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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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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인물(10) 조용하(趙鏞夏), 1882(高宗19)~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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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03
누구나 역사 인물로 남지는 않는다. 19세기 들어 수천 년 이어온 문명의 멸망기를 살았던 인물을 알리는 작업은 깊은 바다 밑에서 모래알을 건져 세는 작업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모래알 세는 사람(Psammites)이 된 심정을 소개하자면, 우주를 채우는 모래알만큼 많은 조선인이 조국의 주권과 영토 수복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 진실을 깨달아가는 고통(pain)이다. 아픔이 고독으로, 고독이 다시 분노로. 분노가 허탈로 변하는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는 기분은 괴롭다. 고로 우주에 채울 모래를 세는 작업은 인간 심연의 철학이 무엇으로 채워졌던 시대였는지, 과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유다.
 
영토와 국민이 실재하는데 주권이 없는 지금의 한국인은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았던 선조가 하나뿐인 목숨을 무엇을 위해 내 던졌는지 숨기고 있는 사실의 왜곡을 이해할 수 없다. 추상적인 국가관에 아무도 애국심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오늘, 이 나라는 과연 그들과 같은 혈통이기는 할까, 그 변화무쌍했던 전쟁 시대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HSP를 자극하는 오만가지 상념을 앞에 놓고 특정 인물을 선택하는 것도 죄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들을 선별할 수 있단 말인가.
 
구심(求心) 조용하(趙鏞夏)는 조카의 왕위를 뺏은 세조를 비난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항명하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 중 한 명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16대손 조정규(趙禎奎)의 장남이자, 소앙(素昻) 조용은(趙鏞殷)의 형이다. 무려 500여 년 전통을 이어온 가문, 경기도 이천군, 또는 양주군 출생으로 되어 있는 명문가다. 1901년 대한제국 주독(駐獨)·주불(駐佛) 공사관의 참사관 또는 서기관이었는데 당시 다섯 살 아래인 아우, 소앙에게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주어 세계관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항간에는 조용하가 베를린에 유학 중이었다고 표현하는 기사가 있고 실록에도 이름이 올라 있지 않지만, 대체로 공직에 있었다는 서술이 훨씬 많아 나이에 비해 매우 이른 나이에 관직에 올랐던 인물인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독일에 주재하던 형은 경기도 양주에서 한학을 배우는 아우에게 어떤 경로로 세계정세를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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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조용하가 나온 관립 불어 학교는 1895년 5월, ‘외국어학교관제’를 공포해 실시된 프랑스어 역관 양성 기관이다. 두 달 전인 3월에는 ‘법관양성소규정’을 내서 속성으로 배울 수 있게 학생을 모집했다. 외국어학교와 법관양성소 개설이 고종의 칙령이라고 하지만, 거의 새 정부를 조각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잦은 법령 공포는 서실 갑오개혁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1882년부터 1895년 사이의 근대 4대 비극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왕조사의 말기를 장식한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당시 언론 보도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보도하지 않아 자세한 사실관계를 알 수 없다. 구한말 가장 난해한 사건으로 점철된 이 부분을 다각도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말장난 같은 역사 폄훼 기조가 후대에도 이어져 자학적 역사관의 관성이 여전하다.
 
갑오경장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혁명의 이미지만 강조해와서 이미지 정치에 이미지 역사서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습성이 이때부터 생기지 않았을까. 오늘날의 사건 사고도 정당과 개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언론과 미디어가 정반대의 기사를 내고 있는데 백여 년 전에야 더 말할 게 없다. 신분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도 달랐을 것이고,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아래에서 알 재간이 없었다면 진실은 이미 그때 묻혔다고 볼 수 있다. 독일과 경기도 양주로의 정보 전달, 약관의 나이에 외국 생활을 맡아야 할 만큼 나라에 인재가 없어진 정황, 관직에 오른 임명자들을 기록한 국조보감에서도 이 시기 관리를 기록한 부분은 나오지 않는 당시 국가의 상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이 구한말 4대 비극 사이에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이 끼어 있는 사실을 개별 사건으로 축소해서 민란으로 서술했고, 타국의 전쟁에 영토를 내준 것처럼 기이한 역사서술 방향성의 문제다. 동학을 신분제 갈등이나 정부에 대한 민심 불만으로 묘사하고 국민에 대한 장악력을 잃은 부패한 왕족이 외국 군대를 빌려 반란을 처리하다 국제 전쟁에 휘말린다는 삼류 역사소설 만들기는 균형이 맞지 않는 스토리다. 시대 배경은 장황하고 사건이 발생한 공간은 비좁다. 이 작은 한반도에서 그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도 이 시기를 분석한 역사책이 과할 만큼 많다. 이 두 사건의 발생 장소에 대한 확장성만 갖춰진다면 이 상황을 단순한 개별 사건으로 교육받은 한국인의 역사 지식에 문제가 있다는 건 금세 깨달을 수 있는 일이다.
 
젊은 조용하의 관직 임명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일이라, 새로운 개혁의 동력으로 삼기에는 모호한 시기다. 신식 관리를 뽑고 교육했다는 갑오개혁은 어쩌면 조선이 이미 멸망했고, 심지어 노련하고 충성심이 충실한 조선의 관리들이 전부 처단당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는 지식인들이 다 죽었으면 식민지 삼기에 손쉬워진 일인데 새로운 관리를 왜 뽑아 저 멀리 독일 프랑스에까지 관리를 파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근대 개혁이라는 건 아시아의 어느 공간에서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작업이라, 함부로 근대화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무시당한다. 세간의 시선은 조용하가 일제의 학제를 따랐고 일제의 간행물에 등장했다는 이유로 친일 비 친일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만 신경을 쓰게끔 유도할 것이다. 사조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기관이 어디인지 유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조용하는 1882년생이니까, 만 20세가 되기 전에 독일 공사관에 있었고, 1903년 귀국해 경기도 죽산, 마전, 이천에서 이십 대에 이미 고등관 8등의 군수였다. 지방 관리조차 젊은 신진을 기용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북경으로 망명했고, 1906년에는 일본의 대학 복교를 종용하는 정책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가는 동생을 만났는데 그 장소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는 통감부가 설치되는 시점이라, 혼란 속에 고국을 떠나 떠도는데 다음 이력이 드러나는 것은 경학사(耕學社)에 참가해 본격적인 항일 활동에 투신한 시점이다. 경학사가 만들어진 1911년까지 약 6년간의 세월,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경학사는 이회영과 그 동생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의 멤버가 만든 서간도 만주 유하현(柳河縣)의 결사 조직이다. 물론 항일 자치 단체다. 나라가 없어져 백성이 유리한 가운데 이런 지식인들이 사방으로 피난을 떠나며 대중 계몽 교육, 군사 교육에 임하게 되는데, 이 단체들에 감리교 장로교의 자본이 들어오면서 ‘독립군과 기독교’ 프레임에 엮이게 된다.
 
왕조가 부패한 나라, 양반이 가장 먼저 민족을 배신한 나라라면 이미 멸망해 지당하고 타민족에 흡수 통일되어도 슬퍼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난한 피난길과 그 여정에 서양의 종교와 자본까지 합세하며 독립을 돕는다고 나선 것일까. 저 도마 안중근마저 프랑스 선교사의 가스라이팅 내지 감화를 받았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역사가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아마도 조선은 멸망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독립은 필수였던 모양이다.
 
1913년에 조용하는 하와이에서 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하와이에서 ‘조선독립단’과 ‘한인협회’를 조직했고, 1920년 7월 하와이 지방 총회에서 단장에 선출된 이후 교민 신문인 ‘태평양시사(The Korean Pacific Times)’를 발행했다. 임시정부 외무총장인 동생 조소앙과도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고 외교활동에 끊임없는 노력을 보였다. 자신의 이력을 살려 항일운동을 세계에 알리려고 애썼다. 그 외로운 시절 20여 년 동안 넥타이 단 한 개만을 소유했을 만큼 검소한 독신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1932년 4월 동생 조소앙으로부터 ‘중한동맹회’ 조직의 선언 및 입회 용지의 송달 임무를 받고 하와이 재류 동포들을 권유하여 가입시켰고, 임시정부와 유대를 갖고 독립운동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 미국 기선을 타고 상하이로 가던 중 고베에 기항했다가 누군가의 배신으로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오늘날 하와이에서 상해로 가기 위해 도중에 고베에 들리는 선박이 몇이나 될까. 당시 선박의 항해일지를 읽어 본다면 오늘날과 전혀 다른 역사가 인류를 속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조용하는 1933년 1월 경성부로 압송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았고, 1933년 4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찍은 수형카드 머그샷에 조용하의 얼굴 반쪽이 새까맣게 찍혀 있는데, 대한 사람으로 왜인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다며 얼굴에 먹물을 칠했다고 알려진다.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여독으로 1937년 3월 3일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죄 많은 왜인 앞에 거꾸로 죄수복을 입어야 하는 심정과 세계를 다니며 항일 의지를 호소해도 세계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는 이유를 조정규의 아들들은 몰랐을까. 예정된 조선 멸망, 예정된 독립의 의미를 그들이 과연 몰랐을까. 어차피 죽지만, 더럽게 죽지 않겠다는 결기에 다시 한번 심심한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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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rricane
3
조용하 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게 가능했겠지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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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hang
6
먹물을 얼굴에 칠하고 법정에 섰다는 대목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용기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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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joon
6
결국은 예정된 멸망, 예정된 독립이라는 표현이 뇌리에 남네요. 모든 게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건지, 개인의 희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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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랑18세
5
읽으면서 답답한 건, 여전히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단순화된 프레임으로만 알려준다는 겁니다. 친일-반일, 반란-민란으로만 설명하는 건 진실을 가리는 또 다른 왜곡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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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71
4
55세라는 나이에 옥고와 병보석, 결국 고문과 여독으로 돌아가셨다는 부분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민족을 배신한 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았을 텐데, 정의로운 분들은 왜 이렇게 허망하게 가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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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yboy
5
우리가 지금 편안히 사는 동안 이름 없는 선조들은 고통 속에서 싸웠습니다. 그 희생을 잊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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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7
하와이에서, 만주에서, 상하이에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세계 곳곳을 전전해야 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던 현실이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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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4
결국 세계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네요. 국제정치는 이상이 아니라 철저히 이해관계라는 사실을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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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cy88
8
이 글은 단순히 한 인물의 전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조선인의 인간 심연의 철학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를 묻는 깊은 사유입니다. 필자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의 역사 발굴 작업에 응원과 격려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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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jung
7
임오군란부터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4대 비극에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을 개별 사건으로 축소하고 민란으로 서술한 기존 역사관에 대한 비판에 깊이 공감합니다. 말씀처럼 공간의 확장성, 즉 국제 정세 속에서의 역학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역사 서술은 진실을 왜곡하고 자학적인 역사관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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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minsoo
6
독일에 있던 형 조용하가 경기도 양주의 아우(조소앙)에게 국제 정세를 전달했다는 경로의 난해함이 이 시대 지식인들의 고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기독교 자본이 독립군 단체와 엮이게 된 배경에 대한 필자님의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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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jung
4
'아르키메데스의 모래알 세는 사람'이 되어가는 고통, 그리고 '특정 인물을 선택하는 죄의식'을 고백하신 필자님의 심정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주를 채우는 모래알처럼 많았던 선조의 희생 속에서 특정 인물을 호명하는 일은 분명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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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adlelight
4
조용하 선생이 만 20세 전에 독일에 파견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황이야말로, 나라의 위태로움과 개혁의 기만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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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雲兒
3
과연 조선의 멸망과 독립이 '예정된 의미'였을까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져주시네요. 조용하 선생처럼 신식 교육을 받고 고등 관료직까지 지낸 인물들이 왜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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