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위키백과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하고 민중계몽
3.1 운동을 보고 민중의 위대한 힘 깨달아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 작성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무정부주의 사상
신채호(申采浩)(1880.12.08.-1936.02.21.)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무애생, 열혈생, 한놈 등 여러 필명을 갖고 있다.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신숙주의 18대손에 해당하는 양반이었지만, 아버지 대부터 가세가 기울어 매우 가난했다. 어릴 적 거의 콩죽만 먹고 컸지만,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명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격한 할아버지 밑에서 정통파 주자학을 공부했다. 18살부터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신기선 집에 드나들며 신학문을 접했다. 이듬해인 1898년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는 사회과학을 공부하였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종로 서점을 돌며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신서들을 탐독했다. 엄청난 독서로 근대지식을 섭렵한 신채호는, 주자학에서 벗어나 사회진화론을 수용했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개화자강(開化自强)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고종황제가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을 때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만민공동회에서는 간부급으로 활동하며 깊이 관여했다.
1901년 고향으로 내려가 문동(文東) 학원과 산동(山東) 학당을 세웠고,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 직후에는 장지연의 눈에 띄어 <황성신문>의 논설 기자로 일했다.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고,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 처분을 받자 1907년 베델(E. T. Bethell)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이 사장이라 일제의 사전 검열이 덜했다.
양기탁, 안창호, 이동녕, 이회영, 이동휘, 김구, 이승훈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한 신채호는 신민회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뛰어난 필력으로 민족주의를 설파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민족주의로 정신을 무장해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 계몽적인 논설을 썼고, 『독사신론(讀史新論)』 같은 역사서와 『이순신전』 같은 역사 소설을 연재하였다.
신채호는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마련하자는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1910년 4월 안창호 등 신민 회원들과 망명길에 오른다. 신민 회원들은 중국의 칭다오(靑島)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는데, 무관학교 교원으로 임명된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그는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최재형과 함께 교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고, 기관지인 <권업 신문>에서 주필을 맡았다. 이동휘, 윤세복과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서는 부회장을 맡았다. 광복회는 국내에도 조직을 만들어 박상진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하였다.
1913년 <권업 신문>이 폐간되자 신채호는 신규식의 초청을 받아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지냈다. 무역회사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고,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인재를 양성했다.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동창(東昌)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고, 국사 교과서인 『조선사(朝鮮史)』를 집필했으며 고구려 역사를 연구했다. 1915년에는 이회영의 권유로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4년간 머물렀다. 베이징 부근의 조선 고대사 유적을 답사하는 등, 역사 연구를 계속했으며 신한혁명당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6년에는 소설 『꿈하늘』을 발표했다. 『꿈하늘』의 주인공 '한놈'은 신채호가 생각하는 독립운동가의 표상이다. 왼팔이 배반하면 왼팔을 잘라내고, 오른팔이 배반하면 오른팔마저 베어버린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는 신채호의 역사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1919년 2월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동 사회 건설을 주장하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신채호도 여기에 서명했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발기인 회의에 참여한 신채호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반대했다. 이유는 안창호의 허락하에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제출한 위임통치 청원 때문이다. 결국 신채호는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고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갔다. 1920년 4월에는 베이징대학 유학생이던 박자혜와 재혼했고 잠시나마 행복을 누렸다. 1920년 9월에는 박용만과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신채호는 더욱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다. 192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무정부주의자인 유자명과 합숙하며 ‘조선혁명선언’을 썼는데, 이 선언에서는 타협주의와 외교 독립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오직 암살, 파괴, 폭동을 통해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격한 의열단원들은 ‘조선혁명선언’을 항상 휴대했다. 1923년 1월 3일부터는 상하이에서 70여 개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124명의 대표가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서 임정 대통령의 불신임안을 가결했고, 임정을 ‘개조’할 것인가 ‘창조’할 것인가를 두고 대립했다. 창조파였던 신채호는 임정을 전면 부정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러시아나 만주에 새로운 임정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창조파는 1923년 8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무장투쟁을 준비했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신채호는 1926년 재중국(在中國)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고, 1928년 4월에는 동방(東方)무정부주의자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여 개최했다. 그러나 기관지 발행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환 위조를 시도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대만의 지룽(基隆)항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다롄(大連)으로 압송되었고, 10년형이 확정되어 뤼순 감옥에 갇혔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던 중에 1936년 2월 18일 뇌출혈로 쓰러졌고 며칠 후 사망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참고 자료
이호룡, 『신채호』, 역사공간, 2013
신용하, 「신채호의 생애와 사상과 독립운동」, 『계간사상』 380, 1991
이호룡, 「신채호, 민족 해방을 꿈꾼 아나키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1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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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호, 「丹齋 申采浩의 政治思想」, 『호서문화논총』 5, 1988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 2012
공훈전자사료관 인터넷 자료 및 기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