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호(南湖) 이종만(李種萬)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일제강점기의 사업가요 교육가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에 전쟁 자금을 헌금했고 당시 최고 선동 언론인 <삼천리>나 <매일신보>에 전쟁 독려 글을 기고했다. 총독부 산하 전시 체제 동원 단체와 내선일체 강화 교육단체에서도 활동했으니, 누가 봐도 친일 인사다. 그렇다고 21세기에 들어서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아내는 후손은 과연 떳떳하기만 할까. 건국 훈장이 필요한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중요한 사람이다. 직계 조상의 친일 활동전력이 후손에게 주는 데미지가 크다는 걸 숙지하고 있어 어떻게든 공적을 평가받아 가문의 위계를 높이고 그 효과를 누려야만 한다. 한국 사회는 친일 행위에 대한 주홍글씨를 피하는 제도를 이용하는 부류가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다.
역사 인물 이종만에는 동명이인 동학군 별동대장 이종만(李鍾萬, 1870~1956)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공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동학 의병과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시대의 전모를 모르면서 식민지 때 친일파 운운하는 것은, 연구 공백을 정치화하며 대중을 한쪽으로만 선동하는 기만술이다. 누군가의 친일은 희석해서 독립운동가로 갈아타지만, 일본 대중문화는 가랑비에 옷 젖듯 퍼뜨려야 하는 암묵적 이중성은 과거의 식민지 향수를 음습하게 연출해 단순한 이념 논리로 편향적 사회 정서를 만들어내며 한국의 발전을 발목 잡는다. 사회의 균형발전에는 관심이 없으며 극히 일부만 잘살면 되는 논리, 이것이 현재 세계 모든 기득권 속내다.
국민 정서와 대치되는 친일 정서 함양 집단이 버젓이 양립하는 상태에서 개인 이종만의 일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도 그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 동학의 의의와 의병 활동이 폄훼되고 그다음 세대인 이종만의 친일 행적만 부각하는 이상한 한국은 반 친일 정서를 친일 정서로 승화하는 작업을 학계가 맡고 있으며 미디어가 이를 견인하기 위해 친일을 대중문화로 잠식하려는 노력을 감추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이중 잣대는 국가적으로도 모순이다. 더욱이 그가 광산업에 성공해 한반도 면적의 1/100에 해당하는 토지의 소유자였던 걸 생각하면 그를 연구하지 않는 건 역사에 대한 반역이자, 회피다.
그 시대 인간적인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종만도 전쟁고아를 자신의 호적에 넣은 사람이었다. 가난을 밥 먹듯 하던 시대였지만, 고아들을 여러 명 옆에 끼고 제 새끼들과 함께 재우고 먹이던 인정을 아는 시대였다. 나라가 망했어도 동족의 고아를 데려다 키우는 성정의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남북 분단을 종용한 적은 없다. 다만 외세의 개입에 부채질 당해 이제는 이 분단이 사업이요, 가치인 부류가 존재하는 모순을 인정해야 다음 단계가 보일 것이다.
이종만의 장남 영조(永兆)의 막내딸의 아들은 영화배우 강동원이다. 그리고 막내딸 남순(南順, 1922~2013)의 딸 중 한 명은 현재 미국의 배우이자, 교육철학 박사 김반아(Vana Kim Hansen 朴恩明, 1946~)다. 유독 외증조부의 행적을 찾아 한국을 오가며 민족 지도자 이종만을 연구하고 있다. 이종만의 막내딸 이남순은 해방 전, 일본여자대학 사범과를 나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6.25 발발로 인해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학생들 앞에서 반동분자로 공개비판을 받았다. 서울 수복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을 구형받고 형무소 생활을 거쳤다. 시인 노천명도 같은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은 적이 있고 평생 친일 활동의 굴레를 쓰고 살았다. <이화여대 70년사>를 집필했어도 필요하면 갖다 쓰고 버려지는 신세가 된 점에서 이념은 한국인의 단단한 올가미였다.
이남순 / 김반아 / 강동원
이남순이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는 피난 과정에서 경험한 전쟁의 참상은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과 이념의 갈등에 대한 의문을 평생 품고 사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삶에서 개인보다 민족, 뿌리를 생각한 행동의 동기가 되어 자녀교육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막내딸 이남순은 아버지의 믿을 만한 사업적 제자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으나, 4.19, 5.16을 거치며 1964년 브라질 이민을 떠났다. 당시 방송은 조국 재건과 새 나라 건설이 슬로건이었고 무궁화 새로 피는 이 땅의 당시 병역제도는 반전사상 고취와 함께 실탄 사격과 군 내 가혹 행위 등이 문제가 되었다. 전쟁 직후라 총을 쏘는 살인 행위를 꺼려 병역을 피하기 위한 가족 단위 브라질 이민이 유행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북으로 간 아버지 이종만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시선이 자식들에 미치는 걸 우려한 선택이었을 걸로 보인다. 지식인 월북자, 지식인 피랍자에 대한 남한 독재 시대의 딱지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인재를 유출하게 했는지 바로 이종만의 막내딸의 2남 2녀가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학 박사, 인류학 박사, 교육철학 박사이자 미국 배우, 옥스퍼드대 로즈 스칼러이자 국제영성지도력 센터 에미서리의 대표가 되었다.
좌) 1949년 서울. 왼쪽부터 둘째 박은명(반아), 어머니 이남순과 장남 세진, 장녀 옥경.
우) 2006년 귀국해 제주에 정착한 모친이 2011년 뇌수술을 받게 됐을 때 각국에 흩어져있던 4남매가 모처럼 모였다. 왼쪽부터 사회학 박사 박세진, 인류학 박사 옥경, 교육철학 박사 은명(반아), 한국 에미서리 대표인 막내 유진씨.
이종만이 1, 2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사업이 망하고 확장하는 한편 민족 지도자로 농업 광업 잡지를 발행했고 민족 교육에 힘썼던 사실은 왜 묻혔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가 창씨개명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창씨개명 역시 친일파를 규정하는 기준의 하나지만, 이것은 이분법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초보적 수준으로 진정한 친일파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활동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화신 백화점의 박흥식이다. 박흥식도 친일 기관지에 기고하고 인터뷰했다는 점에서 이종만과 같지만, 박흥식은 어용 신문잡지가 찬양한 기사가 훨씬 많으며 그의 여성 편력은 시대의 가십이기도 했다. 한국의 많은 인사가 창씨개명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창씨개명은 출생신고만큼 당연한 행정 과정이었기에 창씨개명 논란을 부추겨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는 배경이 누구인지 찾는 것이 더 쉬운 연구 방법이다.
만일 이종만의 외증손자들이 외증조부의 친일 논란과 월북 문제로 인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지 않았다면, 잘 나가는 영화배우 강동원도 외증조부의 친일 논란에서 벗어났다면, 이들 가문의 활동력은 사회의 각계에서 기여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창씨개명 등 눈에 보이는 단순한 친일 행적으로 지식인 세계를 분리하고 솎아내는 단죄 뒤에서 성장하는 잔존 일본인 세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종만의 월북 역시 그 잔존 일본인 세력과 미군 정청 아래 일제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변질하는 민족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치 오늘날 북한의 일인 독재에 염증을 느낀 동포들이 탈북해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 교육을 마친 뒤, 남한 개신교 교회로 입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숭배를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해, 다시 교회로 들어가 선민사상에 젖는 모습은 이 나라가 아직 온전한 식민지 및 전쟁 후유증 회복을 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중에는 서구권의 꼭두각시가 되어 남한도 북한도 저주하는 연설을 자청하는 자도 있다. 이 비극은 타자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 굴레를 벗는 길은 우리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종만은 고종 때 사람이지만, 신분의 위계를 일찍이 벗어던진 자주파로 양복을 입고 개화한 뒤, 사업가이면서 대동단결을 위해,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이종만을 연구하려면 그가 소유했던 토지 7억6천 평에 대한 용도 활용 즉, 광산 사업가로서의 면모부터 파악해야 한다. 아니, 한반도 토지 면적 약 665억 평의 1/100에 달하는 토지를 개인이 소유했던 기록이 의미하는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 전쟁은 또 어떠한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이어 중일전쟁에까지 휘말린 한국인 역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본의 아시아 패권을 노린 수작 뒤에 있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그 논리를 알아야 한다. 이런 거대 담론을 단 하나도 진전 없이 이분법적 시각으로 학계와 문화 전반에서 이종만을 다룬다면 강동원의 잃어버린 10년처럼 이종만의 막내딸의 수십 년 타향살이를 누가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정계 인사 가문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아서 이종만을 몰라도 괜찮을지 모른다. 경성고학당의 운영주로서 대동출판사 사장을 역임하며 <공업 조선> <농업 조선> 등의 잡지를 간행했고 서유구가 편찬했던 <누판고>를 1941년 벽초 홍명희의 교정을 고쳐 인쇄했다. 누판고 하나만 보더라도 이종만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가 항일 운동가로서 민족 지도자로서 교육 계몽에 매진했던 이력과 광산업자로서 사업가 이종만의 이력은 한국 경제사를 다시 써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민족 운동에 자본을 댔던 사업가 이종만은 해방 후 월북 행적으로 인해 과거 독재 정부가 완전히 업적을 폄훼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어 친일인명사전 1급 친일파로 올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독한 월북 지식인 비난과 반공사상의 그늘에 가려 있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삶 중에서 이종만 만큼 현실에서 실제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왜곡된 이력으로 남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어쩌면 북한이라는 괴뢰 정부 수립은 한국인 말살 정책의 결과이자 과정이요,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싸울 줄 알아도 싸움을 피하고, 총 쏠 줄 알아도 총을 잡지 않는 우리 민족이 서로 총을 겨눌 땐 그만한 설계가 장구히 이어져 온 역사가 있다.
홍해를 가른 모세의 기적은 믿으면서 식민지 근대 전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흑백논리로 단순화하는 프레임은 사안의 본질을 외면하도록 오랜 시간의 공을 들여온 한국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거울을 봐도 보이지 않으며, 지도를 봐도 고향을 찾을 수 없으며, 한자를 보고도 읽을 줄 몰라서 어디가 어디에 붙었는지 모른다. 눈을 가리고 입과 귀를 막은 두 손을 펴서 내려다보자. 뛰어야 부처님 손바닥이라는데, 이종만 그 한 명의 삶만 제대로 알아도 나라가 산다.
유진을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잘생겼고 격조가 느껴지는 품격 있는 학자였다. 가까이 마주 보고 앉았지만, 의식은 저 먼 곳을 오 가며 또박또박 쉽게 설명해주었다. 듣는 자를 배려하는 그는 고고한 학처럼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품고 있다. 9세에 한국을 떠나 브라질로 간 청년이 29세에 동학을 찾아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서구로 간 그가 동양을 찾아 돌아온 고국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자료를 내주었을까. 가슴이 시렸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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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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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을 단순히 ‘친일’이라는 낙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종만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의미 있지만, 동시에 역사적 책임에 대한 평가 기준도 함께 정교해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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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8
이 글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식민지와 분단의 기억 속에서 이분법적 판단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으로 읽힙니다. 특정 인물의 재평가를 넘어서 역사 서술의 기준과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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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soo88
6
박흥식과의 비교는 매우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선택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유의미하지만, 각 인물의 구체적 맥락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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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79
6
이종만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서사를 통해 한국 사회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선택성이 특정 방향으로만 작동한다고 단정하는 부분은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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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5
동학 농민 운동과 식민지 시기의 맥락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친일 행위 자체를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경우 설득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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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5
후손들의 해외 이주와 학문적 성취를 통해 시대적 억압을 설명하는 부분은 인상적입니다. 개인의 삶이 정치적 낙인과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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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4
친일 논란과 독립운동 서훈 문제를 연결하는 대목은 한국 사회의 기억 정치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공과를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과오를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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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er7
4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평가의 무게를 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인상 깊습니다. 개인과 가문, 그리고 사회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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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원
3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식민지·전쟁·분단이라는 연속된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가 형성된 과정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감정적 판단을 넘어서 보다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역사 이해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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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有三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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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평가가 얼마나 단편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는지를 깊이 있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식민지 시기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개인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매우 본질적이며,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 자체를 재고하게 만드는 통찰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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