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큰 음모가 있고 작은 음모가 있는데 대다수 인류는 어떤 정치 체제에 속하든 그중 하나에 속해서 음모론을 구성하는 일부의 삶을 살다 간다. 그 정도로 음모의 세계는 깊고 진해 대중의 눈높이에서 가늠하고 떠들어 댈 수 없는 인류의 늪이라는 이야기다. 종으로 횡으로 촘촘하게 얽힌 음모를 떠받치는 대중은 작은 음모나 큰 음모나 온전한 인간의 정신성을 위협받는 데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보와 소비의 노예로 거듭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아이러니를 벗어날 수 없으니, 생존은 갈수록 피곤하다.
필자에게 음모론을 재정의하라고 한다면, 과거 구세계(Old World)의 건축물·기록물의 파괴를 주도한 자들이 대중의 눈속임을 선도하는 작업이다. 수백 년에 걸친 이 작업은 현실의 호구책으로 변질해 그에 이용된 대중을 분열시켰고 이제는 음모론을 정론으로 만들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수백 년 서방의 식민지주의는 2차 대전 후 현대 사회의 거대 자본으로 재탄생해 여전히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미천한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생 인류에게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치방식이 선진적이라는 착각을 통해 여전히 대중을 농락하며 세계적 자본가들을 위해 음모의 세상을 더 다져 주는 역할은 게임 속 NPC 바로 그것이다. 대중은 그들의 선동부대로 현실 속 자아를 자각할 필요조차 거의 느끼지 못한다. 간혹 이 세계에 대한 구조적 모순에 원초적 의구심을 품고 있는 자도 존재하지만, 개인의 정보력으로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다. 개인과 NPC의 속성이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면암 최익현은 구시대의 정통성을 깨려는 서구와 그 서구의 개가 되어 움직인 일제에 온몸과 정신으로 맞선 조선의 마지막 지식인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최치원의 후손이니, 천 년의 가계가 이어졌던 그야말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 아무리 상하 신분 구별과 남녀의 경계를 벗어난 천박해진 세상이라고 해도 우리가 함부로 시빗거리로 삼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천년의 세월이 한 가계를 유지했다는 서사가 인류사에서 얼마나 위대하고 장엄한 역사인지 우리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의 기억과 역사를 상실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천년의 세월 동안 최치원과 최익현이 인종적 생물학적 동일성을 보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최익현도 최치원도 본 적도 정보도 없지만,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자료를 가지고 학문으로 삼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몰염치가 최치원의 대마도 옥살이를 음모론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만들어 버렸다.
최익현은 난다긴다했던 조선 천재들의 학문적 소양을 혈통으로 타고났지만, 시대가 악해 이미 세상이 뒤숭숭해진 탓에 겨우 의병장으로 이름이 남았다. 대개 키워드 암기 방식인 역사 인물 소개가 과연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이런 요식행위는 진정성 있는 과거 회고를 방해할 뿐이고 독재 정권을 미화해온 영화처럼 어용 문화로는 눈치 빠른 한국인의 심금을 절대 울리지 못한다. 과거가 뭉개져 버린 민족에게 차근차근 본질과 현상을 주워 담으려는 삶의 이정표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이것이 후천적으로 습득된 결과, 더는 오랜 역사가 어울리지 않고 역사를 마주 대하려고 하지 않는 변종이 되었으니, 최익현 따위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리는 만무하다.
최익현의 장남 영조(永祚)는 부친이 남긴 시문을 모아 사후 1년 만에 1908년(戊申本)으로 면암집(勉菴集)을 간행했다. 1929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받아 조우식·박재식 등이 1931년(辛未本) 48권 24책으로 면암집을 재간행했다.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간행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신본과 신미본의 차이까지는 비교하지는 못했지만, 내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상소문이다. 상소문에는 구한말의 정치 상황과 위정척사(衞正斥邪)를 대변하는 입장과 함께 일제의 침략 만행 등을 규탄·성토하는 내용이 많은 편이다. 일단 일제 만행 규탄이 있어 사료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정척사에서 박해(迫害)와 양요(洋擾)로 넘어가다가 어느 순간 일제 식민지가 되는 과정은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서술이다. 서양의 천주교가 일제 침략으로 둔갑하는 정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의심이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의 사이에 인쇄업에 강해진 것도 이상하다. 전쟁에는 군수업이 당면 과제일 텐데, 어째서 서적 간행이 중요해졌을까. 조선사편수회는 1920년대부터 조선 팔도 전국을 뒤져 시골 산간까지 있는 책을 다 걷어 들였다고 공식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이미 그 이전 시기에 모종의 전략적 서적 간행 시대가 체계적으로 존재했고 기록을 다 남겼다. 연어의 회귀처럼 거센 물살을 역행하는 귀향의 본능이 한국인에게 작동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역사가 되어 버렸다.
1865년 러시아 함대가 원산항에 등장해 통상을 요구해왔다. 승정원 승지로 천주교도인 남종삼(南鍾三, 1817년~1866년)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불동맹’을 건의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이 아니라, 조선과 프랑스, 조선과 영국이 동맹을 맺는다는 의미다. 이에 서교(西敎 또는 西學, 즉 기독교)파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분개했고, 남종삼과 프랑스 신부 9명을 순교시켰다.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의 힘을 빌려 막고자 한 대원군의 정책이 실패하자, 역으로 서학을 탄압해 관리와 신도 8천여 명을 학살했다는 사건, 이것이 소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이 사건을 구실로 천진(天津)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부른다.
French fleet in Ganghwa, Choseon
위 사진이 강화도 어디라고 한다면 독자들은 믿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시공간에 대한 의식이 확장을 멈춘 것은 식민사관 덕인데 조불 동맹과 조영 동맹을 동시에 추진하려고 했던 남종삼의 시대는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일지, 위 그림을 보면서 유추해볼 필요가 있다. 1840년대가 되면 상업 사진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찍혔을 때이기 때문에 이 시기 조선의 펜화 그림은 사후에 사진을 보고 그렸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19세기를 통해 프랑스가 중심이 된 서교의 침입은 과연 영토의 어느 방향에서 똬리를 틀고 커진 사건일까. 역사의 장면 장면마다 의혹에 대한 상상을 불허하는 실재성(reality)이 떨어지는 역사 인식이 인간의 두뇌에 미치는 악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마비된 공간 감각과 장소의 속성에 대한 몰이해가 치료되지 않고는 역사를 만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병인박해 때, 운 좋게 탈출한 리델(Félix-Clair Ridel, 1830년~1884년)은 밀입국으로 조선에 들어갔던 프랑스인 신부다. 그는 천진에 있던 해군 제독 로제에 보고해 프랑스 함선이 강화도에 상륙해 사고(史庫)를 뒤져 서적류를 약탈하게 하는 한편, 신부 살해의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 조선 조정은 철포 500대를 내세워 로제 함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린 고종을 무능과 부패의 상징으로 만들고 정권은 포악한 왕의 부친 대원군과 며느리 집안의 싸움으로 만든 서술 기조는 어처구니없고 세계사적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전 세계가 통상 압력이라는 명분 아래 무기와 십자가를 내세워 침략해 왔는데 집안싸움을 하면서도 그 공격을 막아내다가 내부 분열과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면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는 서사가 과연 이 작은 한반도를 두고 벌어진 난투극이었을까. 서양과 기독교 문명의 동양 침략에 관한 본질을 뺀 서술이 훗날 문제가 될 리 없을 것으로 판단한 안일했던 과거의 역사 서술 기조는 현대사 지정학의 전개와도 맞지 않지만, 앞으로는 더욱 맞지 않게 될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는 사람이 모여서 이합집산하는 추상적 단체지만, 그 속성에는 인간의 성정이 녹아 있어 본질적 특성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근대 백 년의 침략 공작이 진행되었다고 해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유전자가 변질한 비율은 아직 미미하다.
이듬해인 1867년, 이번엔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SS General Sherman)가 대동강에 침입해 통상을 요구, 이 역시 평양 군대의 포화로 침몰시켰다. 여기서 미 해군 제독 로저스는 강화도에 상륙해 고종에 항의했지만, 이것도 격퇴당했다(19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한반도에서 미국 상선이 굳이 서해까지 가서 평양을 거슬러 올라가서 내륙으로 들어간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외우지만 말고 생각이란 것을 해 봐야 할 때다. 강화도는 왜 동네북이었을까. 현재 강화도에 어느 나라 함선과 전쟁을 치를 수 있는지 수심과 흘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병인, 신미년의 두 차례에 걸친 양요를 피한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夷狄(오랑캐)가 침입해왔는데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매국노다. 이를 만세 자손에게 경계한다.’라는 비문을 새겼다. 이것이 교과서 암기 단어인 대원군 척화비(斥和碑)다. 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경하게 주장해 한동안 서구 침략의 소강상태가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척화비의 존재와 역사 서술의 척화비 기재는 한반도가 서양 침략에 맞섰다는 증거 유물이다. 역사 서술과 역사적 유물유적은 이렇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 신미양요를 영어로는 미국의 조선 원정(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또는 간략하게 한국 원정(Korean Expedition)이라고 부르고, 특히 미국은 1871년 한국 원정(Korean Campaign 1871),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이라고도 부른다. 만일 현대전에서 미국이 한반도 원정에 나선다면 굳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까. 지정학과 지문 지리의 조화로운 지식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사이에 독일인 장사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있다.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Ernst Oppert 도굴사건). 원래 남연군 묘는 경기도 마전(麻田)에 마련했다가 몇 번의 이장을 거치게 된다. 대원군이 악몽을 꿔서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으로 이장했지만, 가야사도 소실해 재이장을 거친다. 역시 석연치 않다. 서울의 궁궐 면적은 어림잡아도 36만 평이 넘고 왕릉 평수만 따져도 한 기당 수십만 평이 넘는다. 조상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 있는 한국인의 특성상 남의 땅에 묫자리를 쓰는 일이나, 남의 무덤 도굴은 어지간해서는 발생하지 않는 패륜 사건이다. 독일 장사꾼이 남연군 묘를 도굴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병인박해
(1866)
제너럴셔먼호
(1866)
병인양요
(1866)
오페르트도굴사건
(1868)
신미양요
(1871)
프랑스
미국
프랑스
독일
미국
아직 양요의 양자도 설명하지 못했다. 바다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던 시대가 지구 전체를 초토화한 지난 수백 년의 역사가 아직 수면 위로 오르지 못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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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품
4
마! 내가 느그 서장이랑! 사우나도 가고! 으이? 생각나네요 ㅎㅎ 이름은 같지만... 최익현이란 이름을 보면 이 분이 먼저 생각나도록 사회가. 시스템이. 많은 것들이 바뀌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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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din
6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텼다는 게 참 눈물 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누가 목숨 걸고 나라 지킬 수 있을까요. 자꾸 역사를 잊어가는 것 같아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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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
9
역사 유물도 정치다’는 문장에서 멈춰 서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왜 어떤 기록은 살아남고, 어떤 진실은 지워졌는지... 이 글은 역사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라는 일종의 알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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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8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는 걸 공간적으로 의심해보라는 말, 정말 참신합니다. 교과서에선 그런 시각을 전혀 안 가르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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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有三樂
6
면암 최익현이 단지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에 너무 공감합니다. 천 년 가계와 그 정신을 계승한 인물이라면, 훨씬 더 깊은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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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7
역사 교육이 진짜 진실을 가르쳐줬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진 않았을 겁니다. 글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암기식 역사’가 진실을 가릴 수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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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man
6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같은 사건을 이렇게까지 입체적으로 다시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단순히 교과서 안에 갇힌 연도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정치적 흐름과 진짜 의도가 있었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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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adlelight
6
면암 최익현에 대한 서술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1908년 간행과 1931년 재간행의 맥락을 연결한 해석은 주목할 만하네요. 하지만 ‘서양 종교 = 침략’이라는 일변도의 해석은 좀 더 다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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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ian
4
이 글 내용으로 다큐 만들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오페르트 사건까지도 다 각색해서 알기 쉽게 풀면 젊은 세대에게 충격 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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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感滿足
5
이 글을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던 역사가 너무 얕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왜곡된 사료 위에 쌓인 지식이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암기’가 아니라 ‘의심’이라는 말, 깊이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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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mi
2
최근 봤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생각이 나네요. 대원군과 척화비, 면암 최익현까지… 드라마도 이 글처럼 과감하게 진실을 파고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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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man77
2
면암 최익현 선생은 조선 후기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진정한 선비였습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 초기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유교적 신념과 나라 사랑 정신을 끝까지 지켜낸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특히 74세의 나이에도 의병활동에 나서신 용기와 의지는 후세에 길이 전해져야 할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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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hong
2
한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전통적 가치관을 고수하면서도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직접 행동으로 나서신 모습에서, 진정한 학자정신과 실천적 애국심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주는 인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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