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한 문장 앞에서 오래 멈추게 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찾는 순간 길을 잃고, 길을 잃었기 때문에 다시 길을 찾는다. 파우스트가 평생 진리를 찾아 헤매는 것은 인간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위대함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으면 문득 파우스트의 이 방황이 한층 더 급진적인 형태로 변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우스트에게 ‘질문’이 있었다면, 니체에게는 ‘붕괴’가 있었다. 파우스트가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이라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묻는다. “이제 모든 가치가 무너진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니체는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구 문명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선언이다. “신은 죽었다.”
1.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니체의 이 문장을 단순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 선언으로 이해하면 『짜라투스트라』의 절반도 읽지 못한 셈이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자연과학자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가치체계의 붕괴에 대한 진단’이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신을 통해 세계의 의미를 설명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신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의지하여 판단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과학은 자연을 신의 섭리에서 떼어내 설명하기 시작했고, 계몽주의는 전통적 권위에 질문을 던졌으며, 역사비평은 성서와 종교의 기원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간은 더 이상 예전처럼 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근대적 이성과 과학을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을 버렸다고 해서 신이 맡고 있던 역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 있다. 바로 이 공백을 니체는 두려워했다.
신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이 여전히 과거의 도덕을 그대로 붙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을 믿지는 않으면서도 신이 만든 도덕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 절대적 근거는 사라졌는데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만 남아 있는 인간. 니체에게 이것은 근대인의 가장 깊은 모순이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끝을 의미하는 동시에 시작을 의미한다. 이제 누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말해 줄 것인가?
2. 그런데 왜 하필 ‘짜라투스트라’였는가?
여기에서 니체의 선택은 놀랍도록 역설적이다. 니체는 기독교와 전통적인 서구 도덕을 비판하면서 그 사상을 전하는 인물의 이름으로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를 선택했다. 역사적 짜라투스트라는 고대 이란의 종교적 사상가로, 훗날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다만 그의 정확한 활동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고, 조로아스터교의 선악론과 후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사이의 역사적 영향 관계 역시 단순한 일직선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니체에게 짜라투스트라는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니체가 보기에 짜라투스트라는 역사상 ‘선’과 ‘악’을 거대한 도덕적 대립의 언어로 제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그 인물이 다시 나타나 자신의 과거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말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니체의 문학적 장치다. 짜라투스트라는 역사적 조로아스터를 그대로 재현한 인물이 아니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말하기 위해 새롭게 창조한 철학적 예언자이자 문학적 인물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를 읽을 때 우리는 역사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철학자가 자신의 시대를 향해 던지는 거대한 우화와 예언을 읽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도덕을 만든 예언자가 과거의 도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을 선언한다는 역설이다. 이것이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선택한 가장 흥미로운 이유다.
3. 인간은 목적지가 아니라 다리다.
『짜라투스트라』에서 가장 강렬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초인(Übermensch)’이다. 그러나 초인을 흔히 생각하는 ‘슈퍼맨’처럼 이해하면 곤란하다. 초인은 다른 인간보다 힘이 센 사람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지배자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개념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의 과정이다.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넘어설 수 있고,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내가 다시 넘어설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완성된 목적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니체는 인간을 흔히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에 비유한다. 이 비유가 중요하다. 인간은 이미 도달한 존재가 아니라 ‘건너가야 할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인이란 특별한 종족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현실화하는 인간이다. 남이 정해준 가치에 따라 사는 대신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실패와 고통을 원망하는 대신 그것까지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는 대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남보다 높은 인간’이 아니라 ‘어제의 자기보다 높은 인간’이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타인을 지배하는 철학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 극복의 철학으로 읽어야 한다.
4. ‘권력 의지’는 지배욕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권력 의지(Wille zur Macht)’다. 이 말을 단순히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라고 번역하면 니체의 철학을 심각하게 왜곡하게 된다. 니체에게 생명은 단순히 살아남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자신을 확장하고, 성장하고, 표현하고, 형식을 부여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사상가가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고, 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이 모든 것을 넓은 의미에서 권력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 의지는 단순한 정치적 권력이나 폭력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는 생명의 힘이다. 이렇게 보면 니체의 철학은 의외로 현대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이 정해준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간다. 학벌, 직업, 재산, 명예, 사회적 지위, 타인의 평가. 그러나 니체는 묻는다. “그것이 정말 당신이 원하는 삶인가?” 그리고 다시 묻는다. “당신 자신의 삶을 당신 스스로 창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성공한 사람도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자기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있다면 니체적 의미에서는 훨씬 강한 인간일 수 있다.
5. 니체가 가장 무서운 질문을 던지는 순간 - 영원회귀
그러나 『짜라투스트라』에서 가장 깊고 무서운 질문은 아마도 ‘영원회귀(Ewige Wiederkehr)’일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똑같이 다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오늘의 하루를 다시 살고, 지금까지의 사랑과 이별을 다시 겪고, 실수와 실패를 다시 경험하고, 기쁨과 슬픔을 다시 만나고, 지금의 가족과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심지어 지금의 고통까지도 똑같이 다시 겪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한 번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아니오”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다. 다시 한번 살아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영원회귀가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우주론적 가설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의 시험이다. 나는 지금의 삶을 얼마나 긍정하고 있는가. 내가 살아온 삶 전체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장면들까지도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니체의 철학은 단순한 낙관주의와 구별된다. 낙관주의자는 “삶은 결국 좋아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훨씬 더 잔인하게 묻는다. “좋아지지 않더라도 이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운명 애(Amor fati)’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삶에서 좋은 것만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실패와 상처와 후회까지도 자기의 삶으로 끌어안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삶의 긍정이다.
6. 니체는 왜 기독교를 그렇게 공격했는가?
『짜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가장 불편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니체의 기독교 비판이다. 니체는 기독교의 죄의식, 복종, 금욕주의, 내세 지향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단순히 “신을 믿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가 공격한 것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도덕’이었다. 고통을 견디는 것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욕망을 죄악시하며, 복종을 선으로 만들고, 현세의 삶보다 내세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억압하는 도덕. 니체는 이런 도덕이 인간의 생명력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니체를 단순한 ‘반기독교적 철학자’로 규정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그의 기독교 비판은 오히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기독교가 던졌던 질문과 놀랍도록 가깝다. 다만 대답이 다르다. 기독교가 인간에게 ‘신을 향한 초월’을 요구한다면, 니체는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을 요구한다. 기독교가 “신의 뜻을 따르라”라고 한다면, 니체는 “너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인간의 구원’을 말한다면, 니체는 인간의 ‘자기 극복’을 말한다. 그래서 니체와 기독교의 관계는 단순한 찬반의 관계가 아니다. 니체는 기독교가 던진 인간의 문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받아들인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7. 니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창조’다
『짜라투스트라』를 관통하는 핵심어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초인’보다 ‘창조’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가 무너졌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허무인가? 니체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 인간은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가치의 전환이다.
기존의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인간은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가 사라지면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책임을 떠안게 된다. 누군가가 대신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신도, 전통도, 사회도, 권위도 더 이상 최종적인 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 자유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섭다. 왜냐하면 이제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자유란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에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다.’
8. 『짜라투스트라』는 철학책이면서 문학서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다른 철학책과 특별히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논문처럼 철학하지 않는다. 그는 예언자처럼 말하고, 시인처럼 비유하고, 설교자처럼 선언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짜라투스트라, 군중, 제자, 동굴, 독수리와 뱀, 춤, 웃음, 죽음, 아이, 목자와 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논리적으로 읽으려고 하면 오히려 길을 잃기 쉽다.
이 책은 이해해야 할 명제의 모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철학적 시에 가깝다. 니체는 독자에게 “내 말을 믿으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네가 믿고 있는 가치가 정말 너 자신의 것인가. 네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선인가. 네가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도덕적인가. 네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성공인가. 네가 살아가는 삶은 정말 네 삶인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니체가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큰 유산이다.
9. 그러나 니체에게도 위험한 그림자가 있다.
위대한 철학일수록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니체의 초인과 권력 의지 개념은 훗날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왜곡되거나 오용되기도 했다. 특히 ‘강한 인간’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지배와 우월성의 논리로 읽으면 니체의 철학은 위험한 엘리트주의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초인을 단순히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니체가 진정으로 싸우고 있는 상대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안일함과 순응과 원한이다. 그는 남을 이기는 인간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니체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제의 나를 넘어섰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10. 『파우스트』에서 니체로 - 방황은 어디로 향하는가?
이런 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깊은 곳에서 만난다. 파우스트는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에게 인간은 정지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니체 역시 인간을 완성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파우스트가 진리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면, 니체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방황한다.
파우스트에게 문제는 “무엇이 진리인가?”였다. 그러나 니체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그 진리를 정했는가?”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그렇다면 이제 너는 어떤 가치를 만들 것인가?” 여기에서 파우스트와 짜라투스트라는 갈라진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끝없는 탐구’를 보여준다면,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끝없는 자기 극복’을 말한다. 파우스트가 “더 알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짜라투스트라는 “더 높은 인간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근본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멈추지 않는 인간’이다.
11. 니체가 오늘의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짜라투스트라』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필독해야 할 고전이 되는 이유는 니체가 19세기 유럽의 문제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는 니체가 예언했던 세계에 훨씬 가까이 와 있다. 절대적인 권위는 약해졌고, 전통적인 가치관은 흔들리고, 종교적 신념은 사회 전체의 공통 기반이 되지 못하며, 사람들은 수많은 가치와 정보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기 어려워졌다.
자유가 늘어난 만큼 혼란도 커졌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 니체는 이 질문에 간단한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을 기대하는 우리의 태도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스스로 만들어라.” 이것이 니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짜라투스트라』는 인생의 사용 설명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용 설명서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직접 살아보라는 책이다.
12. 결국 니체가 말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니체의 인간은 행복한 인간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성공한 인간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부유한 인간이나 권력을 가진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인간’이다. 실패했더라도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 상처를 자신에 대한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며, 남들이 정한 가치가 아니라 자기의 내면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어제의 자신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살았고, 다시 살아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바로 그런 인간이 니체가 꿈꾸었던 인간에 가까울 것이다.
맺음말
- 신이 죽은 뒤에 남은 것은, ‘허무’가 아니라 ‘책임’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 읽고 나면 이상한 감정이 남는다. 니체는 신을 죽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에게 너무 무거운 것을 남겼다. ‘자유’와 ‘책임’이다. 신이 모든 가치의 최종적인 보증자가 아니라면 이제 인간은 자기의 삶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구걸할 수 없다. 전통 뒤에 숨을 수도 없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 삶은 정말 나의 삶인가.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체의 가장 무서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흔쾌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짜라투스트라』의 철학이 시작된다.
니체는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라고 요구한다. 인생에서 방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방황하라고 한다. 실패하라고 한다. 넘어지라고 한다. 다시 일어나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길만 따라가지 말라고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말했다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그 말에 이렇게 덧붙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방황하라. 그러나 남이 정해준 길을 방황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며 방황하라.” 결국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도착했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느냐이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어제의 나를 넘어 오늘의 내가 되고, 오늘의 나를 넘어 내일의 내가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책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탄생’을 선언하는 책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허무만 남는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인간에게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아마 이것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오늘도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새로운 질문일 것이다.
霞田 拜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