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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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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인물(13) 김가진(金嘉鎭), 1846(憲宗1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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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8. 09
  • 김가진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낙인찍혔으나, 그의 생애는 단순한 이분법적 평가를 넘어 복합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 그는 대한제국 관료로서 근대 개혁에 참여하고 독립협회 활동에 가담했으며, 말년에는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 특히 상해 망명 시 남긴 시들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며, 그의 행적을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복잡한 고뇌와 선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피상적인 사실이나 이분법적 잣대 대신, 당시 시대상황과 인물의 전 생애에 걸친 행적을 면밀히 재조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용당한 이름, 김가진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황실령 제14호(1910년 8월 29일 제정, 1910년 9월 6일 시행)조선 귀족령에 따라 公·侯·伯·子·男의 5등급으로 나눈 귀족 작위 중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이 보류된 친일파로 낙인찍힌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친일파로 낙인찍히지 않은 사람은 외세 침입에 자살하거나, 싸우다 죽은 자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끼리의 소통 혹은 불통인지라, 수천 년 문명의 터전을 몽땅 빼앗긴 조선인과 그것을 몽땅 빼앗아 체득하기 위해 쳐들어온 적과의 접촉은 필연이고 유일한 길이다.
 
피상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정부의 독립유공자 서훈, 친일인명사전 등재 등의 이분법으로는 식민사관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이분법조차 악용될 수 있으니, 상벌의 요식행위보다는 당시 사건과 결과를 처음부터 다시 연구하는 게 훨씬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은 추상적인 문학에도 감동하고 동기부여를 얻지만, 사실관계 정립에서 훨씬 편안함을 느끼는 동물이다. 동식물에 있어 파괴된 자연이 그들의 서식에 악영향을 끼치는 만큼, 인간에게 가짜 역사는 혼돈으로 정신적 착란을 유발하는 악습이다. 이 착란은 단발성 장난에 그치지 않고 대를 넘어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관계상, 사회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으로 생성된 암울하고 음모에 찬 루머에 젖을 수밖에 없다. 진상을 호도하는 세상은 정작 진실에 관한 흥미를 잃게 하고 게임 세계에 몰두하게 만든 시대, 역사는 정의의 편이 아니라, 뺏은 역사 기록물을 재편한 자의 편이 된 결과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 인물 중에 서사의 유불리가 확실한 인물일수록 의심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김가진은 그런 의미에서 그물에 걸린 고래처럼 힘은 못 쓰고 상징으로만 남은 대한제국의 한 관료로 평가하고 싶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같은 장소의 다른 국호인데, 두 서사가 모두 한반도 안에서 벌어진 인간사였을까. 동농이 주일공사·농상공부대신·중추원의장 등을 지내며 외교 업무와 근대적 제도의 개혁에 참여하던 이력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인가, 이런 시공의 일체성에 의심을 품는 터부시되는 의문을 뺀 몇 가지를 제시해본다.
 
 
헷갈리는 서사는 다다익선이다
첫째, 작위 수여의 진위와 조선호족령이다. 작위(爵位)나 책봉(冊封)의 히에라르키는 중국에서 시작된 문명의 조직 원리지만, 1912년 중화민국 수립과 함께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관련 연구는 영국과 일본이 계승했다. 학술적 연구 계승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에서 실제 위계질서에 대입했으니, 이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코미디다. 서양에서 공부한 엘리트라면 들어봤음 직한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가 대신 중국 역사를 정리했으니, 침략자의 논리다. 일본은 서구의 전폭적 지원과 강한 압력으로 개혁개방에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고 1884년, 듣도 보도 못한 ‘화족(華族)’제도를 만들어 조선 황족을 왕족으로 격하하고 그 가문에 일본인을 들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현대 중국도 일본도 이렇다 할 작위 제도 역사는 언급하지 않는다.
 
김가진은 외교 관리인데 갑신정변 때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고종과 민비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사건마다 등장인물이 다르니, 배우가 다른 연극을 한 무대에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김가진은 갑오경장 후 본격적인 중앙 정치에 나섰고 상무회의소, 건양협회,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공원, 만민공동회가 생기는 데 가담해 차츰 그 이력은 친일 계로 분류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다. 영은문은 처음엔 영조문(迎詔門)이었고 1537년에 세워졌다가 임진란 때 소실되어 1606년에 재건되었다. 중국 황제의 조칙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의미인데 국경이 아닌, 서울 한복판에 明 사신 영접 의례의 상징문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해석이 등장해 문을 파괴하고 독립문을 세운다. 이 역시 중화 제국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독립문 건축의 배경에는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해 독립협회(1896년 7월 2일 창립)를 만들고 독립문을 세워 중화주의를 배격하고 미국식 종교와 정치를 선전하기 시작하도록 도운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가 있다. 헐버트는 독립신문(The Independent)영문판 편집 책임자로 인쇄기 제공자였다. 그 시절 인쇄기는 대중 계몽이 목적이고 특정 역사관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계몽은 세뇌(brainwash)에 속한다.
 
독립문 현판 편액은 당초 이완용의 글씨로 알려졌으나, 서재필의 글씨체라고 정정되는 분위기가 굳어진 상태다. 2025년 경기도박물관도 전시에서도 김가진 글씨로 분류했다. 이것은 시아버지 김가진과 6.25 사변 때 피랍된 남편 김의환(金毅煥, 金載漢, 1900~1964)을 따라 상해로 망명한 며느리 정정화(鄭靖和, 1900월~1991) 자서전 <長江日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장강일기의 초판인 <녹두꽃>에는 독립문 편액을 시아버지가 썼다고 나오지 않는다. 초판과 개정판의 비교는 이럴 때 필요하다. 독립문 건축관계자인 서재필이나 김가진이 썼다면 이해가 가지만, 이완용이 썼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미국인 헐버트의 ‘독립’과 이완용의 ‘독립’이 일맥상통한다면 이는 식민사관에 낭패다. 이승만의 생애 목표인 ‘독립’마저 연상되면 더욱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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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김가진의 아들 항일운동가 김의환(金毅煥, 金載漢, 1900~1964)
(우) 김의환의 처이자, 김가진의 며느리 항일운동가 정정화(鄭靖和, 1900월~1991)


영은문의 존재에 대한 반대 해석, 그 자리에 중국의 속국 체제에서 벗어난다는 기쁨의 모뉴먼트여야 하기에 공직에서 이름 있는 김가진이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서재필은 친미 이미지가 너무 강해 역효과가 날 수 있고, 이완용은 친일 이미지가 개똥만도 못한 이름으로 전락한 문장가다. 지금도 원한다면 지방의 골동품상들이 이완용의 글씨를 구해준다. 그는 달필이었지만, 역사는 그에게 침을 뱉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돈을 주고 사는 사람은 없다. 팔은 안으로 굽기에 유전적 동질성이 큰 인물에는 관대하고 일본인이라는 인종의 본래 성정과 그 혼혈에는 혐오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김가진이 독립문 편액을 썼다는 편집으로 그의 행위 전체가 오도되어서는 시대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러면 동농은 왜 淸과 일본의 득세 시기, 자살하지 않고 여러 관직을 수용했을까. 청일 전쟁 이전의 외세는 보이는 것과 달리 서양 세력이 숨겨져 있어 역사가 자주 우려먹는 청과 일본 사이의 줄다리기 서사 전략은 하나의 페이크 기법일 수 있다. 화가이자 작가인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 1865~1924)는 <Corea or Cho-Sen, 1895>에서 말총 정자관을 쓴 동농의 초상화를 그리며 나눈 인터뷰에서 매우 똑똑한 김가진을 서술했다. 갑신정변 후 적서차별을 없애,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어 수천 년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갈이 작용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갑신정변의 보복으로 수많은 공직자 단체사망(좀비를 외세로 본다면, 사대문 안, 구중궁궐 내에서 벌어진 살육의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킹덤 시리즈를 떠올리면 된다)이 서얼 폐지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랜도어가 실물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다면 김가진과 랜도어와의 만남은 여러 차례였을 것이고, 사진을 찍어 사진을 보고 그렸다면 만남 기간은 단축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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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비지가 그린 동농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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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또 한 장의 초상화가 있다. 김가진 환갑이던 1906년(光武10)에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2025년 경기도박물관 특별전에 선보였다.
(우) 우측 상단에 한문으로 ‘종1품 훈3등 전임 법부대신 김가진 연 60 안동인 호 동농


이 초상화는 대한제국 문관 대례복과 대례모로, 모자 스타일은 양쪽을 접어 올린 이각모로 바이콘(bicorn) 즉, 서양식 모자다. 모자의 왕국 조선이 상투에서 민머리로 변하고, 마지막 대신이 나폴레옹이 쓰던 바이콘까지 옆구리에 끼게 된 세월의 변화, 이 시기의 상전벽해는 인간의 관습과 인식이 어떻게 무너지고 적응하는지 이 초상화 한 장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이 초상화의 화상찬(畵像讚)은 김가진 본인이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 이 역시 서체만으로 주장하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하다. 그림은 일본인 ’덴케이(田慶)‘가 그렸다고 관지(款識)가 남아 있는데 이 이름을 쓰는 화가는 없다. 경기도박물관은 전경이라는 화가가 누구인지 확인 가능한 자료를 밝혀야 한다.
 
랜도어는 고종의 초상화도 그렸고 민비의 친척들도 만났다. 그럭저럭 제국이 굴러가는 모양새를 취하며 서구와 일본이 시간을 벌던 이 시기, 김가진은 대한제국 관료의 상징으로 필요한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추론은 가능하다. 나폴레옹 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환갑 나이에 대한제국의 고관으로 지냈던 그는 전 세계에 조선의 조정이 제국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이자, 체계 정당화의 마스코트였는지 모른다. 그것이 애국이요, 필요한 사명을 다한다는 의식이었겠지만, 세상은 두뇌 명석한 그를 감쪽같이 속였다.
 
민족운동가의 시는 암기하면 되니까 날조되지 않았다
둘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3일 만에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자결했고, 김가진은 대한협회(大韓協會) 회장에 취임해 국가의 주권 회수를 주장하며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자고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一進會)에 맞섰다. 그의 나이 59세, 굴욕과 회한의 날들이 펼쳐지게 된다. 1910년 경술년 8월 29일, 대한제국 4년 차에 국내 친일파들은 한일합방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입으나 마나 한 관복과 얻으나 마나 한 관직의 시간이 갔어도 며칠 만에 내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고사한 인물도 있다. 세상이 아직 어떻게 돌아가는지 김가진은 알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출세나 물욕만이 아니라, 권력을 얻어서라도 나라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믿고 싶다. 실제 말년의 행동은 그랬고 그 의지는 아들과 며느리에까지 이어졌다.
 
1919년 3·1운동 후에 김가진은 두 번째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 조선민족대동단)을 만들어 총재로 추대되지만, 10월에 가족과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을 떠났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고문이 되었다. 대동단은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을 상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했으나, 도중에 중국 安東(현재 丹東)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알려진다. 1920년 3월에는 총재 김가진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하고, 대동단의 고광원(高光元)·나창헌(羅昌憲)·박용만(朴容萬)·손영직(孫永稷) 등과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위한 자금모집이 시작된 것이다. 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거나 죽이기 위해 상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의친왕을 조선의 적통으로 간주한 김가진의 행동은 두고두고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밀정은 간첩, 영어로는 spy, foreign agency로, 19세기는 전 세계에 간첩이 직업인 사람의 시대이기도 했다. 다음 20세기는 간첩을 다 죽였던 시대, 간첩을 부린 세계 각국의 단체와 기관, 개인이 자신들의 과거를 지운 시대였다. 간첩으로 호구지책으로 삼았던 자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호도하기 위해 엄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던 세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일인 줄 알지만, 인간은 자신들의 행위를 뇌가 기억하는 존재로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감투를 선호한 조선인 김가진은 신분과 핏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상과 한계에도, 마지막에 불편하고 망하는 길에 목숨을 걸었다. 수천 년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한 관리로서 민영환은 자결로 속죄했지만, 김가진은 고행길을 택한 것이다. 누가 더 힘든 길을 갔는가, 그들과 인터뷰하고 싶다.
 
김가진이 상해로 떠나면서 쓴 시(1919년 10월)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일부라고 하는 것은, 한시의 전승과 보관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처럼 사회적 이력이 사진으로 파노라마처럼 남아 있기는 힘들다. 마치, 각본에 따라 영화처럼 역사 인물을 정해놓고 만들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다. 동농은 그들의 간계를 알아차릴 만큼 약지 않았다. 하긴, 그들의 간계는 현대 한국인도 거의 판단의 잣대조차 없다. 세뇌란 뇌를 깨끗이 씻어버리는 효과가 있고 문자와 사상, 역사와 기록을 재편한 그들의 계몽을 수용한 대가는 참혹하다.
 
다음 한시 두 수는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에 처음 공개된 ’金嘉鎭翁來滬‘라고 하는데 호(滬)는 구 상해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國破君亡社稷傾 나라는 망하고 임금마저 돌아가셔 사직이 기울었는데
包羞忍死至今生 치욕을 품고 죽음을 참아 오늘까지 살아왔네
老身尙有沖霄志 늙은 마음에도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있으니
一擧雄飛萬里行 한 번 힘차게 날아, 만 리 먼 길 떠나노라.


民國存亡敢顧身 나라의 생사가 달린 때에 어찌 내 한 몸을 아끼랴
天羅地網脫如神 하늘과 땅을 뒤덮은 감시망을 귀신같이 빠져나왔네
誰知三等車中客 삼등 객차에 숨어 탄 이 초라한 승객이
破笠麤衣舊大臣 해진 삿갓과 거친 옷을 입은 옛 대신인 줄 누가 알았으랴.
 
상해 서울 간 해리(海里)은 현재 직선거리로 약 870km 정도로, 1만 리의 시적 표현을 실제 거리로 환산하면 약 1만 8,500km로 지구 절반의 바다 길이가 된다. 왜 김가진은 굳이 만 리라는 표현을 썼고, 이 시는 자유롭게 원문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을까.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별세 직전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아래의 한시는 김가진의 광복 의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자주 인용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김가진의 시를 전승으로 한정하는 치사함을 보여 준다. 가짜는 회자되어 진짜처럼 군림하고 진실은 묻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독립신문 상해판을 소장하는 기관과 대학은 자유롭게 열람을 허하라.
 
白髮丹心在 백발이 되었어도 붉은 충정은 그대로 남아 있고
黃泉一夢歸 황천으로 돌아감은 한바탕 꿈과 같을 뿐이다
他年光復日 훗날 나라를 광복하는 날에는
應見舊山河 반드시 옛 강산을 다시 보게 되리라.
 
동농은 옛 강산을 반드시 다시 보겠다고 다짐했으니, 고향에서 다시 태어나겠다고 염원한 셈이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지만, 사람이 죽으면 사람이 나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인도에서 죽으면 인도에서 태어나고 호주에서 죽으면 호주에서 태어나는가? 김가진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노래하고 있을까. 아들이 피랍되고 며느리가 홀로 모진 고생을 다 했어도 이 나라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상벌 주의와 형식주의의 요식행위, 유치한 짓을 그만하라. 그 세금이면 벌써 역사를 풀어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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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福
8
김가진을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한 줄로만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에 공감합니다. 역사적 인물은 어느 한 시점의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전체 궤적 속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특히 말년의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까지 함께 놓고 보면 훨씬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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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a77
8
역사는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아니라 당시의 선택과 결과를 복원하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김가진처럼 전반기와 후반기의 행적이 크게 달라지는 인물을 기존의 친일·독립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면 오히려 역사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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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영식
6
김가진의 경우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910년의 남작 작위와 1919년 이후의 항일 행적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모순과 변화를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역할 아닐까요. 불편한 인물일수록 더 정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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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_C
6
민영환처럼 자결한 사람만 애국자이고, 살아남아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는 식의 평가는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물론 작위 수여와 식민지배 협력 여부는 엄중하게 따져야 하지만,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동일한 무게로 검토해야 합니다. 상해 망명과 대동단 활동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행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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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74
5
누구를 독립유공자로 만들고 누구를 친일파로 낙인찍느냐보다, 그 시대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가진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대한제국 말기와 식민지 전환기의 복잡한 권력관계까지 다시 들여다보자는 글의 취지가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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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5
역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지나치게 깔끔한 서사인 것 같습니다.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게 애국과 매국, 저항과 협력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김가진의 삶처럼 모순과 변곡점이 많은 인물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역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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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ksh
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을 끊임없이 검증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독립문 편액이나 김가진의 한시처럼 자료의 전승 과정에 의문이 있다면 기존의 정설을 반복하기보다 원자료와 초판·개정판을 비교하고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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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yug
4
김가진에게 남작 작위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분명 기록하고 평가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실이 1919년 상해 망명 이후의 행적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면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전 생애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자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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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3
김가진의 마지막 선택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편안한 삶을 버리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가 과거에 어떤 선택을 했든, 말년의 행동까지 지워버리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역사적 왜곡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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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82
2
김가진이 왜 작위를 받았는지, 왜 끝내 상해로 떠났는지, 그 사이에 어떤 국제정세와 인간관계가 있었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상벌의 명패를 붙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바로 그런 작업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진짜 공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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