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무렵이었다. 처음 이를 뽑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흔들리는 앞니를 실로 묶어 문고리에 걸고 문을 확 열어젖히거나, 이마를 툭 치며 순간적으로 이를 빼내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발치가 아니라 공포였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느 날 들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황소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 소가 몹시 부러웠다. ‘저 소는 이빨을 뽑지 않고도 저렇게 잘 먹고 사는데,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그 순간, 어린 마음에 이상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단순히 ‘나는 왜 황소가 아닌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내 생명은 무엇이며, 왜 나는 하필 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은 성공도,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열여섯 살 사춘기가 되었을 때 그 질문은 더욱 깊어졌다. 밤이 되면 잠자리에 누워서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내 생명은 어느 별에서 온 것인가. 죽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의식은 육체와 함께 사라지는 것인가. 우주에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낸 어떤 뜻이 있는 것인가.
학교에서는 언제나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 수학에는 답이 있었고, 역사에는 연도가 있었으며, 과학에는 법칙이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는 이상하게도 정답이 없었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질문은 더 많아졌다. 젊은 날 나를 가장 괴롭혔던 사람들이 ‘니체’와 ‘괴테’였다. 그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당연하게 믿었던 것들을 흔들어 놓았다.
니체는 인간에게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남이 만들어 놓은 가치에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며, 욕망과 지식, 선과 악, 사랑과 구원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는 존재였다.
나는 책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했지만, 책장을 덮을 때마다 오히려 더 큰 질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고전이 내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고전은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질문의 수준을 높여 주는 책이었다. 젊은 날에는 그것을 몰랐다.
나는 책을 펼칠 때마다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현자들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했고,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과연 진실의 전부인지 묻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목적을 묻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탐구했다. 동양의 현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말했지만, 인간의 삶을 단순한 규칙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노자는 억지로 세상을 움직이려 하지 말라고 했고, 장자는 인간이 붙잡고 있는 경계와 분별이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석가모니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라고 붙잡고 있는 것이 과연 영원한 나인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서양철학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끈질기게 물었고, 동양철학은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이 자아가 과연 무엇인가’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젊은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책은 철학책이 아니라 사마천의 『사기』였다. 나는 『사기』를 읽으며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해부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를 가장 깊이 흔든 것은, 사마천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였다. 사마천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몸으로 물었던 사람이다. 그에게 역사란 단순히 왕조와 전쟁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일이었다.
특히 사마천이 마주한 세계는 젊은 나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번영하는가. 왜, 덕이 있는 사람이 불행을 당하고, 악을 행한 사람이 천수를 누리는가. 만일 하늘이 정의롭다면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과연 이 우주를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사마천의 질문이면서 동시에 나의 질문이 되었다. 젊은 날에는 세상이 반드시 선과 악에 따라 보상과 벌을 준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선하게 산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다고 반드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젊은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혼란이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더 살아온 지금은 그 질문을 다르게 바라본다. 세상에는 과연 선과 악의 질서가 존재하는가?
아마도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매일 밤 선인에게 상을 주고 악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우리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비는 선한 사람에게만 내리지 않고, 태양은 악한 사람에게만 빛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선과 악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위대함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우주가 우리에게 정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반드시 선을 보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선을 선택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 나는 세상이 나에게 답을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 보니 질문은 세상이 아니라 내가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고전을 오래 읽고 난 뒤에야 조금씩 깨달은 지혜다.
젊은 날의 고전은 나에게 폭풍이었다. 니체를 읽으면 내가 믿고 있던 가치가 흔들렸고, 괴테를 읽으면 인간의 욕망이 두려워졌다. 『사기』를 읽으면 역사의 잔혹함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장자를 읽으면 내가 진리라고 붙잡고 있던 것들이 한낱 작은 분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고전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는 고전은 전혀 다르다. 같은 문장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젊을 때는 지혜로운 문장을 읽고도 ‘그래서 정답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지금은 그 문장 속에서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젊을 때는 공자의 말이 너무 당연하게 들렸고, 장자의 말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지금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오래 살아온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젊을 때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을 읽었다. 지금은 그 문장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요구를 읽는다. 젊을 때는 『파우스트』의 끝없는 욕망을 읽으며 왜 저 인간은 만족하지 못하는가를 물었다. 지금은 그 끝없는 갈망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고전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진다. 사실 깊어진 것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내가 읽었던 『논어』와 예순의 내가 읽는 『논어』는 같은 책이지만 같은 책이 아니다.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식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자식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공자가 말한 ‘효’의 무게를 조금씩 알게 된다.
젊은 날에는 사랑을 ‘욕망의 언어’로 이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사랑은 결국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놓아줄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을 배운다. 젊은 날에는 성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성공이란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이가 주는 이상한 역설이다. 젊은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늙은 사람은 무엇을 몰라도 되는지를 배우기 시작한다. 젊은 날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을 바꾸기보다 내 마음 하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일곱 살에는 아픈 이를 뽑으면서 시작되었다. 열여섯 살에는 우주를 바라보며 깊어졌다. 청년이 되어서는 니체와 괴테를 만나 흔들렸고, 사마천을 만나 인간의 운명 앞에서 절망했다. 동양의 성현들에게서는 비움과 겸손을 배웠고, 서양의 철학자들에게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삶에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오고 나서야 나는 조금 다른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아마도 완성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 물으며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완성된 ‘나’를 가지고 세상에 오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가 나를 만들고, 시대와 사회가 나를 만들며, 사랑과 상처가 나를 만들고, 만난 사람과 읽은 책이 나를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선택들이 나를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주민등록증에도, 직업에도, 재산에도, 학력에도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총합이며, 내가 선택한 가치의 흔적이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자식들에게 인생의 정답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다. 젊은 날 내가 그렇게 갈망했던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다.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옳은가.’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런 질문들은 젊을 때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 질문을 피해버리면 삶은 편안해질 수 있을지 몰라도 깊어지지는 않는다. 고전은 바로 그 질문을 대신해 주는 스승이다. 그래서 책을 읽되 정답을 찾기 위해 읽지는 말았으면 한다. 오래된 책을 읽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런 순간이 온다. ‘아, 이 사람도 수천 년 전에 이미 이 문제를 고민했구나.’
그리고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또 다른 순간이 온다. ‘아, 내가 젊을 때는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구나.’ 그때 비로소 고전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된다. 젊은 날의 고전이 칼이었다면, 노년의 고전은 약이 된다. 젊은 날의 고전이 나를 흔드는 폭풍이었다면, 노년의 고전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한 호수다. 그리고 그 호수에 비치는 것은 고전의 얼굴이 아니라 늙어가는 내 자신의 얼굴이다.
나는 이제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 젊은 날에는 흠집 하나 없는 얼굴을 원했다. 지금은 주름과 상처까지도 나의 일부임을 안다. 내가 걸어온 길에는 후회도 있고 실패도 있었다. 사랑도 있었고 이별도 있었다. 기쁨도 있었고 견디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 삶을 함부로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으려 한다. 고통도 내 삶이었고, 방황도 내 삶이었다. 답을 찾지 못했던 시간도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어느 날 새벽,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답은 멀리 있는 별에도, 거대한 철학의 체계에도, 어떤 신비한 지식에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바로 그 하루하루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를 뽑으며 울었던 일곱 살의 아이도 나였고, 밤새 우주의 기원을 생각하던 열여섯 살의 소년도 나였다. 니체와 괴테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청년도 나였고, 사마천의 절규 앞에서 세상의 정의를 의심했던 사람도 나였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시간을 뒤돌아보며 조용히 웃고 있는 사람 역시 나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하나의 문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질문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완벽한 답을 얻는 것보다, 끝까지 질문할 수 있는 영혼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새벽의 정한수처럼 맑은 물을 바라보면 물속에 하늘이 비친다. 그러나 하늘은 물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다만 물이 맑아졌기 때문에 하늘이 보이는 것이다. 고전도 그러하다. 젊은 날에는 아무리 위대한 책을 읽어도 내 마음이 어지러워 그 깊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계절을 지나고, 기쁨과 슬픔을 지나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얻고 잃는 일을 거듭한 뒤 다시 책을 펼치니 그제야 한 문장이 맑게 들어온다.
지혜가 책 속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내가 비로소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맑아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자식들과 후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깊이 생각하며 살기를 바란다. 남보다 앞서려고 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이 정해 놓은 답을 좇기보다 스스로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일찍 절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젊은 날에는 고통이 인생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훗날 돌아보면 그 고통이 나를 깊게 만든 스승이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그러니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너무 빨리 판단하지 말기를.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상처도 언젠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모두 지나온 어느 날,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맸던 ‘나’는 어디 먼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 속에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평생 고전을 읽으며, 삶을 살아내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하나의 대답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질문을 품고 태어나서,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가며, 마침내 이 질문과 함께 늙어가는 한 인간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질문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霞田 拜拜
落穗 ;
“나는 누구인가?”
‘남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 사이에는 어쩌면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는 또 내가 아는 나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이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조금씩 다릅니다. 나는 평생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살았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며, 어떤 가치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마침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그것은 애초에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될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인간은 어느 한순간의 모습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변하고 흔들리며 자신을 다시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 역시 ‘내일의 나’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어쩌면 완전한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답’을 찾는 순간 삶은 멈추지만,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나를 발견하려 하기보다, 내가 ‘나를 낳고’, 내가 다시 ‘나를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餘滴 ;
2백 회를 채워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편으로 인해 아쉽게도 150회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 칼럼을 애독해 주신 독자 제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