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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인물 (9) 홍명희(洪命憙), 1888(高宗 25)~1968(檀紀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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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07

시지프스 신화의 작가로 험프리 보가트를 닮은 알베르 카뮈와 단발령으로 머리를 깎은 뒤에도 흰 두루마기 차림이었던 벽초 홍명희는 동시대를 살았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전혀 다른 공간 다른 문화에서 살았다. 그러나 홍명희는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단편도, 염제 신농씨, 소호 금천씨도 알고 있었고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도 추천했던 동서양을 아우르던 천재 문인이었다. 나이로나 이력으로나 좀 더 오래 살았던 홍명희가 더 험난했고 더 길게 고통받았으며 정치적으로도 개인사로도 혼돈의 생을 살았지만, 문명이 개화와 동시에 퇴화한 시대에 이 두 문인은 모두 각자의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카뮈의 짧은 생애가 자연사였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홍명희의 월북도 석연치 않다. 19세기에서 20세기,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넣고 지식인들을 꼭두각시로 만들던 세상은 얼마나 참혹했던가.
 
쇠망의 조선 말, 도쿄 3대 천재로 불리는 홍명희와 최남선 이광수는 지독하게 불운했던 문인을 대표한다. 셋은 모두 어려서부터 불운했다. 나라가 망하는데 운이 좋은 길은 하나의 길밖에 없다. 홍명희는 회의차 북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해, 남한에서는 월북자 낙인으로 그 어떤 업적도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 세월 동안 요직을 다 차지한 가짜 지식인, 가짜 학자가 진정한 문화적 유산을 개똥취급하고 있다.
東京三才
홍명희 (洪命憙)
1888년(高宗 25) 5월 23일~1968년(檀紀4301) 3월 5일
1907년~1910년 大成中學
최남선 (崔南善)
1890년(高宗 27) 4월 26일~1957년(檀紀4290) 10월 10일
1904년~1907년 早稲田大學
이광수 (李光洙)
1892년(高宗 29) 3월 4일~1950년(檀紀4301) 10월 25일
1905년~1910년
大成中學 明治學院

홍명희의 부친은 한일합방 조약이 발효된 1910년 8월 29일 자결했다. 유서 몇 통마저 일제가 압수했다고 하니, 얼마나 집요한 자들인가. 이렇게까지 조선 양반의 뿌리를 흔들어 흔적을 없앤 이유가 무엇일까. 매천 황현도 조약 체결 16일 후 아편을 삼켜 자살했다. 이에 앞서 민영환이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2주 후에 자결했다. 인재가 넘치고 정이 넘치던 장안은 하루가 다르게 산 송장, 죽은 송장들이 부대끼며 머리 좋은 지식인의 삶은 자살이거나 전향 외에는 답이 없는 세상으로 절망을 향해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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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의 부친 洪範植
 
홍명희의 가계를 보면, 11대조 홍만형이 선조의 사위인 풍산 홍씨 홍주원의 차남이다. 홍주원의 장남 홍만용의 증손들에 혜경궁 홍씨가 있고, 다산 정약용의 처가, 정조의 즉위를 돕고 국정농단으로 세도정치의 상징처럼 묘사되는 도승지 홍국영도 방계다. 홍명희의 생모 은진 송씨는 군수 송은로의 딸로 우암 송시열과 같은 서인 송준길의 9대손이다. 계모 조씨는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가족 중에 월북자가 있다는 이유로 6.25 전쟁 중에 끌려가 살해당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함락했을 때, ‘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한다,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호외를 낸 조선일보는 사주 방응모가 피난 가지 않고 있다가 7월 6일 납북되어 미군기 공습으로 죽었다. 시인 노천명도 피난 가지 않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했고 서울수복 후 부역죄로 징역 20년형에 처했다가 1951년에 사면받았다.
 
해방 공간에서 6.25 전쟁으로의 전환은 전쟁을 위한 전쟁의 디렉션이 된 도화선일 뿐, 사실 분열과 반목을 위해 설정된 세계 정치의 무대였다. 이 똑똑한 천재들의 향방은 최상위 포식자를 감지해내지 못할 만큼 정적이고 온화한 성품이 바탕에 있어서 공산당이니, 간첩이니 하는 큰 계획의 틀을 읽어내지 못하고 이념 몰이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홍명희 딸들의 인생 역전과 죽음, 김일성과 맺은 사돈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남한에서 주장하는 내용만 읊어댄다고 이북에서 벌어진 실상을 우리 민간 대중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한국 정치계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어 자료만 헤아려도 김일성 사칭 인물이 4명이나 등장한다. 도대체 어는 김일성이 벽초와 사돈을 맺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저 6.25는 남북 분단을 고착화하는 전쟁 불꽃놀이였다. 사람들은 죽고 전 세계에서 온 병력이 전사자로 부상자로 증거로 남은 세계적으로 준비된 쇼였다. 친일도 죽이고, 좌파도 죽이고 모두 다 죽여 역사를 아는 증인을 제거했다. 북한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똑똑한 인재를 피랍 또는 월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식민지를 벗어난 우리 민족에게 남겨진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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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50년 6월28일 자 호외 출처 : 미디어오늘(https://www.mediatoday.co.kr)

홍명희의 고모부로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부인인 고모 홍정식 역시 명문 풍산 홍씨, ‘豊洪’이다. 홍명희는 1900년에 참판 민영만의 딸 민순영와 결혼했다. 장인은 고종의 외조부인 민치구의 형 민치대의 손자이자, 민선호의 아들, 여흥민씨 명성황후 가문과도 가깝다. 민족운동가이자 국학자로 이름을 알린 아들 홍기문은 1903년생으로 홍명희가 15세에 나은 분신이자 친구 같은 사이였지만, 아버지 홍명희가 일본 유학을 했던 것과 달리 조부 밑에서 한문과 역사를 배웠고 신학문을 독학으로 터득한 천재다. 조부는 친일부역자였는데 손자 홍기문을 키우며 역사를 가르쳤다. 이 부분도 조사가 더 필요하다. 홍기문은 조선일보 편집부, 향토문화 조사위원 등 인문학자가 할 수 있는 온갖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48년 4월, 홍명희가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북에 갔다가 전류를 강요당하자, 홍기문도 월북했다. 한학을 바탕으로 조선어 역사문법, 향가 해석, 조선왕조실록을 연구 발표했다. 홍기문의 아들, 홍명희 손자 홍석중은 서울 출생으로 해방 공간에 월북해 자신의 공간을 바꿨다. 2002년 소설 ‘황진이’는 2004년 북한 작가로서 처음으로 남한의 만해문학상을 탔다. 분단의 비극과 천재의 필력에 오열했던 기억이 선하다.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업적들, 아니 천재가 아니어도 노력하면 가능한 연구였을까. 분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어떤 인류 문명의 개선과 진보와 공존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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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문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구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북에서 돌아온 것은, 거의 ‘탈출’이었다고 했다. 홍명희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이어지는 국제회의에 대한 책임감과 이미 정해진 인재를 북한으로 데려간다는 계획이 작용한 것이다. 위당 정인보를 데려간 공작도 그런 맥락에서 풀이된다. 이광수, 손진태, 이극로, 박노갑 등 셀 수 없는 지식인들이 각 계층에서 차출했다. 통계는 숫자일 뿐, 신용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6.25 당시 납치 행불자는 수십만 명, 민간인 학살도 셀 수 없다. 이것이 과연 불가결한 전쟁이었을까, 의도된 준비된 전쟁이었을까.
 
홍명희 외가와 친가의 직계 방계를 다 합치면 조선 명문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들의 족보가 몇 대만 넘어서면 순식간에 역사가 되어버리는, 인간 문명의 궤적이 쌓이고 쌓인 민족이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민족이란 단어를 없이하고, 의미를 폄하하고, 빨갱이 몰이로 역사를 왜곡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온갖 장난질과 선동으로 이제 우리 사회는 어떤 어른도 믿지 않고 어떤 조상도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오로지 미국의 후광을 입은 이승만만이 각본대로 잘 움직였다. 김일성과 이승만이 소련과 미국이 사주한 인물이었고, 그 사실을 아는 숱한 지식인들을 솎아내는 작전, 이제, 그만 정당한 전쟁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일보 호외에는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라고 했고, ‘서울에 있던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들과 미국대사관 및 U.N.위원단들은 이미 27일 오전 중에 서울에서 도망하였다.’ ‘서울은 완전히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로 되었으며 서울 전체 시민들의 거리로 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라는 순진한 바람이 솔직하게 들어있다. 당시까지도 남북한 통일 정권을 갈망하던 시민 사회 지식인들은 빨갱이 조선이 아니라, 순수 우리끼리의 정권을 만들 생각을 호외에 담았던 거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쟁의 이유는 아니다.
 
벽초에 대해 함부로 붓을 놀리는 건 죄짓는가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가계마다 인물을 보면 그렇게 출중한 가문을 이어오던 문명이 어떻게 비루한 왜구의 후손들에게 잡아먹히게 된 것일지 의심이 앞선다.
 
홍명희를 소개하려던 애초의 취지는 그 천재성이 국가가 불행하게 멸망했던 시절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임꺽정을 읽어 본 독자들은 인정하겠지만, 한 번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머리가 좋은 인물들이 살았던 생애가 왜 올곧이 오늘날 삶의 규범이 되고 연구의 바탕이 되고 항일 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지 않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문학과 역사, 시와 소설의 담론이 사라지고 왜 이 사회는 아둔하고 졸렬한 자들이 앞에서 떡을 치고 있는지, 구경꾼이 된 대중의 획일성에 회의가 온다. 홍명희를 소설가로 놓고 보자면, 박경리 박완서 조정래 최명희 등도 마찬가지 천재들의 향연이다. 월북자 피랍자를 막론하고 해방 이전 이후를 경험한 세대들의 글에는 큰 멍에와 심연의 슬픔이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색깔, 전혀 다른 스케일로 그려냈다. 그러나 연어의 회귀처럼 인위적인 분단에 저항하고 이북을 가야 했던 역사적인 배경이나 선택의 기로에서 사적 공적으로 놓쳤던 부분을 우리는 보듬어 안지 못하고 도그마에서 벗어날 줄을 모은다. 비판할 것은 지식인들의 전향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없는 비판을 비판해야 한다.
 
단단한 차돌 같은 홍명희의 호, 벽초(碧初)는 에스페란토(Esperanto)라는 인공언어를 최초로 배운 한국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민족이 재편되고 국가의 흥망이 서유럽 식민지 제국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나갈 때 왜 인공언어가 필요해졌을까. 왜 이 인공어를 언어 천재 홍명희가 가장 먼저 익혀야 했을까. 베트남이 알파벳으로 옛 한자어를 기록하는 쯔놈을 쓰고, 중국이 1964년에야 간체자를 공식화한 것은 왜일까. 조선은 왜 남북으로 갈리고 수천 년 기록문자인 한문을 버리고 발음기호인 한글만 쓰고 있을까. 천재들의 후예라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오호통재라.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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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ak
5
“임꺽정”을 쓴 벽초의 문학성과 역사 의식은 지금 다시 조명받아야 마땅합니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민족혼을 지키려 했던 진짜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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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ressK
8
역사를 통째로 잊고 사는 지금, 이런 글은 우리 스스로의 근대를 되돌아보게 만드네요. 천재들이 선택한 길을 단순히 이념으로 재단하지 말자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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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像
7
해방 전후의 혼란기에 ‘월북’이라는 단어 하나로 평생의 업적을 묻어버리는 지금의 분위기를 반성하게 됩니다. 다만 글이 너무 서사적이라 학문적 검증이 더해졌으면 좋겠네요.
( 0 / 500 )
Oxford
6
벽초가 에스페란토를 최초로 익힌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놀라웠습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를 모두 사유한 인물이란 점에서 한국 지식인사에서 유일무이한 존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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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선생
삭제된 내용입니다
( 0 / 500 )
지윤선생
6
최남선과 이광수는 교과서에서라도 만났지만, 벽초 홍명희는 낯선 인물인데, 글을 읽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환기해 보는 기회를 가집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운이 좋은 길은 하나의 길밖에 없다." 라는 문장이 가슴을 치네요. 역사는 결국 깨어 있는 몇 사람이 먼저 움직여 만드는 것일텐데, 그의 선택이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평가받더라도, 그가 추구했던 정신, 천재성을 개인의 영달이 아닌 민족과 인류를 위해 바치는 헌신이라는 가치는 조선에서 이어진 대한민국의 역사 한 페이지를 살아 나가고 있는 우리 개개인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됩니다.
( 0 / 500 )
andrea72
7
“지식인의 전향을 비판할 게 아니라 그 이유를 연구해야 한다”는 문장은 오늘날의 모든 비판적 지식인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습니다. 이념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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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ana90
5
글 전반에서 느껴지는 울분과 애정, 그리고 홍명희 가문에 대한 존중이 진심으로 다가왔습니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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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nstar
4
조선일보 호외를 인용한 부분은 흥미롭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시대 정황에 대한 과잉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북한을 ‘해방군’으로 본 건 과도한 환상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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