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전, 오래 알고 지낸 홍 박사와 문자로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시작된 이야기다. 간통죄가 사라져 감옥에 보낼 수 없다면 세금이라도 물리자는 농담이 오가고 둘 다 허탈해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 남은 질문은 가볍지 않았다. 혼인 제도 밖 남녀상열지사의 관계성은 왜 점점 더 계층의 문제가 되는가. 우리는 이것을 반쯤 장난삼아 ‘첩질’이라고 부리지만, 그것이 현대 한국 사회와 경제의 한 축을 장악한 역사이자 문화가 되어버린 현실에 섬찟했다. 이 글이 공개한 사례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보기 위한 창으로 쓴다.
조선의 축첩은 족보(族譜)와 적서(嫡庶)의 질서 안에 공식적인 자리를 갖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첩질’은 어떤 제도에도 등록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돈과 지위, 그리고 스마트폰 속의 비밀 대화방이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재력과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경제적·사회적 이익이 오간다는 구조는 놀랄 만큼 닮아있다. 여기에 더해 재력은 동성(同性)의 성(性)도 좌우하는 세상이니, 무능한 ‘박근혜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간통죄 폐지는 알고 보면 헬 조선의 게이트를 오픈한 것이었다.
이 글은 세 가지를 따라간다. 막스 베버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2015년 간통죄 폐지와 2004년 성매매특별법, 그리고 정보기술의 발전은 한국의 혼인 시장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 변화가 도덕의 쇠퇴라면 국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지막 물음 앞에서 떠오르는 것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오래된 질문이다. 학문과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도덕을 개선했는가. 루소는 정치와 철학을 직업으로 이론화했어도 현실에서 하녀 테레즈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 5명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인물이다. 한국이 근대화 과정에 서양 문명에 코를 담고 빨아들였던 데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삶과 정치가 있었지만, 과도하게 서양 문명을 빨아들이느라, 서양의 ‘인간 기만(Deception of humanity)’을 성찰하지 못했었다.
성은 생물학이고, 결혼은 사회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성적 결합과 혼인을 분명히 구분한다. 남녀의 결합 자체는 생물학적 사실이지만, 그것이 혼인이 되려면 친족 집단과 신분 공동체가 그 관계를 정당한 것으로 승인해야 한다. 혼인의 핵심은 침실이 아니라 승인이다. 누구의 자식이 상속권을 갖는지, 누가 가문의 이름을 잇는지, 재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정하는 사회적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회는 정실 혼인 바깥에 덜 정당한 결합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두었다. 첩, 내연, 부차적 배우자가 그것이다. 성적 관계는 허용하되, 상속과 신분의 질서는 흐트러뜨리지 않는 장치였다. 축첩은 도덕의 일탈이라기보다, 신분 질서가 성욕과 타협한 제도적 형식이었다.
베버는 결혼을 신분 집단의 경계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보았다. 같은 신분끼리만 혼인하는 동질혼의 규범은 신분 집단을 닫힌 집단으로 만든다. 여기서 비대칭이 생긴다.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신분의 남성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이른바 상향혼이다. 아래로 시집가는 것은 가문에 먹칠하는 일이었고, 당사자에게도 사회적 강등을 뜻했다. 이 규범을 끝까지 밀고 가면 결과는 분명하다. 최상층 여성의 배우자 풀은 극도로 좁아지고, 최상층 남성은 같은 신분은 물론 아래 신분의 여성과도 결합할 수 있다. 후보는 상층 남성에게 몰리고, 상층 여성은 결혼 시장에서 고립된다. 홍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여성은 구조적으로 일부다처제의 함정에 빠진다.
베버가 이 함정의 극단으로 든 것이 벵골의 ‘쿨린 브라만(Kulin Brahmin)’이다. 최상층 쿨린 가문의 딸은 같은 쿨린 남성과만 혼인할 수 있었으므로, 혼기를 놓칠 위기에 처한 여성이 넘쳤다. 그러자 일부 쿨린 남성이 수십 명의 여성과 형식적으로 혼인하고, 신부 집안에서 지참금과 사례를 받은 뒤, 각지를 돌며 이따금 아내들의 집을 찾아가는 관행이 생겼다. 혼인은 신분을 지키기 위한 서류가 되었고, 부부 생활은 순회 방문이 되었다. 베버는 상향혼 규범이 지참금 폭등과 일부 지역의 여아 살해로도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현상을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신분 질서가 만든 규범과 이해관계였다. 아래로 혼인하면 가문 전체가 신분을 잃는 체제가 결국에는 상향혼을 강제했다는 것이다. 본능이라면 처방이 없지만, 구조라면 처방이 있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벵골의 이야기가 오늘의 서울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서 법적 신분제는 식민지 제도와 함께 사라졌지만, 학력과 직업과 자산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위계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결혼 시장에서의 상향혼 성향도 끈질기게 남아 있다. 고학력 중산층 여성은 대학을 마치고 전문직이나 대기업에서 일하며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어 결혼이 여성의 생존의 조건이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은 여전히 자신과 같거나 더 나은 조건의 남성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남성을 따라잡고 일부 연령대에서 남성을 앞지르면서, 그 기준을 충족하는 남성의 수는 상대적으로 줄었다. 베버가 묘사한 최상층 여성의 고립이 고학력 중산층 전반으로 넓어진 셈이다.
동질혼의 발전상은 대한민국 연예계에서도 볼 수 있는데, 한국의 연예계는 군사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권력의 성 접대 창구이자, 국면 전환용 대중문화 통제 수단이었다. 그 기이하고도 억압적인 식민지 잔재는 쉽게 청산되지 않고 방송가는 본질에서 보수, 일부 영화계만 좌익인 기이한 현상을 낳았다. 저 롯데 신격호의 첩으로 시작해 큰돈을 굴린다고 알려지는 서미경의 신분 상승 사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 연예인들은 자신들이 상류층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들끼리 결혼하며 권력을 공고히 한다. 의사는 의사들끼리, 변호사는 변호사들끼리, 재벌은 엄청나게 높은 벽을 쌓아 놓고 자기들끼리 결혼한다. 이 점에서 이미 한국은 조선 시대 버금가는 계급사회다. 이것을 정치나 언론이 언제까지 눈가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계급 사회학 저변에 깔린 신분 상승 욕구로 볼 때, 결혼은 계급 정치에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다.
적법한 결혼과 임신 출산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조건과 환경을 찾아, 아이를 버리고 이혼하는 사례가 민간에 없지 않은 현실이 바로 한국인이 지향하는 신분 상승 욕망이 본능을 뛰어넘는 에너지로 사회 저변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안 되는 머리지만,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결정사 사이트에 들어가면 누구나 자기 나이와 키 학벌 재산 부모 재산까지 넣고 점수를 얻는다. 수치화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조선 봉건주의 사회보다 더 계급적이고 더 악랄한 계급주의 사화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압력은 세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비혼이다. 자신보다 못한 조건과 결혼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느니 혼자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경우, 둘째는 이혼 후의 경제적 독립이다. 이 두 경우, 생물학적으로 성적 쾌감을 아는 여성이 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수녀처럼 살기 쉽지 않기에 여러 부작용이 발생한다. 일부일처제가 인간 사회에 가장 미덕인 이유를 가장 철저하게 마지막까지 실천하던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을 통하며 그 제도와 산물인 혼인 외 정사(情事)를 암묵적으로 인정해버렸으니, 우리의 생물학적 도태는 100년 후쯤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제력을 갖춘 여성에게 이혼은 더는 몰락이 아니다. 세 번째가 이 글의 주제다. 혼인이라는 공식 계약은 맺지 않되, 이미 결혼한 상층 남성과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다. 법적 아내의 자리는 없지만,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네트워크, 때로는 지위 자체가 주어진다. 우리가 ‘모던 첩질(Modern-Day Concubinage)’이라 부른 것이 이것이다. 조선의 첩과 다른 점은, 강요의 형식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선택의 외양을 띤다는 것이다. 결국, 동물성 욕구와 이성적 산수가 복합적으로 보여도, 인간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시 문화임은 틀림없어 내연 관계로 출생한 천재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가능성은 작아진다.
이 구조를 한국 사회 전체가 목격하게 만든 사례가 있다. 2015년 12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동거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과의 관계와 혼외자의 존재를 스스로 밝히고 이혼 의사를 세상에 공표하면서다. 일반인이라면 이런 배짱을 튕길 수 없지만, 그는 내밀한 사적 관계를 공적 관계로 격상시켜 버렸으나, 김희영의 밑에서 월급을 받는 자들의 자괴감은 공동 정체성 유지밖에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돈이면 다 해결되는데, 돈 말고도 필요한 게 바로 이 혼외정사의 사회사다.
조강지처,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소송은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혼과 위자료 20억 원은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재산분할은 항소심의 1조 3,808억 원이 파기 환송된 뒤, 2026년 7월 파기환송심에서 9,440억 원으로 다시 정해졌다. 노 관장이 김희영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도 법원은 부정행위와 혼외자 출산, 공개적 행보가 혼인 파탄의 책임에 해당한다고 보았고, 위자료 20억 원을 최 회장과 공동으로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2024년 항소 포기로 확정되었다. 새로 20억 원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인정된 위자료를 두 사람이 함께 지라는 취지였다.
이 사례가 상징적인 이유는 사생활 때문이 아니다. 간통죄가 사라진 뒤 한국 최상층에서 혼외 관계가 어떤 법적 결과를 낳는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형사처분은 없고, 남는 것은 민사상 위자료다. 그 위자료조차 재계 최상층의 자산 규모에 비추면 상징에 가깝다. 혼외 관계의 가격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매겨진 셈이다. 재산분할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혼인 중 형성된 재산의 청산이지, 혼외 관계 자체에 붙는 벌금이 아니다.
같은 구조의 반대편에는 저소득층 남성이 있다. 상층 남성이 여러 여성의 관심과 시간을 독점할 수 있다면, 결혼 시장 아래쪽의 남성에게 돌아갈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한국의 여러 조사는 남성의 소득과 고용 안정성이 낮을수록 미혼 비율이 뚜렷하게 높다는 점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홍 박사와 나는 이를 반쯤 자조적으로 가혹한 동물적 상황이라 불렀다. 소수의 우세한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독점하고, 나머지 수컷은 번식에서 밀려나는 구조와 닮았다는 뜻이다.
인류가 일부일처제를 사회 제도로 정착시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을 떠올리면, 지금 벌어지는 일은 문명의 한 장치가 조용히 풀리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유권자의 선택이 박근혜로 기울어진 역사가 참 역사였는지는 세월이 더 가봐야 알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한국인의 질량적 도태는 심각하게 표출되었고 고삐 풀린 망아지는 구제할 방법이 없이 유전자를 잠식하면서 기이한 풍습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시장의 규칙을 다시 쓴 것은 두 개의 법이었다. 2015년 2월 26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7 대 2로 형법의 간통죄 조항을 위헌으로 결정했다. 위헌 의견의 결은 같지 않았으나 결론은 분명했다. 혼인과 성에 관한 인식이 바뀌었고,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에 국가 형벌권이 들어가는 것은 과잉이라는 것이었다. 침실은 국가가 들어올 곳이 아니다. 그러나 법은 금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도 매긴다. 간통죄가 살아 있던 시절, 혼외 관계에는 징역형이라는 극단적인 비용이 붙어 있었다. 잃을 것이 많은 상층 남성에게 그 위험은 특히 컸다. 위헌 결정 이후 그 비용은 민사상 위자료로 바뀌었다. 감옥이 사라지고 청구서만 남았다. 청구서는 부유한 사람에게 가장 가볍다. 반대 방향의 법도 비슷한 결과에 손을 보탰다.
2004년 9월 시행된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집창촌을 해체하고 성 구매를 강하게 처벌하는 체계를 세웠다. 취지는 성 착취를 줄이고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시장은 금지 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꾼다. 노골적인 현금 거래가 단속 대상이 되자, 돈과 성의 교환은 관계의 형식으로 옮겨 갔다. 스폰서, 장기 후원, 생활비 지원 같은 모호한 이름들이다. 일회적 성매매는 처벌되지만,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오가는 생활비와 명품, 주거와 사업 기회는 성매매로 입증하기 어렵다. 성매매특별법은 하층의 거래를 위험하게 만들고, 상층의 거래를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만들었다. 현금을 내고 하룻밤을 사는 남성은 범죄자가 되지만, 아파트와 법인 직함을 제공하는 남성은 연인이 된다.
두 법을 겹쳐 놓으면 그림이 선명해진다. 간통죄 폐지는 상층 남성의 혼외 관계에서 형사 위험을 걷어 냈다. 성매매특별법은 하층 남성의 성 구매를 범죄로 만들었다. 성과 친밀성에 대한 접근은 재력에 따라 더 가파르게 갈라졌다. 입법자들이 이런 결과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한쪽은 자유를 넓히려 했고, 다른 쪽은 착취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정책의 결과는 의도가 아니라 유인 구조가 결정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이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듯이, 자유와 보호를 위한 두 개의 법은 의도치 않게 새로운 축첩 시장의 규칙을 썼다.
법이 비용을 낮췄다면, 기술은 위험을 낮췄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혼외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물리적 비용이 들었다. 집 전화는 가족이 받을 수 있었고, 편지는 남았으며, 만남은 동네와 직장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다. 비밀은 비쌌고, 그래서 드물었다. 들킬 위험이 도덕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스마트폰은 그 울타리를 허물었다. 사라지는 메시지, 종단간 암호화된 메신저, 별도의 업무용 단말기, 생체 인증으로 잠긴 앱 폴더, 기록이 잘 남지 않는 결제, 숙박 앱과 차량 호출까지. 보안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들이 사생활의 은폐에 그대로 쓰인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나온다. 끼기만 하면 투명인간이 되는 반지를 얻은 목동은 왕비를 유혹하고 왕을 죽여 왕좌를 차지한다. 글라우콘은 묻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간이 정의로운 것은 정의 그 자체를 사랑해서인가, 아니면 들킬까 두려워서인가. 현대의 정보기술은 이 반지를 대량으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보이지 않을 수 있게 되자,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반대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위치 기록과 카드 내역이 혼외 관계를 드러내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은폐 쪽이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이가 이긴다는 점에서, 기술 역시 법과 마찬가지로 상층에 기울어 있다.
여기서 고전을 떠올리자.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더 도덕적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 루소의 첫 번째 논문이다. 1749년 여름, 서른일곱의 무명 음악가 루소는 뱅센 감옥에 갇힌 친구 디드로를 면회하러 걸어가고 있었다. 길에서 펼쳐 든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디종 아카데미(Académie de Dijon)의 현상 논문 공고가 실려 있었다. 주제는 이것이었다.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 그가 내놓은 대답은 시대의 상식을 거슬렀다. 아니다, 학문과 예술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을 타락시켰다. 지금, 개돼지도 예술을 하는 시대, 무엇을 향하는지 각자 떠올려 볼 일이다.
루소는 역사를 증인으로 세운다. 로마는 소박한 농민 군인의 나라였을 때 세계를 정복했고, 시인과 웅변가의 나라가 되었을 때 무너졌다. 반대로 스파르타는 학문 없이도 덕과 용기로 빛났다고 그는 말한다. 웅변가를 낳은 아테네와 영웅을 낳은 스파르타 중 어느 쪽이 훨씬 훌륭한가. 이 대목의 통찰이 가장 날카롭다. 문명은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더 정중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련된 예절은 진짜 마음을 가리는 기만적인 베일이 되었다. 예전에는 행동이 거칠어도 속마음이 드러났기에 서로를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모두가 같은 예법의 가면을 쓰고 있어,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다.
이어 루소는 학문의 출생을 고발한다. 천문학은 미신에서, 웅변술은 야심에서, 기하학은 탐욕에서, 물리학은 헛된 호기심에서, 도덕철학조차 오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학문은 악덕에서 태어나 다시 악덕을 키우고, 사치와 동행한다. 사치가 퍼지면 사람들은 덕이 아니라 재산으로 서로를 평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지식을 불태우자고 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 루소를 다시 읽으면 과장이 많다. 역사적 사례는 선별적이고, 스파르타에 대한 찬양은 그 사회가 노예 계급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러나 중심 직관은 더 날카롭게 들린다. 기술의 진보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지만, 그 능력을 무엇에 쓸지 결정해 주지 않는다. 능력이 생길수록, 도덕의 부담은 오히려 커진다. 루소가 말한 예절의 베일은 오늘 디지털의 베일이 되었다. 결혼식장에서의 서약과 사회관계망의 가족사진이 그 베일의 겉면이라면, 그 아래에는 암호화된 메신저와 이중의 생활이 흐른다. 정보기술은 우리를 더 연결했지만, 동시에 더 잘 숨을 수 있게 했다. 루소가 오늘 다시 디종(Dijon)의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아마 같은 대답을 더 확신에 차서 내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간통죄를 되살리자는 주장이 다시 수면 위로 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문명을 유지하겠다면 자기 면죄부로 인식될 수 있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뒤집어야 한다. 국가가 침실을 감시하는 시대라는 표현에 숨지 말고,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는 걸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홍 박사와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감옥에 보내고 천문학적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으면 최상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세금이라도 받자. 농담처럼 들리지만, 유럽에는 선례가 있다. 독일은 2002년 성매매법으로 성매매를 합법적 노동으로 인정했고, 그 소득은 소득세 대상이 되었다. 본 시는 2011년, 주차권 발매기처럼 생긴 기계로 하룻밤 6유로의 세금 징수로 시작해 화제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2000년 업소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허가제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성 노동자는 소득세와 사회보험료를 내고, 업소는 부가가치세를 낸다. 두 나라의 논리는 같다. 사회가 어떤 거래를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양지로 끌어내 과세하고 규율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 성매매가 불법(ㅎㅎ)인 나라이므로 이 모델을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세법에는 이미 쓸 수 있는 도구가 있다. 첫째는 증여세다. 혼인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 아파트와 자동차, 현금과 법인 지분을 넘겨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증여세 대상이다. 배우자 간 증여에는 상당한 공제가 있지만, 혼외 관계의 상대방에게는 그런 공제가 없다. 모던 축첩에 대한 과세는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 이미 법전에 있다. 문제는 집행이다. 생활비 명목의 지속적 지원, 법인 명의의 주택과 차량, 재단이나 계열사 직함을 통한 급여 같은 우회로가 많고, 과세 당국이 그것을 추적할 유인은 약하다.
그래서 현실적인 형태는 새 세목이 아니라 집행의 강화다. 고액 자산가의 특수관계인 범위 밖으로 반복해서 흘러가는 자산 이전을 국세청이 체계적으로 살피는 일, 법인 자산인 주택과 차량과 카드를 사적으로 제공한 경우 업무 무관 비용으로 부인하면서 증여세를 함께 매기는 일, 이혼 소송에서 혼외 상대방에게 이전된 자산이 확인되면 과세 당국에 알리는 장치가 그것이다. 감옥 대신 세금이라는 발상의 진짜 의미는 처벌이 아니라 가격이다. 간통죄 폐지가 혼외 관계의 형사적 가격을 거의 없앴다면, 과세는 그 관계에 따라붙는 재산 이전에 가격표를 다시 붙이는 일이다. 그 가격표는 부유할수록 무거워진다는 점에서, 지금의 역진적 구조를 조금이나마 바로잡는 장치에 가깝다. 성을 단속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승인되지 않은 결합으로 재산과 지위가 조용히 옮겨 가는 자리에,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격표를 다시 까 놓자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