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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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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 26일 西安에서 촬영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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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回顧/懷古

칼럼
PinkPepper

懷古152.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安商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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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8. 17
식민지의 요체는 자원(resources) 수탈이다. 자원은 인적·물적 자원으로 나뉘는데 명확하게 영토(territory)를 뺀 자원만 서술의 대상이니, 이는 세계의 대부분 땅을 차지했던 서방의 주도 아래 자리 잡은 이상한 세계관이다. 한편, 해방과 전쟁과 분열의 시간 속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국인은 과거 일제 식민지에 대해 아는 바 없음이다. 하영 식의 판타지를 삶의 신조로 여기는 젊은 층과 젊다는 이유로 경험하지 않은 미래를 당연히 불안 속에 살아가야 하는 한국의 젊은 층에 식민지 요체는 영토 그 자체에 있다는 걸 기성세대로서 알려주고 싶다. 그래야 현실에 발을 딛고 살 수 있다. 전 세대, 전전 세대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역사를 바로 볼 수 없게 만들어 왔던 식민지 착취 방식이 그대로 국민에 강요되었던 역사가 이제부터 펼쳐질 때다.
 
안양 땅에 전기불이 들어오기까지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는 1927년 12월 31일 사망했는데 1929년 안양 전신주 공사에 안상호농장(安商浩農場)과 이웃할 것으로 추정되는 다카세농장(高瀨農場), 일제강점기 안양의 대표적인 두 농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다카세 농장은 상인의 도시 오우미(近江)출신 부산의 거상 다카세 세이타로(高瀨政太郞, 1863~1919)가 경영하던 농장이다. 안상호 농장이 10여만 평, 다카하시 농장이 50만여만 평의 토지를 운영했는데, 안상호는 고종 독살에 무관할 수 없는 시의(侍醫)의 자리에 있었고, 다카하시는 17세인 1880년, 부산에 건너와 포목과 직물 잡화에서 시작해 부동산 개발(동래온천 포함) 가스, 철도, 전기 등의 이권에 개입하며 부산 제일의 부호가 되었다. 이웃했거나 근처인 두 농장주는 1929년에는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후계 상속 구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조선인으로 식민지 영토 축적에, 일본인으로 착취 사업에 혈안이 되어 쌓아 올린 두 명의 재산 규모와 변천사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상대적 박탈감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 대대로 불법 편취해 온 근대사를 바로잡아 자신들의 몫을 당당히 찾기 바란다.
 
다카세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917년 조카 후쿠나가 세이지로(福永政治郎, 1864~1935, 23세)와 공동으로 부산 본점의 ‘高瀨合名會社’라는 합자회사를 차리고 개간, 농장, 식림, 양잠 등의 농장사업에 성공한 노하우를 1920년대 여수로 본사를 옮긴다. 이 부분은 이상한 시장 개척이지만, 지금은 다루지 않겠다. 그리고 여수에서 안양으로 활로를 넓히게 되는데, <박철하 근대 민족운동과 안양, https://ngoanyang.or.kr/2590>에는 다카세농장이 ‘1910년대에 90여만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1932년 현재 23만 평의 임야와 10만 평의 잡초지, 10만 평의 밤나무밭, 1만 8천여 평의 주택지를 제외한 50여만 평의 밭과 논을 조선인 200명의 소작인과 일본인 소작인 17명에게 소작을 주어 경영했다’라고 했다. 1910년대까지 90여만 평을 개간하다가 1930년대에 50여만 평으로 줄어드는 사업을 하면서 본사를 이전한 건 성장이 아니라, 사업 축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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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瀨政太郞 초상, 近江商人事績写真帖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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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瀨合名會社 <新釜山大觀 1934> 사진 오른쪽 아래 괄호에 ‘鎭海灣要塞司令部檢問濟’라고 쓰여 있어 통제된 식민지 출판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쯤에서 일본인 다카세 합작회사의 상속인과 안상호 농장 상속인이 누구였고 어떻게 다음 세대로 전해져왔는지 알 필요성이 커진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약 100여만 평의 토지가 단 두 사람에 의해 전해져 온 사실로 현재 대한민국 친일파가 누리는 반민족 행위의 유물론적 특혜가 임계점을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는 현실 자각이 우선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특혜가 관행이 되고 관행이 신분이 된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그 작동의 원리를 파헤쳐야 한다. 그래야 식민지 세대가 못 이룬 친일파의 불법과 날조와 살육의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
 
다카세 합자회사는 1886년부터 부산 내수용품으로 영국산 면제품, 즉 서양 광목을 상해를 거쳐 들여와 팔았다. 1886년에 이미 부산에 고급 상품 지향 조선인과 외지인이 넘쳐났다는 이야기이기라 씁쓸한 데,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발전을 거듭한 다카세 회사는 승승장구하면서 ‘국산품애용’ 정책에 따라, 영국산 수입 대신 일본산을 조선인에게 판매하기 시작한다. 나라 잃고 고급 좋아하는 취향도 일제에 좌우되는 때, 사치는 한국인의 종특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 않을까. 타자에 의한 영토 재분배가 강요되던 시대에 이러한 고급 사치품 수입 증가는 새로운 신분을 정착시키며 대중을 소비와 사치에 젖게 해 이목을 돌리는 교란 정책이다. 안팎으로 무장 항일 운동에 죽어가는 의사, 지사들과 서양 문명에 취해 살판 난 신여성, 신 남성들이 신나서 총독부 정책을 추종하던 이중 고난이 식민지 조선 사회에 깊게 자리를 잡아갔다.
 
약탈의 시대, 전쟁 의사로 돈 번 안상호나 식민지 터에 장사로 한몫 잡겠다고 온 다카세는 식민지 제도와 정책을 끼고 치부(致富)로 삼은 자라는 면에서 진정한 성공 사례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누군가 죽고 쫓겨간 자리에서 돈을 벌어야 성공한 사업가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런 인물상을 성공의 케이스로 그려 낸 건 당시 신문과 잡지, 바로 미디어였다. 17세에 부산으로 건너와 포목점을 시작으로 경성(한양에서 일본 식민지 경영 수도가 된)을 비롯해 서울, 평양, 대구, 여수, 군산, 원산 등 6개 장소에 지점을 내고 문어발식 확장 경영한 약탈자를 선구적인 안목과 질서 정연한 업무, 명예직조차도 거절하고 사업에만 몰두한 타고난 소질이라고 추켜세우는 일본의 기록은 한일 간 식민지를 두고 보이는 태도가 현저함을 보여준다.
 
다카세 세이타로라는 인물은 식민지 부산에서 손에 꼽는 사업가지만,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통상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지 이력을 깨알을 세듯 꼼꼼하게 기록물로 남기는 관습이 체질화한 민족인데 이 자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부산 제일의 부호로 식민지 조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 인물 중에 자료가 많이 없다는 건 두 가지로 유추할 수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 역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 활동가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산업, 학술 등 다방면에 걸쳐 이런 인물이 드물지 않았지만, 부산 제일의 부호 타이틀을 가지고 숨어서 활동할 수는 없으니,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인다. 둘째, 식민지 말기, 그러니까 패전 직후에 조선에 눌러앉은 인물이다. 그러나 다카세는 191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양자 모두 속하지 않는다. 축적된 자본과 경영의 터전이 모두 조선에 남아 있어 패전 후 일본 귀향 인양선(引揚船)에 탈 수 없었던 세대가 아니니, 조선 땅에서 축재한 막대한 부에 비해서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을 꺼린 게 아닌가 싶다.
 
다카세는 소작농들을 착취했고 소작인들이 단결해 행동에 나서자, 그에 복수해 농번기에 소작권을 박탈한 기사도 신문에 났다. 그러면서도 신년에 농장 광고를 신문에 버젓이 내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의 간덩이로는 어려운 게 식민지 착취지만, 일본의 정책과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이런 착취에 바탕을 둔 사업을 가능하게 했던 데에는 서구 식민지 약탈 제도와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연상 작용(association)이 필요하다. 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 자에도 불경기에 토지 사용료를 올린 농장에 대해 일본인 소작인들의 반대 기사가 났는데 조선인은 그들과 함께 소작농이 되거나, 그 밑에서 노예처럼 일했으니, 수천 년 조상의 터전을 뺏기고 과연 누가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을지 상상조차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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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


남의 땅에서 남의 자원과 남의 노동력으로 일군 부를 사업적 재능이라는 서사로 비틀고 당연시하는 일본 특유의 관점은, 남의 소유물을 뺏는 범죄 행위를 당연시하는 왜구(倭寇)의 약탈 정서가 깊이 깔려 있다. 이것이 일반 대중 정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키워내는 관료, 학자들의 사고방식으로 군국주의 일제를 밑받침하는 정서였다는 게 문제이며 여전히 일본 정치를 돌리고 있는 기본적 사상이다. 일본의 대중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건, 식민지 착취 역량을 자국민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은 ‘내각제’라고 부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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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 80여 명이 모여 소요를 일으키러 다카세 농장으로 갔다는 기사 每日申報 1931년 11월 26일자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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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작기에 소작권을 박탈-지세 세 배 인상 안양 다카세 농장의 처사 中央日報 1932년 4월 17일 일자 5면
 
식민지의 꽃, 내선일체의 모델 안상호
인상호도 일본인 머슴이 자신의 농장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1926년 每日申報 10월 8일 자 3면에 실린 ‘安養軍浦塲間山中에서 凶器로 老農을 慘殺―慘死者는 安商浩氏 舍音’이라는 사건이다. 3면을 장식한 식민지 사회의 갖가지 범죄들과 생활상이 눈뜨고 읽기 괴롭다. 해당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안양 군포장 사이 산속에서 흉기로 노농(老農)을 참살, 피해자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가해자는 오리무중으로 깊이 숨어, 참사자는 안호상의 사음(舍音)-


지난 6일 오전 9시경에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에 사는 다니오카 센타로(谷岡淺太郞,61세) 는 군포장(軍浦場: 안양천 주변 5일 장터) 부근에 있는 산림 속에서 어떤 자에게 인후부를 깊이 찔려 현장에서 참사하였는바 안성(安城) 사건으로 지금까지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또 그러한 일이 아닌가 하고 자동차로 이(李) 과장과 노무라(野村) 경부가 현장에 달려가서 조사하였으나, 범인의 흔적은 또한 오리무중에 있다더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그곳에 오면서부터 어떠한 연분으로 종로 3종목에 있는 안상호 씨의 산림 10만여 평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는데 원래 그 산으로 말하면 나무 한 개 없는 진흙 산이었는바, 다니오카가 맡은 이후로는 주야(晝夜)의 분별이 없이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그 산에 가서 살다시피 하여 그가 참사할 때까지의 기념으로 하여 지금은 연포의 나무가 빈틈이 없이 되었는바(필자 주: 해석에 한계 있음), 그가 죽는 6일에도 그 산에 솔가지를 치고 그 품값을 주려고 가지고 가는 중에 이와 같은 참극을 이루었다는 급보를 듣고 달려간 안상호 씨는 눈물을 보이며 ‘나의 은인이오. 조선 사람의 은인이 죽었다’고 애통하게 여기더라고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은 말하더라.
 
-도대체 의문! 단서를 몰라서-
이와 같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하면 무슨 혐의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강도의 소위인데 아무리 조사하여 보아도 혐의 관계는 없고, 또 강도의 소위라 하더라도 그가 가졌던 60원이라는 돈은 그대로 죽은 후에도 몸에 지니고 있어 강도라면 돈을 빼앗아 갔을 터인데 그러한 형적도 없이 범인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으므로 사건은 의문의 곳으로 흐르게 되어 경찰은 범인 수색에 단서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바 그 외에도 의심되는 바는 자살이나 형적이 자살한 것은 아니오, 타살이 분명하며 또는 자살한 할 만한 이유도 보이지 아니한다더라.
 
-모토하시(元橋) 검사 출동. 사이토(齋藤) 서기 동반-
이 급보를 받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는 모토하시(元橋) 검사가 사이토(齋藤) 서기를 동반 후 적십자병원 의사 한 명을 대동하고 오후 4시 차로 현장을 조사하였다더라.
 
-피해자는 진실한 농부, 부군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군포장 앞 산림 속에서 놀란 칼날의 혼이 된 다니오카 센타로로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17년 전부터 안양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조선말 한마디 알지 못하고 신실한 농부이며 부근 사람의 많은 칭찬을 받고 겸하여 부근의 조선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하여 이의 말이면 동리 사람이 거역하는 사람이 없고 동리 사람으로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가게 그는 안양에 있는 농부의 진실한 벗이 되었었다고 한다.
 
-범인 즉시 체포-
전술한 살인범은 팔방으로 수색한 결과 시흥구 남면 진정리 140번지 한성칠(韓成七) 32세로 판명되어 체포하였는데 이자는 돈을 빼앗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낫으로 죽인 것이라더라.’
 
 
매일신보의 사건 개요는 얼핏 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허술해 총독부 손아귀에 춤추는 꼭두각시 언론이 사실관계를 바르게 보도했을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매일신보는 1910년 합방과 함께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장악해 만든 총독부의 한국어 기관지로, 1926년 경성일보와 함께 식민지 경제 정치에 충실한 선전 신문이었다. 당시 매일신보 사장은 소에지마 미치마사(副島道正, 1871~1948), 편집국장 가쿠타 고지(角田廣司, 1886~?), 그 아래 조선인 기자들이 있었다. 사장과 편집국장의 이력으로 볼 때, 일본인을 죽인 조선인 범인의 행방이 묘연하다면서도 한성칠이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쉽게 생포했다는 기사로 마무리한 점은 당시 소작농과 일본인 지주 사이의 분쟁을 강도 살인 행각에 범죄 형태를 띤 모종의 계략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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副島道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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角田廣司, 朝鮮公論 1915년 3월호
 
일본인 경찰과 동행하는 조선인 경찰 간부가 무슨 힘이 있으며 붙잡히면 누구라도 범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재판이 공정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식민지 사회에서 살인 사건을 가장한 음모적 책임 전가나 범죄 날조는 비일비재했을 것이라 보이며, 많은 항일 운동가들의 암살도 이 같은 사건에 덧입혀 풀이되고 기사화하고 역사로 남았을 가능성 적지 않다. 청일전쟁 침략 후부터 6.25 사변까지 암살 타살 또는 피랍된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수십 명이 넘고, 전쟁 중 피랍자는 10만이 넘는다. 남북의 대립으로 일제와 반민족 친일파의 착취 문제가 희석된 결과, 어쩌면 오늘날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근면한 한국인 사회에서 사법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아이러니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흔적-피지배민에 대한 지배자의 물리적 정신적 압력 행위-이 누적되면서 조선인은 스스로 자기 둥지의 알을 죽이고 남의 새끼를 제 새끼로 물고 빨고 키워왔고 탁란의 혼혈을 철저하게 모르고 살았다. 현재까지도 질질 끌려다니는 친일파들의 반민족 정치에 뒤엉켜 있는 혼돈은 인과 관계를 뒤집고 그들을 추종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어 다음 세대의 젊음과 인생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안상호는 자신의 머슴이 죽자, ‘나의 은인이요, 조선 사람의 은인이 죽었다’고 애통해했는데 이 점은 안상호라는 인간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매일신보 1918년 12월 10일 3면 기사는 바로 그 예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내선일체 가정의 모범사례로 의사 안상호의 가정을 소개한다.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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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8년 12월 10일 3면
 
‘-왕세자 전하 가례(嘉禮) 전에 일선 동체(日鮮同體)의 가정 방문,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 씨의 가정. 오남매의 자녀를 두고 아주 재미있게 산다-
 
조선에 처음으로 서양 의술을 수입하여 성공한 안상호 씨는 일선 동체의 가정을 만드는 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8일 오후에 겨울 위엄을 발휘하는 모진 바람을 무릅쓰고 안 씨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진찰실에서 분주히 일을 하다가 두 손을 부비며 나와서 기자의 방문한 뜻을 듣고 “감사합니다. 저리로 들어가시지요” 어디로 뜯어보던지 조선 신사이다.
 
인도되어 내실에 들어가 본 즉 내지 가정과 같으리라고 미리 생각하였던 바이지만은 고만큼 고만큼 한 일본 아이들이 사오 명이나 있어서 매우 번화하다. 안 씨와 기자는 금시에 딴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이 생각이 된다. 안 씨는 “고라 레이 짱 야카마시이요” 어린아이들을 제어하면서 온돌방으로 안내한다.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 씨는 “네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 일본 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도 조선 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곳은 조금도 먹 못 먹어요. 일본 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집안사람도 연전에는 매우 적적히 지내었으나, 요사이에는 아이들도 많이 있고 우리 장모도 와서 계시니까 매우 재미있게 지내지요.”
 
“그래 혹 시골에서 일가들이 오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네. 나는 왜 고독한 사람이 되어서 찾아올 일가가 없어요. 가족이야말로 단출하지요. 조선 사람들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이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는지요. ”
 
안 씨는 지금부터 열두 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더라. 그때에 안 씨의 부인 기자(磯子)와 서로 알게 되어 기자 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야, 전후 열 한 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지금 앵정(櫻井) 소학교를 다니는 9살 먹은 큰딸을 위시하여 자녀가 모다 5남매이며, 동경에 있을 때로부터 지금까지 살림살이를 조금도 고치지 아니하였음을 아니하였음(?). 안 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 사람이 된 셈이다.
 
기자는 다시 부인에게 면회를 청한 즉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들에게 싸여 있어서 나는 조금도 조선 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서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 해요. 그러고 보시는 바와 같이 아이들이 많아서 출입도 잘 못 해요. 한 달에 진고개나 한 번씩 가지요.”
 
“어린아이들은 조선 동무들과 자주 놀터이지요?” 하고 물은즉 “집 앞이 바로 전찻길이기 때문에 단속하여서 내보내지를 아니하므로 우리 집 식구들은 딴 세상에 사는 셈이야요” 말을 할 즈음에 조선인 늙은 할멈이 문을 벙싯 열더니 “옥상, 규니쿠(쇠고기) 다 구워요.” 할 때 기자는 안 씨의 집을 하직하였다.’
 
식민지라 해도 가정은 가정의 고유 기능과 역할이 있다. 그런데 혼혈 가정을 꾸리는 부모의 마음가짐이 왜 이렇게까지 자체 검열하며 마음을 다잡는 언행을 강조해 보도한 것일까. 그것은 1910년 합방 직후, 조선 통치의 명분이 ‘一視同仁(모두를 똑같이 어질게 본다)’으로 한일 혼혈 가정의 조합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새 신분 질서의 조건이었다. 어질다는 전제는 식민지 따위 만들지 않는 것이라 한국인 정서로는 본질에서 어불성설인 일제 사고방식이지만, 일본은 중세 왜구이래 혼혈로 생물학적 집단 지성을 업그레이드 해 온 민족이다. 히에라르키의 열등 의식이 뼛속 깊이 박힌 일본이 조선인과 일시동인, 일선 동화, 내선일체 등 한일 혼혈을 장려하는 세뇌 용어가 50개 가까운 표어를 내세우며, 동화정책과 살육정책을 동시에 구가했다. 인간으로 왜곡되고 잔인한 성품만 우성이 된 일본인 유전자의 힘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인간 본질을 묻는 문제이자, 실존 철학의 자세니, 다지고 밟고 두드리고 다시 확인하면서 이어온 혼혈 정책의 이유가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이었을지, 한국의 가임기 남녀들은 한 번씩 생각해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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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안상호 가족사진에서 맨 왼쪽 장녀 기누코(絹子)가 앵정(櫻井)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한 기사가 매일신보 1916년 10월 21일 자 3면 기사 ‘醇化되는 아동의 교육, 일본학교에 공부하는 조선아해’ 에 등장해 1908년생으로 추정된다. 당시 앵정 소학교는 신세계 신분 질서 아래 태어난 신흥귀족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사진 맨 오른쪽 장남 정호(正浩)는 조선공론 1913년 9월호 기사 ‘日鮮同和の魁, 鮮夫日妻評判記’ 에 당시 2세였으니, 1912년생이다. 상호의 아들 정호, 부호, 덕호는 한국식 족보 작명이 아니다. 피휘 없이 아래로 물려주는 통자(通字) 작명은 일본식 작명인데 하영의 증조부 상호의 부친이 健榮, 조부는 東獻이니, 안상호 대에 와서 일본식 작명이 시작된 것이다. 안상호 부인이 일본인이고 나름의 명문가, 일설에는 조선에 왔던 일본 군인의 딸이라고 하는데 넓은 식민 도시의 사교 관계 속에서 안상호가 느낀 열등감은 현대 감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일가붙이도 없고 매운 것도 못 먹는 겉만 조선인이고 성향은 일본화되었다고 강조하는 모양이 식민지 체제가 그 자체로 얼마나 무서운 세뇌인지 모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안상호의 관상은 조선인 얼굴이 아니다. 곰보에 왜소한 체구, 돈을 벌어도 펴지지 않는 인상은 근대 최초 일본 의사 면허를 가졌다고는 해도 어지간히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본다. 구한말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 끝에 일본 여성과 결혼했지만, 처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고종의 손자, 이강(李堈)의 아들인 이건(李鍵, 1909~1990), 창씨개명 모모야마 겐이치(桃山 虔一)는 안상호를 회상하면서 사교적이고 명랑한 그의 부인이 자연스럽게 일본인 관료와 그 가족들의 치료를 남편에게 소개하면서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조부인 고종의 암살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진위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일은 또 있다. 이건, 이강, 모두 영양실조로 생을 마쳤으며 일생 자신의 의지는 없는 인생을 살다 갔다. 고종에 이르기까지 왕족, 황족의 모든 역사는 지워졌고 이것을 설명할 자신이 없다. 잔인한 인간의 행위를 고증하는 것은 슬프고 벅찬 일이다. 역사가 인간의 신분을 가로채는 시대에는 가장 상위에 있는 부류가 가장 하위로 떠밀리게 마련이니, 감정을 배제한 고증이 누구를 위한 일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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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李堈, 1877~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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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李鍵, 1909~1990)
 
신분에 대한 열등감, 유물론의 한계를 극복하라
안상호가 세력가였던 일본 군인의 딸과 결혼한 조선인일지, 출세를 노린 일본인일지 알 수 없다. 이정은의 논문 <최초의 開業醫 安商浩의 생애와 활동, 2007>은 안상호 이력에 관해 부인 가와구치 이소코(川口磯子)의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일본인인 그녀가 어떻게 남편의 가계와 족보에 대해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아마도 <한국의학의 개척자(I), 1985>을 출간한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지낸 1895년생 정구충의 자료 보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 확인 전이다. 순흥 안씨 족보를 놓고도 문숙공파, 교서공파 등 이설이 있어 1929년 발간된 <順興安氏第三派世譜>를 확인하는 길밖에 없다. 족보 역시 확인 전이나, 식민지가 한창때에 나온 족보는 수상하다. 조선말 못하는 게 자랑인 맹랑한 안상호 부인의 말을 곧이 믿는다고 해도 안상호 사망 2년 만에 나온 족보는 저 내란범 윤석열의 족보가 아무리 뜯어 봐도 이상한 것과 비슷하다.
 
개족보가 된 한국인의 신분 콤플렉스가 거의 범죄 형태를 띠며 진화하는 것 같다. 족보에 오르려는 자도, 족보에 넣어주는 자도 범죄를 저지른다는 죄의식이 작용해 떳떳하게 살기 힘들 것이다. 근대를 문명개화로 둔갑시킨 역사관이 떳떳하다면 왜 한국 사회는 뒤에서 김 씨를 이 씨로 만들고 임 씨를 이 씨로 만들어 왔는가. 근대 북한 지역은 더 오래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그 자리를 기독교가 일찍 계몽시킨 지역적 특성이 있다. 무너진 가계와 족보를 아는 사람조차 남한보다 적을 것이다. 인간, 그 뿌리에 대한 가치를 망각한 요즘 세상에 안상호 가문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안상호의 처, 가와구치 이소코의 부친에 관해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시간을 들인다고 완전하게 알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출생지와 출생연도, 성명을 바꾸는 이력의 세탁이 쉽고 또 필요했던 때다. 모두 역사를 공모하면서 태어나고 죽음조차 포장되었던 족보 콤플렉스, 혼혈 정책의 한계가 현재를 사는 이 시대에 울리는 경종은 과연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진화는 확장된 이론을 펼치지만, 진화하면 반드시 발전하고 우수해진다는 이론은 깨졌다. 뒤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볼 역사의 자료가 날조된 인류에게 미래를 예측할 방법이 사라졌다는 걸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영의 부친 안병문(安秉文)의 2002년 4월 8일 자 중앙일보 기사를 소개하고 마칠까 한다. 기사 제목은 ‘손가락 장애 딸 꿋꿋이 키운 손가락 전문醫 안병문, 그의 이름은 애비’로 로 큰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기고문을 통해 아픈 자식을 사랑하는 애틋한 부정(父情)을 아낌없이 세상에 드러냈다. 그 상세한 집안 이력 소개로 자존감과 자존심을 함께 채웠지만, 그런 성향이 바로 하영이 설화(舌禍)를 자초한 근원이다. 반민족 행위는 유전된다. 민족주의도 유전된다. 폭력 앞에 의를 택하기 어렵다. 덕망과 기개, 품위를 알기 때문에 민족의 자존심을 위해 산으로 간 것이다. 처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 먼 길을 떠나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선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땅을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사람은 드물다. 세계가 다 덤빈 그 죽음의 길을 자처한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을 욕보이면서 유지해온 이 나라가 누구에게 대접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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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2년 4월 8일 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4256744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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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준
10
안상호 개인의 행적을 넘어 식민지 시대의 신분·자본·동화정책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꾸었는지를 추적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당시 신문 원문을 통해 지금의 시각으로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보여준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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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04
10
식민지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묻어두지 않고, 당시의 토지와 자본, 신분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졌는지를 추적한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이런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봐야 오늘의 현실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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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섭
8
자료를 하나씩 찾아 당시 신문과 기록을 대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정성이 대단합니다. 특히 식민지배가 사람들의 재산뿐 아니라 생각과 정체성까지 바꾸어 놓았다는 지적은 오래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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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77
7
우리가 배운 근현대사는 너무 자주 결과만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제대로 묻지 않았습니다. 토지와 재산의 이동, 친일 세력의 사회적 재생산을 추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적극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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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福
7
식민지배를 단순히 ‘수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보지 않고 토지와 농장, 소작인, 상속, 혼인과 자녀 교육까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들여다본 것이 좋았습니다. 역사는 결국 사람들의 실제 삶 속에서 작동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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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er58
6
과거를 파헤치는 이유는 누군가를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부와 신분이 해방 이후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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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85
5
역사는 미화해서도 안 되고 편리하게 지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외면했던 식민지 사회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이런 작업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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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pk62
5
다만 안상호의 친일성이나 고종 독살 연루 가능성처럼 자료만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부분은 조금 더 엄격하게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확인된 사실’과 ‘자료에 근거한 추론’을 분리하면 글 전체의 설득력이 더 커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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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77
4
과거를 파헤치는 이유는 누군가를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부와 신분이 해방 이후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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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tae
3
가장 씁쓸한 대목은 식민지 체제에 적응하고 일본화되는 것이 개인에게는 출세와 안정의 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개인을 단순히 친일파냐 아니냐로 재단하기보다, 그런 선택을 만들어낸 시대의 구조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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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삼협
2
결국 이 글이 던지는 질문은 과거의 친일 여부만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만들어진 부와 신분이 이후 세대에 어떻게 이어졌는가’인 것 같습니다. 과거를 들추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현재의 불평등과 기득권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한 역사 공부라면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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