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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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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은 유명한 친일 거두로 당시 일본 정계의 제1인자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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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인물(14) 박중양(朴重陽) 1872(高宗9)~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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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9. 25
  • 반민특위는 친일파 단죄를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 했으나, 친일 세력의 반격과 이승만 정부의 '빨갱이 몰이'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 친일파 박중양은 일제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보이며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했고, 그의 성공 이면에는 치열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민족 배반으로 귀결되었습니다.
  • 반민특위의 실패와 6.25 전쟁은 친일 세력의 경제적 이득과 권력 세습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현대 한국 사회의 분열과 왜곡된 역사 인식의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 박중양처럼 모호한 신분과 여러 이름을 사용하며 친일 행적을 감추려 했던 인물들의 사례는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일부 정치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위선적인 태도와 연결됩니다.
반민특위 실패는 필연
2004년 오마이뉴스는 반민특위 조사관 마지막 생존자인 정철용(鄭徹溶, 1925~2006) 씨를 인터뷰해 5회에 걸쳐 회고록을 실었다(정운현 기자). 1925년 충북 영동 태생인 정철용은 인터뷰 당시 79세로, 1944년 5년제인 청주상업을 졸업 후 일제에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서울 용산 주둔 일본군 20사단에서 8.15해방을 맞았고, 1946년 5월 당시 미 군정이 관리하던 신한공사(新韓公社) 대전지점에 들어가 2년여를 근무한 이력이 있다. 1948년 가을 박우경 제헌 의원의 추천으로 반민특위에 들어가 조사관으로 활동을 시작, 1949년 2월 친일 문인 이광수 체포에 참여했다.
 
정철용이 근무한 신한공사는 1946년 2월 21일 군정법령 제52호로 설립해 3월 3일부터 업무를 시작한 공기업으로, 미군 정청이 해방 후 일본인 소유의 농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회사였다. 즉, 역대 식민지 통치 기간에 약탈한 부동산 관리공사였던 셈이다. 그런데 신한공사의 영어 명칭은 ‘New Korea Company, Limited’. 그냥 코리아가 아니라, 뉴 코리아다. 그럼 올드 코리아는? 조선 사람, 이승만을 독립의 영웅으로 만든 미국이 한반도 새 나라에서 구한국의 토지 문제와 신한국의 토지 문제를 주도했던 역사는 무슨 의미가 있고 그 영향은 어느 정도나 될까, 아마 상상을 불허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현대 한국인은 전혀 예상할 수 없으니,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신한공사는 이렇게 옛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지주들이 남긴 농지를 관리하다가 1948년 8월 15일 이후에 농림부로 이관되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 이전의 개인과 국가의 재산, 토지 문제는 쑥 들어가 버렸다.
 
반민특위 조사관은 시험으로 선발된 일반 경찰이 아닌, 독립운동가·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광복군·항일단체 출신 또는 해방 후 민족진영 및 김구 계열에서 활동한 인사로 조사와 문서작성, 체포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청년 실무자를 위주로 뽑았다. 조사관은 총 15명이고 반민특위 구성원은 전부 45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명단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반민특위 초기 활동의 수확인 박흥식, 배정자, 이광수, 최남선, 박중양과 같은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 체포로 반발한 것은 반민족 행위자 당사자들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식민지 통치하는데 지대한 연관이 있었던 일본과 그 뒤의 서구는 과거를 복기하려는 한국인 민족주의의 반격을 막아야 했다.
 
그 과정으로 1949년 6월 6일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계기로 동력을 상실한 반민특위는 그해 8월 말 문을 닫았고, 반민특위 조사관이라는 정철용의 짧은 경력은 그를 빨갱이로 몰아 수사관이 도리어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빨갱이와 좌익’ 몰이는 이렇게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단죄하는 자를 단죄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되면서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은 분열의 시대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정철용씨는 박중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9년 4월경, 유명한 친일 거두 박중양이 대구에서 특위 본부로 이송됐다. 박중양은 일제하 중추원 부의장에,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은 유명한 친일 거두로 당시 일본 정계의 제1인자인 이토 히로부미(한국 통감, 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만주 하얼빈역에서 처단당함)의 양아들이었다. 그를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의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あ、ここが昔の第一銀行だね、そう、そう。(아, 여기가 옛날의 제일 은행이구나, 그래, 그래!)”. 그는 말이고 행동이고 완전히 일본인 그 자체였다. 일본식 생활문화가 몸에 밴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백작 영감, 今でも昔が懐かしいですか?(지금도 옛날이 그립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우물 쭈물거리다가 2층 검찰부로 올라갔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박중양은 몸은 비록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감탄한 것은 그의 집에서 압수해 온 증거품 중에 일기장이 무려 20여 상자나 되었다. 전부를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추어 보았는데 그 속엔 일자무식, 돈 한 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특위 대구지부에 연행되어 온 전날까지 그는 수십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두 정자로. 나는 그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중양 역시 특위 해산과 더불어 석방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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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준공한 현 서울 한국은행. 第一銀行, 설계 辰野金吾, 葛西萬司
 
해방을 맞은 시공(時空)의 대중들에게 식민지 치하의 친일 반민족 행위는 어떤 각오를 불러일으켰을까. 아마도 억압당하던 대다수 민중은 민족 반역자들이 완전히 단죄될 것이라고 인식하며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재건의 의지를 다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기에 어렵게 성사된 반민특위의 실패 가능성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알아도 방어하거나 대처할 여유가 없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결과적으로는 식민지 피지배의 폐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다시 전쟁(6.25)으로 휘말린 이유가 반민특위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확장된 논리가 필요하다. 반민특위를 통해 과거를 청산하려는 민족주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방법, 바로 전쟁이다. ‘식민지 압제-해방-반민특위-6.25 전쟁’의 비극이 이렇게 연결 전개된다면, 연례행사처럼 반복하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이름과 이력의 나열은 무의미한 공염불이고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현대 한국에서 과거사 해결의 핵심은 그들을 죄인이라 못 박는 허위의 행위가 아니라, 이미 그들이 취한 경제적 이득과 그 후손들에 대물림된 환산하기 어려운 부의 가치를 사회로 환원하는 데 있다. 반대로 항일 투쟁 인사들은 정치적 핍박과 홀대로 인해 가난과 질병과 배우지 못한 무식을 떠안고 그 자녀들에게 물려 주었다. 현대 한국이 식민지 역사를 덮은 후유증은 완벽하게 신분제를 역설계한 저들의 꿈이 이루어진 대신, ‘양반-지식인-항일 운동-빨갱이-좌익’의 이념 몰이를 해방 이후 연속된 독재 정권의 국정 방향이었다. 이제 과거 양반 지주의 후손은 완전히 대가 끊기거나, 투탁(投託)으로 족보마저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고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 되었다. 민족의 기강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요원하지만, 거짓 역사가 드러나는 지금 시기에 남의 족보에 끼어든 사회 지도층의 문제는 정부가 법으로 제재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반민특위 조사관이 쫓기는 신세로 전락할 때, 6.25 전쟁 4년 동안 피랍되고 암살된 민족주의 지식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전쟁의 여파로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체념하지 말자. 국가를 구성하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필요한 인재들이 북으로 끌려갔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진행된 전쟁이었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잡지 <개벽> (1921년 10호)에서 사회주의자 정도의 뉘앙스로 처음 등장하지만, 정치적 용어로 첫 사용자는 6.25 전쟁 중의 이승만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한 편지에서였다(The Ambassador in Korea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Pusan, July 28, 1951—noon, 파일 참조). ‘러시아와 ‘Red China’ 사이에 분열이 생겼으니, 조금 더 노력하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라는 의미, 차이나가 레드 차이나가 되며 공산당의 컬러로 자리매김했지만, 반민특위 해산 이후에는 민족주의 진영, 반일 세력이 빨갱이가 된다. 이승만의 영어 편지는 구시대적인 형식적이고 루즈한 아부 편지이지만, 국내적으로는 통일된 민족진영을 만들지 않고 이념 분열 정책을 쓰겠다는 확신이자, 증거가 될 수 있다. 사람을 많이 죽인 이승만이 영웅처럼 교육된 시대를 경험한 노인 세대, 전쟁의 포탄을 피하고자 어린애들을 밖으로 내보내 하얀 이불 홑청을 흔들고 서 있게 했던 전쟁…. 그 경험자들이 독재를 미화하면서 빨갱이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불행이다.
 
 
박중양의 행적을 감춘 대한민국
민족 반역자들의 죄상과 재판 심리 과정을 기록한 고원섭(高元燮?~?)의 <反民者罪狀記, 1949>에 등장하는 박중양 기사를 보자(저자는 이 책을 저술하고 행방불명되었다).

’민간인으로 일본의 수상 하라 다카시(原 敬, 1856~1921, 일본인에 암살당함)를 만났다. ‘조선을 일본의 판도로 완전히 보유하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업(聖業)을 추진시키려면 도지사·군수의 절반을 조선인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5시간에 걸쳐 열렬히 설파하였다. 이 열변은 하라(原)를 감동케 하였으니, 박(朴)이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향하는 도중에 일본 각의는 박중양(朴重陽)을 황해도지사로 발령했다. 이렇게 그는 단번에 도백(道伯: 관찰사)이 되었으며 일본 말을 잘해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양자가 된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소위 대동아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노구를 이끌고 황군(皇軍) 위문차 싱가포르까지 갔다 왔는데, 이때의 경비 일절은 역시 반민특위에 걸린 공주(公州) 김갑순(金甲淳: 1872~1961, 윤치오의 사돈으로 대전 시내 2/3 토지를 소유한 식민지형 자본가 관료)이 제공했다.’
 
이어서 박중양의 경력이 이어지는데 반민자죄상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력을 포함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북 달성군 출생 당년 75세
관비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에 유학
4238년(1905) 한국 주전원 경무감(主殿院 警務官: 치안감 아래, 총경 위)
농상공부 주사로 대구에 파견 나왔다가 진주 판관을 겸, 재직 중 진주성 성곽 철거
4239년(1906) 대구 군수로 재임하며 대구읍성을 철거, 해체 주관
4240년(1907) 한국평남관찰사 겸 세무감
4241년(1908)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중 강제로 단발령 감행
4243년(1910) 충남 장관(관찰사)
4248년(1915) 중추원 참의
4254년(1921) 황해도지사
4276년(1943) 중추원 부의장
4277년(1944) 훈1등
4278년(1945) 귀족원 의원
 
박중양의 대구 읍성과 진주성 파괴 행위는 성안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장사하도록 한 배려였다고 하는데, 서재필과 마찬가지로 갑신정변 때, 정부의 가혹한 연좌제로 조선을 혐오하게 되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사 시설 파괴를 솔선했다고 하지만, 원래 성의 규모도 박중양 단독 범행인지도 알 길이 없다. 성이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방어기능을 했던 만큼 현재의 모형과도 같은 서울 성곽 등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을 것만 짐작해 본다. 그런데 조선 정부가 그 기능을 상실한 건 갑신정변보다 한 참 전으로, 누차 발생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망설, 각종 민란과 소요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는 차치한다.
 
만일, 반민특위가 성공해서 뼛속 깊이 친일파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박중양의 일기 수십 상자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면, ‘일제 식민지 35년’의 참 의미와 역사의 진위가 전 국민이 상식으로 공유하는 정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똑똑한 한국인이 지금과 같은 고뇌와 방황 속에 인생을 설계하면서 본성에 어긋나는 고통 속에 살지 않을 수 있었다. 과거의 역사와 현대인의 가치관을 연결하려는 이 과감(?)한 시도는, 인간이 과거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인과 사회가 사회적 진화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발전하며 공존의 해법을 만들기 위한 생을 영위할 때 가장 건강하다. 위원회 만들기 좋아하는 정치계는 반민특위 시절의 조서 자료를 공개하라.
 
아래 사진은 박중양이 서울로 압송되던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젊은 시절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일본인으로 잘 나가며 행세하던 때와는 달리, 너무나 추하게 늙어버린 모습에 경악할 정도다. 박중양은 신념형 친일파로 진실로 일본인과 일본이 조선인과 조선보다 낫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는 평균에서 조선인의 외모와 능력이 일본인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일본 관료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던 시대를 쉽게 이용한 인물이다. 역사에서 인종을 거론하고 외모를 언급하는 이유는, 사실, 역사의 요체가 ‘인종과 정치’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속성을 무시하고 이론과 사상만으로 무장한 한국인들의 겉도는 교육은 사물을 보는 관점, 사고력의 근간이 유물론적 가치에 의한 가치 전도를 가져왔던 전근대를 전혀 사고하지 못한다. 조국의 정체성과 동족의 고통을 팔아 스스로 꽃 핀 박중양의 인생, 철저한 일본인화 과정은 전쟁에 익숙해져 비극이 만성이 된 인간이 가혹한 환경에서 얼마나 역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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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출두차 서울역에서 내려 압송되는 모습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 정운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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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의 박중양 / 1922년 황해도지사 재직 시절
 
그의 조선 혐오·동족 혐오의 바탕에는 수천 년 신분제도가 공고히 해온 조선 역사를 뒤집는 근대의 자각에 편승해 자신의 신분을 극단적으로 상승시켰으나, 내면의 자기혐오와 비하의 태도가 깔려 있다. 타인이지만, 동족의 아픔을 팔아 누린 영달이 떳떳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동시기 출생자, 박중양과 이승만은 각각 1872년(또는 1874년)생과 1875년생인데 두 사람은 신분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이 없다. 이승만은 해외로 이력을 쌓았고 박중양은 국내용으로 키워진 인물이다.
 
항일 지사들도 마찬가지다. 만주, 상해, 하와이, 프랑스, 러시아까지, 각자 다른 공간에서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 민족 해체 과정에서 흩어진 사람들의 외연이 생각보다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 나간 이유가 무엇일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1800년대 중엽부터 이렇게 전 세계로 흩어진 조선인들의 후예는 지금도 750여만 명의 재외동포를 보유하는 인류사 미증유의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었다. 왜, 왜, 한국인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일본 대장성 출판 <議會制度七十年史1, 1960년>에서 박중양은 1974년생, 창씨개명 보쿠타다 주우요우(朴忠重陽), 이 희한한 이름으로 일본에 충성을 다했는지는 몰라도 문자를 써도 이렇게 단순하고 근본 없는 조어 수준이니, 후술할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 한 끼 밥도 곧 나라의 은혜다)’을 언제 어디서 썼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국립 중앙박물관이 제시한 반민특위 조사 때의 <述懷>를 완전히 공개해야 확실한 진위를 밝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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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대상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안다
박중양의 출신지는 경기도 양주, 충청도와 경상도 도지사를 역임했고, 황해도 도지사는 두 번이나 거쳤다. 일본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언제라도 도망갈 퇴로를 터놓기 위해 대구를 오가면서 살았지만, 대구만이 일본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은 아니니, 그 시절의 영토를 알아야만 그의 변명을 이해한다. 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던 대구다. 대구가 대한민국 정치사상, 가장 참혹한 탄압의 도시가 된 이유, 그 처절한 과정을 다 알게 된다면, 지금 대구의 극우화는 도시 전체로 퍼진 탄압과 세뇌의 병리적 현상의 역사다. 대구만큼 좌익(지식인)의 도시도 없지만, 대구만큼 잔존 일본인이 세력을 유지하는 곳도 없다. 살아서 숨 쉬며 생생하게 대구를 내려다보는 역사는 가증스러운 왜색을 찬양했던 자들도 함께 내려다보는 중이다.
 
박중양은 반남 박씨인지 밀양 박씨인지조차 불확실해 1896년, 어떻게 관비 유학생에 이름을 올리고 도일했는지 불확실하다. 더구나 박중양의 두 아들, 문웅과 무웅 중 장남만 족보에 올라있는데 심지어 이름이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인이 아니라면 세상에 알려질 문제가 아니었다. 남의 족보에 투탁이 필요했던 사람은 주로 잔존 일본인, 토착 왜구, 본래 출신이 미천한 자들이다. 신분을 타파한다는 게 전통을 때려 엎은 개화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왜 과거를 찾아가는 신분 세탁이 필요했을까.
 
남의 본관(本貫)과 성씨(姓氏)를 빌려 그 계보 속으로 숨어들고자 했던 신분 상승의 욕망은, 어쩌면 과거의 신분제에 대한 선망(羨望)이 인간의 본능 깊숙이 새겨놓은 정통성의 욕구이자 생물학적·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정신적 갈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신분 상승을 꾀했던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회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한국과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맺었던 일본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수현상이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딸은 배정자(裵貞子, 1870~1951), 양아들은 박중양,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범죄에 가담한 배정자에 버금가는 박중양의 친일 행적은 그가 정서적으로 완전히 일본에 경도(傾倒)된 상황을 보여주는데 황해도지사를 하던 시절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는 조선을 ‘요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간 외에 총독부 자금으로 교통과 수리 시설, 기술 교육 등의 적극적 지원을 강조했다(<朝鮮, (91) 1922> -産業に對する積極的施設を望む-). 박중양에게 조선은 요리 소재였고 그 요리를 음미하는 대상은 일본인과 일본이었다. 사찰의 비구니를 강간해 자살하게 만들어 어용 신문조차 수개월에 걸쳐 그를 공격했던 사실로 미루어 그 인성의 근본이 되먹지 못한 사람인 것이 확실하고 인성이 글러 먹은 자가 매국(賣國)에 앞장섰던 것은 극히 당연한 처사다. 이것은 현대에도 통하는 진리다, 사욕의 영달을 위해 국가 전복을 꾀하는 데 동조하는 자들이 아직도 자신들의 세상이 올 줄 믿는 마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서 이뤄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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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 1994>에는 1896년 일본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에게 올라간 효고(兵庫)현 지사 스후 고헤이(周布公平, 1851~1921)의 ‘朝鮮人動靜探聞報告, 兵發秘第280號’가 실려있다. 원래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자료를 공개하는데 일시적인지 현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연결이 안 돼 확인 전이지만, 조선인 동정 탐문 보고에 따르면 박중양은 일본에 처음 건너갈 당시 ‘박원근(朴源根)’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목적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입학으로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尹致苑, 金元福, 朴源根ノ三名十一日明石丸ニテ來リ十二日上京セリ … 朴ハ慶應義塾入學ノ爲メト唱道セリ(윤치원·김원복·박원근 세 사람은 11일 아카시마루(明石丸)를 타고 도착해 12일 도쿄(東京)로 올라갔다. … 박(朴)은 게이오의숙 입학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源根’은 박중양의 초명 또는 자(字)로 알려지나, 그의 태생과 족보만큼 불확실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도일(渡日) 후에 일본 이름 야마모토(山本)를 쓰다가 중양(重陽)으로 개명했다고도 하니, 변화무쌍한 신분 세탁과 변신에 터부가 없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1896년 박원근이라는 이름으로 첫 일본행이 맞고, 그가 유학한 학교가 게이오가 아니라, 아오야마(靑山學院)가 맞는다면 그는 20대 중반에 아오야마 중학부(5년제, 12~17세 연령대)를 다닌 것이다. 아오야마에서 ‘朴源根’, ‘朴重陽’ 두 이름 다 실명 확인하지 못했는데 정확한 입학 연도와 졸업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탓도 있다. 또한, 그가 다녔다는 학교 아오야마는 미국 선교사 3명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기에 만든 학교의 총칭이기 때문에, 캠퍼스의 위치와 교명(校名)이 달라서 일수도 있지만, 일본으로 가기 전 조선에서의 학력과 이력이 불분명한 상태부터 재검토되어야 하는 인물이다.
 
구한말 초기 일본 유학생 관련 논문인 ‘旧韓末と併合初期における韓国人の日本留’ (朴己煥, 『近代日本研究』 (14) 1998)에는 아오야마라는 학교가 연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1910년대 조선인 유학생, 특히 明治・早稲田・中央・日本・慶應 등 주요 고등교육기관에 재학한 유학생들을 수량적으로 조사했다. 1999년 <역사와 현실, 제31권>의 ‘1890년대 후반 도일(渡日) 유학생의 현실인식 –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에서 박찬승은 1895년 조선 정부가 파견한 151명의 관비 유학생들의 일본 내 친목 조직과 그들의 현실 인식과 분열(금전 문제) 과정을 그렸지만, 박중양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2004년 논문인 ‘青山学院と戦前の台湾・朝鮮からの留学生’ (佐藤由美, 『日本の教育史学』 47)에서는 아오야마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을 205명이라고 집계했는데, 1906년 이전의 유학생은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어 박중양의 일본 유학 시절에 대한 소명은 충분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이 애국지사 ‘한인(韓人) 박원근(朴源根, 1912~1950)’의 유묵으로 알려졌다가 박중양의 글씨라고 정정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해프닝으로 독립운동사 박원근 지사를 욕보였는데, 국가기록원의 박중양 자료 대조에 따른 정정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이해에 한계가 생긴 점 유감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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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박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서 일반시국은을 먹는 ‘밥’과 연결한 유홍준 관장의 수준과 실제 박원근(朴源根, 1912~1950) 지사
 
이처럼, 여러 이름의 사용과 호적 이름의 불일치, 생년 불확실 등 모호한 신분 정체성을 숨겨온 박중양의 이력은, 현대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에서 볼 수 있는 정치 정체성과 유사한 양상이다. 확고한 친일 이념과 달리, 개인의 치부(恥部)를 감추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밥 한 끼, 한 숟가락의 의미조차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스스로 미화한 과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박중양 유묵에 대한 논란은 자료가 확보되는 대로 정리할 예정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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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04
6
반민특위의 실패는 단순히 한 위원회의 좌절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어떤 과거를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사관들의 증언과 당시 자료를 다시 살펴보자는 글의 문제의식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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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dong
8
박중양이라는 한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친일 문제를 단순히 몇몇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의 기록과 재산, 사회적 영향력이 어떻게 이어졌는지까지 살펴봐야 과거사 청산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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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無十日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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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반민특위 자료를 더 공개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역사 문제일수록 후대의 해석보다 당시의 조서와 증언, 문서가 중요합니다. 자료가 충분히 공개되어야 서로 다른 해석도 사실을 바탕으로 토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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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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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가장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친일 행위자의 이름을 반복해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구조 속에서 권력을 얻었으며 해방 이후 그 구조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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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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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사람을 심판하기 위한 기록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는지를 알아야 현재의 사회가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민특위와 박중양에 관한 자료를 다시 들여다보자는 글의 취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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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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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의 행적을 통해 개인의 친일 행위만이 아니라 식민지 권력에 편승해 형성된 사회적 구조까지 들여다보게 됩니다. 결국 과거사 문제는 특정 인물을 욕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권력과 부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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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
3
무엇보다 기록의 공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반민특위 당시의 조서와 조사자료, 관련 인물들의 기록이 충분히 공개된다면 감정이나 정치적 해석보다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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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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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가 왜 실패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권력관계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역사적 장면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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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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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친일 청산이 좌절된 과정이 이후 한국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역사를 현재의 정치적 구호로 소비하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차분하게 복원하는 작업이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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