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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a든 Korea든, 품격은 이름보다 먼저다
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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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ny365

1800년대 인물 (7) 이용익(李容翊), 1854(哲宗 5)~1907(光武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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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3. 11

이용익은 이름 석 자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세대도 있을 테지만, 독자들은 보부상, 물장수 신분으로 고종이 신뢰하는 유일한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출생지 함경도 지방을 전전하며 광산 채굴권 인삼 전매 등의 사업으로 황실 재산을 관리한 이용익, 임오군란 당시 장호원으로 피신한 명성황후를 도와 고종과의 연락을 맡아 승진의 단초를 삼았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근대 인물 대부분은 졸렬한 행위로 유배를 떠나거나, 파렴치한으로 그려진 탓에 당시 실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어떤 과정을 걸쳐 망국에 이르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일제가 집필하도록 놔두지도 않았겠지만, 반공 국시의 군사 독재 시절 왜곡된 역사 교육 탓에 근대 인물 자체에 거는 기대가 크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자축 경연장이라고 해도, 또 망할 만해서 망했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모든 걸 맡긴 채 자발적인 회고가 없는 자세는 정상적인 국가관은 아니다. 그들이 모두 국고로 들어갈 세금 착복이나, 불미스러운 죄목으로 유배를 떠난 인물이었다면, 어떻게 민간에서 의병과 항일 운동가들이 대를 이어가며 독립의 불씨를 이어갔겠는가. 백 년 전에도 지금처럼 고위직은 불법을 해도 눈감아주고 일반 민중만 열심히 나라를 위해 제 목숨을 불살랐다고 생각하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연속이다.
 
이용익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1888년 6월 함경도 북청에서 발생한 민란의 원인으로 지목받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서 파면되고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896년에는 다시 함경도 지역의 관리로 평안북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나 민란으로 다시 유배당했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중추원 관리가 된 것으로 보아 유배와 임용을 반복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때까지는 아무래도 조정의 힘겨루기와 일제의 알력이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일제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부터는 유배 갈 일도 없다. 아직 조정의 어느 곳인가는 제 기능을 하려 애썼던 것 같다.
 
같은 해, 이윤용(李允用)을 모함해 죽이려 한 죄로 또다시 10년 유배형을 받는다. 이윤용이라는 인물은 이완용의 이복 서형(庶兄)이다. 이윤용의 생부 이호준(李鎬俊)은 서자 이윤용 대신 1867년 이완용(李完用)을 양자로 들였다. 이완용 친부 이석준과 이호준은 족보상으로 32촌이라고 하니 남과 다를 바 없는데 이호준도 양자였다. 재산은 서자지만 친자식인 이윤용에 주었고, 제사를 받드는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신분에 만족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의 근거는 찾지 못했다. 이 당시 족보의 서열을 잘 모르지만, 친자 서자보다 양자이자 아우인 이완용이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인 집안의 제사를 맡았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지난 회에서 다룬 민영휘 가계처럼 조선 말기 어느 시기에 족보가 꼬이고 사회질서가 엉망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양반 귀족이 가을 추수 때 벼 베듯 총칼에 사라져가고 그 족보에 파고든 일제의 피 냄새가 짙다. 알려진 것보다 일찍 일제의 농간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식민지 지배제도와 인적 물적 자원의 착취에도 조선인 족보에 파고든 일제의 그림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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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允用
위 사진은 83세에 사망한 남작 작위의 이윤용으로 복장과 손짓은 열성조 멸망기, 뉴라이트 식으로는 개화기 때, 갑신정변의 멤버들이 프리메이슨의 표식에 해당하는 손짓을 하고 포즈를 취한 것과 똑같은 포즈를 취했다. 옷 속에 손을 넣은 자세는 나폴레옹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막스, 레닌, 스탈린, 손병희, 오바마에서 하다못해 전광훈까지도 이런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상당히 인위적인 손짓인데 음모론의 한 부분이라고 쳐도 역사는 역사다. 음모론도 역사가 길다는 말이다. 음모론이 정론이 되려면 그만큼 연구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음모론에 정론 연구만큼 투자하지 않는다. 현재도 전 세계 유력 정치인의 손은 때로 모종의 표식을 즐긴다. 한때 윤석열의 손도 이 같은 흉내를 냈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는데 대중은 왜 쉬운 먹잇감을 자처하고 있으면서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가. 이 정도 이어진 음모론이라면 이미 음모가 아닐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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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庶女)와 혼인한 사위로 돈 밝히는 재주가 뛰어나 가회동 9번지에 살며 재산 수십만(단위 없음)을 보유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이윤용이라는 자는 이복동생인 이완용과 함께 아관파천을 일으킨 주범이고 친러시아 내각을 조직했고 스스로 군 책임자인 군부대신의 지위에 올랐지만, 이 친 러시아 조각의 면면은 친일이지 친러로 보이지 않는다. 친러 프레임에 갇힌 고종의 정치는 어떤 것이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윤용은 러일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지나 1908년 1월 10일 日本國勳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이 욱일동화대수장의 원조 격 훈장은 이또 히로부미가 1877년에 받은 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이다. 이또 히로부미에 버금가는 이윤용의 훈장 수여는 어떤 공로였을까 궁금하다.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데 지대한 공을 끼쳤다면, 이윤용도 그만큼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이윤용을 죽이려 했던 인물이 바로 이 이용익이다. 그래서 역사는 이윤용을 나쁘게 묘사하고 우리는 그런 인물평을 듣고 자란다.
 
다음은 프랑스 선교사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évêque)가 찍은 사진엽서 시리즈 중의 하나로 촬영 일자는 1904년 2월, 이용익 50세 때 사진이다. 알레베크의 엽서 원본을 찍은 것이라, 알려진 어느 엽서보다도 선명한 편인데 후대에 남아 있는 사진과 비교하면 얼굴 살집이 좋고 체격도 크다. 이용익의 용모에 대해서는 그를 치료했던 일본인 군의관 기록에 사진이 남아 있는데 이 사진만으로는 동일인물인지 의심될 정도로 얼굴과 몸의 살이 빠져있다. 알레베크가 찍은 복장은 박물관에 전시되는 동일 복장의 유물로 그 크기와 양식을 대략 추정할 수 있는데 체격이 꽤 컸던 인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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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베크가 찍은 이용익 사진 1904


독일인으로 메이지 일본의 고용 외국인이었던 의학자 엘빈 폰 발츠(Erwin von Bälz 1849~1913)는 1876년 동경 의학교에 초빙되어 1906년에 귀국할 때까지 약 30년 가까이 일본 의학 발전에 공이 컸던 인물이다. 한국인이 이 발츠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가 몽고반(蒙古斑, 1885년)의 명명자이기 때문이다. 인류학회 동양 담당, 열대의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1905년 발츠는 이또 히로부미처럼 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을 받고 일단 귀국했다. 발츠 역시 이또 히로부미나 이윤용에 버금가는 공적이 있어서 수상했을 텐데 의학자니만큼 식민지 조선과 연관 있어 보인다. 후술하는 1951년 일기 1부가 출판 금지된 것은 이런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츠는 26년 간의 일본 생활을 일기로 남겼는데 1939년 아들 토쿠(한자 德자의 일본어 발음)가 일기를 편집해 일본어로 출간했다. 1943년엔 문고판 두 권으로 나오면서 1903년 이후의 일기가 더해져 분량이 늘어났다. 패전 후인 1951년에도 다시 나왔지만, 번역자의 말대로 황실과 군부, 조선 문제와 관련해 일기 원본 그대로 출판할 수 없다는 당국의 지적에 편집과 할애를 거치고도 출판 후 당국으로부터 일부 내용의 삭제를 요구받았고 결국 1부 출간을 단념했다. 1979년엔 개역을 거쳐 일기 부분 외의 보충 설명이 약 80페이지 가량 증가해 다시 출간되었지만, 이전 판의 삭제 부분은 역시 세상에서 사라진 채 출간되었다. 이 발츠의 일기는 단순한 외국인의 근대 일본 엿보기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 일본 내부에 거주하던 외부 인사의 일본을 바라보는 관점과 의사로서, 또 독일인으로서 일본을 응원해 마지않는 태도 만으로도 읽을 거리는 충분하다.
 
발츠 일기 1903년 6월 24일(1952년 판임, 1939년 초판본은 9월 15일 일본 체류 일기부터 시작된다.) 서울에서의 일기에는, “오늘 흥미로운 진료. 이용익은 한국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인데 그만큼 적도 많다.”라고 썼다. 이용익은 과거 친러파였다고 소개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확실하게 발츠가 이용익을 진료하고, 당시 한성병원장이었던 일본 해군 군의관 와다 야치호和田八千穂(1870~?)가 곁에서 도왔던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와다는 이용익의 집에 왕진을 갔던 소감으로, “집 근처 거리는 마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 길에 집 근처에는 오염물이 가득 쌓인 산이 있다. 그의 집에는 총을 찬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다고 했다. 가택 연금이라고 보아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바닥에 깔린 요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매우 건 정한 체격의 남자다. 이전에는 매우 퉁퉁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무거운 병으로 마르고 쇠약해져 있다. 얼굴은 길고 좁아 길고 좁고 품격이 있으며, 거의 유럽인 같았는데 이것은 특히 코가 높고 좁아. 코가 높고 좁으며 흰머리가 석인 백발이 섞인 수염이 얼굴 가득 덮고 있기 때문이다. 손은 눈에 띄고 눈에 띌 만큼 아름답고 길고 하얗다. 완전히 귀족적인 느낌이 든다 그는 과거 쿨리였다는 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의 모습은 그의 상태는 안심할 순 없지만….”
 
와다의 기록에 따르면, 이용익이 걸린 병은 1903년 5월 경에 걸린 丹毒(erysipelas)이라는 질병이다. 그런데 현대에는 이 질병이 드물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 바이러스가 생기는 환경도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조선이 흥망성쇠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독살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기록된 것과 관련 지어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용익의 행보는 개인사에서 공적 업무까지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다. 유럽인처럼 하얗고 귀족적인 모습의 풍채가 일시적 국난이 아닌, 망국의 험로를 몸으로 부대끼며 암살의 위협에 노출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막노동하는 쿨리에서 물장수, 보부상 출신이라는 낮은 신분으로 기억되면서 고종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고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을 썼다고 알려지는 것일까…. 잃어버린 역사가 너무도 많고 단서는 한정되고 차단되어 있다. 이용익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암살당했다. 그가 그 먼 곳까지 가서 살해 당해야 했던 국운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독자의 혜안을 기다린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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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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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물에 대해 처음 알았습니다. 자료 조사하시느라 애쓰셨을 듯,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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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
8
이런 자료를 만드시는 분은 어떤 자료들을 보시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전부 모르던 새로운 내용이고 깊이가 있어 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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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bin
1
저도 이곳 자료들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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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kdo
4
좋은정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역사지식을 이렇게까지 정리해 주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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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oungkook
2
늘 좋은자료 좋은 글을 통해 배우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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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3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 진진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연구하시는 모습에 그저 감탄과 존경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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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a77
5
일제와 서구에 의한 역사왜곡 문제는 반듯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저들이 감정기 동안 왜곡시킨 우리 역사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불가합니다. 부디 많은 연구를 통해 많은 사실을 밝혀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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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
2
과거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의 모순과 그 치졸한 왜곡에 화가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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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joon
2
이 당시 우리에 대한 역사자료는 우리가 기록한 것보다 일본이나 서구에 의한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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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city
2
이런 인물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보게되니 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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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_SJ
2
여기있는 인물들 자료로 책을 만들어도 아주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친일파와 잔존일본인들에 대해 아주 소상히 다루면 좋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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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joon
1
저도 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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