서 발생한 여러 비극의 한가운데 다산 가문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의 손을 타 변질한 1차 사료라는 가정이 가능해질 때, 매카트니도 다산 가문도 정조도 다시 연구될 것이고, 유홍준의 세계관은 땅에 떨어져 비루함을 역사에 남길 것이다.
Lord Macartney Embassy To China 1793
(좌) George Macartney, 1st Earl Macartney, 1790, (우) George Macartney, 1st Earl Macartney, 1796
National Portrait Gallery
서울대 미학과 학사(80년) 졸업,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의 생애와 예술」 83년) 학위, 「朝鮮後期 畵論 硏究: 傳神論과 事實論을 중심으로」로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 학위(97년)를 땄다. 유홍준이 박사 학위를 받은 조선 후기 화론(畫論)은, 동진의 회화 이론가 고개지(顧愷之, 344?~405?)의 이형사신(以形寫神)이라는 고전적 회화 원리를 조선 후기 회화에 접목한 것이다. 이형사신은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되, 단순히 외형을 닮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의 정신과 내면적 진실까지 드러낸다는 주장인데 원래 인물화의 전신(傳神), 즉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준말로,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초상화론에서 왔다.
그런데 미술사학은 태생적 한계를 난해함으로 감추는 가식적 학문으로, 세계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과 학살·수탈의 역사를 희석하거나 은폐하는 데 시녀역할을 해온 측면이 있다. 엄밀히 따지면 학문으로서의 가치마저 의심되는 대목이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이 만든 유형무형의 미술품의 순수성을 외면한 채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본말전도의 지엽말단주의, 즉 ‘Misguided Pedantry(방향 잃은 현학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현학(衒學)이 도를 넘어 학문적 성찰이나 자기비판조차 없이 관성적으로 굴러가는 형국이랄까. 학문이 진실을 규명하기보다 스스로 구축한 권위와 형식을 유지하는 데 몰두하면서,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고 지엽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셈이다. 고유섭, 최완수, 이태호를 거쳐 유홍준이 그 정점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연구사만 제대로 훑어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학계의 자성이 벌써 나왔어야 했다.
유홍준이 대단한 사람처럼 그려진 학술적 이력은 식민지 지배 이념의 학문적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서울대학교의 구조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 논리에 따라 재단하고, 다지고, 걸러낸 학문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계통 안에서 선별된 알맹이 없는 자료만을 지식의 토대로 삼아 실력과 가치관을 형성해왔다. 결국, 식민지 학문이 설정한 외통수에 갇혀 사고의 폭과 비판적 안목마저 제한되는, 일차원적 지식의 불행한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성공과 출세로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한국인의 상식선에서 그려지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작 백 년? 천만에.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왜곡의 수법은 일본을 아시아의 패자로 그려내는 데 동원되었다.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제국주의적 팽창의 논리로 내세워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려 했던 야욕은 침략 전쟁을 통해 드러났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부합하는 인재를 길러내던 학교에서 접한 연구 자료를 아무런 선별과 가공도 거치지 않은 원자료로 믿는다면, 그 순진함은 스스로 지적 엘리트로 여기는 우월 의식과 모순된다.
여기에 전쟁과 식민지로 호연지기 유전자가 사라진 한국인은 아집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나이브한 성정으로 변했고 역사와 미술사를 양극단의 지식체계로 이원화해서 전수한 식민사관의 배양실 연구가 전부인 줄 착각하는 가치가 통용되고 그 단편적 지식이 출세와 성공의 면허처럼 되어 버렸다. 한국 미술사학계는 그렇게 일본이 주도한 역사 왜곡의 기능적 도구 역할로 성장했고, 그 특혜 또한 뿌리 깊다. 대한민국 미술 연구 역사가 식민지 제도에 따른 식민지 인물 양성으로 시작했던 과거사를 잊은 채로는 망각의 전모를 파헤칠 실력이 늘지 않는다.
유홍준을 비판하는 너는 뭐냐고 물을 수 있다. ‘줄리’할 시간이 없는 바쁜 누군가를 위해 대신 학위논문을 써주고 통과되어 학위를 부여하는 대한민국의 대학은 모두 없어져도 된다고 믿는 사람으로, 글자 한 자를 찾느라 하루를 공들이는 천학비재의 둔자다. 대한민국은 그 이전의 역사를 지우고 날조한 일제가 만든 학문의 가치에 매몰되는 한 성장하기 어렵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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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h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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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을 다루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명성이나 권위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 앞에서의 겸손과 책임감입니다. 개인의 소장품이 공공 전시에 활용됐다면 입수 경위와 진위 감정 과정부터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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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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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잔재 청산은 친일 인물 몇 명을 비판한다고 완성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남긴 자료를 누가 수집하고 해석하며 어떤 기준으로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지까지 살펴야 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학문적 틀을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다면 독립 이후에도 정신적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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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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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국민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가치를 판단하는 권한과 정보가 소수의 전문가에게 집중돼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홍준을 둘러싼 논란도 개인의 유명세로 덮을 일이 아닙니다. 공공기관은 누구의 소장품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냐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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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ghy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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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은 개인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보존하고 해석해야 할 역사적 자산입니다. 특히 공공 박물관의 전시에 개인 소장품을 활용했다면 작품의 진위와 출처, 전시 선정 기준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이 뒤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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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72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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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란을 한 사람의 거취로 끝낼 것이 아니라 문화계의 권력 구조와 검증 시스템 전반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는 자료 자체를 검증하는 주체적인 역사 연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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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j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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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은 감정이나 추측이 아니라 자료 공개와 독립적인 검증으로 해소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지키는 길입니다. 유명 학자의 이름값보다 연구의 독창성과 검증 가능성을 우선하고, 젊은 연구자들이 공정하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학문 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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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준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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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진정한 유산은 자신이 차지한 자리나 대중적 명성이 아니라 후학에게 남긴 지식과 학문적 양심입니다. 작품의 진위와 소장 경위에 의문이 제기됐다면 변명이나 침묵보다 객관적인 자료로 해명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문화유산을 말하는 사람부터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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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orp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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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지식을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지식을 나누고 연구자를 키우는 사람에 의해 발전합니다. 스승은 많아도 제자가 성장하기 어렵고, 연구 성과와 정보가 특정 인맥 안에서만 유통된다면 학계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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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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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을 다루는 학자라면 명성보다 진실을, 권위보다 책임을 앞세워야 합니다. 개인 소장품을 국립박물관 전시에 내놓았다면 작품의 진위와 입수 경위부터 투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평생 쌓은 학문적 명성도 검증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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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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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장이 취임할 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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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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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장이 취임할 때부터 노욕이라는 업계 얘기가 많았습니다. 청장과 관장의 직함을 가진 분이 주변인들로부터 노뇩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본인에게 꽤 모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관장은 이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조용한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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