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품격있는 정치, 품위있는 정치인과 함께 하는 세상이어야 하는데
All Koreans are refugees like animals in the zoos. Corea, Korea, Corean, Korean, Coreans and Koreans. Whatever they are!
All Koreans are refugees like animals in the zoos. Corea, Korea, Corean, Korean, Coreans and Koreans. Whatever they are!
지금
Now
751 Diaspora
유산
Heritage
인문
Humanity
未冷尸
Mirengsi
정치
Politics
언론
Media
Thumbnail
국가자본주의와 공급망 냉전, 그리고 연성 파시즘의 유혹
category-icon

책冊

칼럼
baba77

칼 폴라니의 계급조정 실패론으로 본 한국 정치의 위기

Views
0
2026. 09. 19
  • 칼 폴라니는 시장의 비합리성과 폭력성을 지적하며, 시장이 사회를 위협할 때 발생하는 '이중 운동'과 그 조정 실패가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한국 사회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자산 격차, 세대 갈등 등 심각한 균열을 겪고 있으며, 기존 정당들은 이러한 계급적 문제를 제대로 대표하거나 조정하지 못하고 있다.
  • 국가자본주의와 공급망 냉전이라는 외부적 압력 속에서 국가는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지만, 이는 특정 계층만 보호하고 나머지 계층에 부담을 전가하며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
  • 민주적 절차와 조정을 무시하고 강제적 해결을 추구하는 '연성 파시즘'의 유혹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닌 한국 사회 전반의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문제의식 — 왜 다시 폴라니인가?
경제 분야 논객 중에서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시장이 답이라고 말한다. 시장이 옳지 않다면 경제정의는 무엇인가? 내가 받는 임금이나 스페이스 엑스의 밸류에이션은 정당한가?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은 완벽하지 않고 시장이 문제의 소지라고 했다. 어떻게 고등학교 나와서 삼성전자 반도체 분야에서 단순 업무하던 사람이 성과급 받아 동탄 아파트 사는 사람과 대학원 나오고 대학에서 시간강사 하다가 쿠팡 물류 노동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의 처지를 시장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해봐라.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인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시장은 카지노판이다. 이것은 슘페터가 직시했고 레닌이 제국주의론으로 발전시킨 이론이다. 시장은 폭압적이고 눈먼 전차이며 경제적인 것 말고 문화적이고 정치적이고 인종적인 요소가 섞여서 발현된다.
 
칼 폴라니는 비엔나의 바로크식 건물이 만든 지성의 소산이지만 한계효용과 수용공급을 따지는 오스트리아학파와 다르다. 오스트리아학파들은 나치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시카고학파를 만들었고 젊은 시절 이상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폴라니는 런던에서 비정규직 강사 생활을 하다가 미국 유명 대학에 교수직을 맡을 뻔했는데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캐나다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망한 자본가였고 그의 주변에는 합스부르크 판 강남 좌파들이 많았다. 그는 자기의 친구 칼 만하임이 말한 날카로운 관찰력을 같은 떠도는 지식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 이 책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폴라니의 그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이 멋있어 보이고 참신했다. 수리 경제학이 판치는 한국 경제학계에서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 계급투쟁과 사회경제적 문제를 하나의 시야로 묶어 해석하는 이론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칼 폴라니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었고, 지배 블록에도 노동자 전위대에도 속하지 않은 떠도는 자유인이었다. 그 위치가 사회를 예리하게 보게 했다. 한국의 정치평론가들은 자본이나 미래의 관직에 묶여 현상을 자기 먹거리에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풍토에 염증을 느끼면, 조금 올드하더라도 고전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이 책을 가장 사랑했던 다른 한 사람은 조지 소로스다. 소로스는 폴라니를 사회개혁의 설계도로 읽기보다, 거시경제적 위기와 금융의 관계를 읽는 렌즈로 활용해 파운드를 공격했다. 『거대한 전환』은 경제사가 아니라 정치 사회학적 진단이다. 자기조정 시장이 노동·토지·화폐를 ‘허구적 상품’으로 만들면, 사회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이중 운동을 일으킨다. 문제는 그 보호 운동이 계급들 사이에서 합의된 형태로 조정되지 못할 때 생긴다. 1920~30년대 유럽에서 산업노동자, 농민, 몰락한 중간계급, 실업자군이 자유주의 정당 체제 안에서 이해를 봉합하지 못하자, 그 공백을 메운 것이 파시즘이었다. 폴라니에게 파시즘은 이념이라기보다, 시장사회의 제도적 실패에 대한 해법을 정치적 영역에서 찾되 민주주의적 절차와 계급 간 타협을 우회하는 방식이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공급망 재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균열은 1930년대와 표면적으로 닮았다. 그러나 이 비유가 수사로 끝나지 않으려면 특정 사회의 계급 구성과 대표 체제에 붙여 보아야 한다. 한국은 그 시험대로 예리하다. 압축 산업화, 1997년 이후의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2020년대의 자산 가격 충격과 인구구조 변화가 한꺼번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2020년대 후반에는 조건이 하나 더 얹힌다. 국가가 다시 시장 위에 올라타려 하는 국가자본주의와 블록으로 갈라진 공급망 냉전이다. 선택의 폭이 좁아질수록 사회는 조급해지고, 조급증은 타협보다 강제를 유혹한다. 우리는 하는 미국과의 경제 통상 관계는 하나는 먹고 사는 경제고 다른 하나는 서로 편을 갈라 죽고 죽이는 정치다. 우리는 IT 냉전 시대에 살고 있는데 과거 냉전은 낭만적이었다면 이 냉전은 치사하고 이념도 없고 정글 같은 것이다. 적이 만든 스마튼 폰은 사이버 해킹 무기고 친구가 주는 보조금은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이제 대공황 전 1920-30년대에 살고 있다. 바보들아, WTO 자유무역은 잊어라. 우리들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고 트럼프는 미국 무늬를 입힌 파시즘이다.
 
폴라니적 계급 지도
폴라니의 틀에서 결정적인 것은 계급 그 자체가 아니라, 계급들이 시장의 충격에 대응해 만들어내는 정치적 연합이다. 이 점에서 그의 이론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정치이론과 닮았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에서 파시즘이 힘을 얻은 것은 노동계급 전체가 급진화해서가 아니다. 몰락하는 소상공인, 실업 위협에 처한 화이트칼라, 연금 불안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처럼 서로 다른 이해의 집단들이 기존 좌우 정당 안에서 대표되지 못한 채 시장 밖의 해법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균열선은 선명하다. 대기업 정규직은 이미 노동시장의 내부자다. 기업별 노조와 연공서열형 임금이 시장 변동을 상당 부분 막아 준다. 이들의 이해는 ‘시장으로부터의 보호’보다 ‘기존 지위의 방어’에 가깝다. 좌파 정당의 재분배·연대 서사는 이들에게 실질적 유인이 되기 어렵다. 2025년 전후 통계에서도 대기업 정규직과 그 밖의 부문 사이 임금·근속 격차는 줄지 않았고, 정규직·비정규직 임금 격차는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수준까지 벌어진 바 있다.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청년층은 정반대에 있다. 주 52시간제 등 노동시간 규제가 일자리의 양에 미친 영향에 대해 해석은 갈린다. 그러나 이들이 체감하는 핵심은 정규직 노동시장으로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성장 세대의 첫 일자리가 비정규직인 비율은 이전 세대보다 뚜렷이 높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 노조 체제의 보호 확대가 아니라 이중구조 자체의 재편인데, 주요 정당 누구도 이 의제를 대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자영업자층은 소비 위축, 플랫폼 자본의 잠식, 임대료 압박 속에서 프레카리아트화되고 있다. 이들의 보수 성향은 이념의 선택이라기보다, 국가의 재분배 정치가 자신들을 대변한 적이 없다는 경험적 학습에 가깝다. 중산층은 가장 유동적이다. 보유세·거래세와 자산시장 변동성은 ‘국가가 나의 자산을 위협한다’라는 감각을 심어 주었고, 재분배 일반에 대한 방어적 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폴라니적으로 보면 역설이다. 원래 시장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해야 할 위치에 있던 집단이, 자산 보유자로서는 국가 개입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하는 이중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대표성 위기 — 인선 실패를 한 줄로 환원하지 않기
진보 진영 내부의 균열도 겹친다. 성평등가족부(전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 인선이 반복적으로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김행, 강선우에 이어 2026년 9월 용혜인 후보자가 8월 30일 지명 뒤 약 2주 만인 9월 13일 자진 사퇴했다. 인사청문회에도 오르지 못한 채 내려온, 이재명 정부 들어 청문회 전 낙마의 첫 사례였다. 다만 이 사건을 ‘젠더 의제가 계급 의제를 밀어냈다’라는 한 줄로 환원하면 정확하지 않다. 직접적 뇌관은 비례대표 의원직과 장관직의 겸직, 기본소득당의 소수정당 생존 구조, 이른바 가족 정당·언더그라운드 조직 논란, 그리고 여당 내부에서까지 나온 사퇴 압박이었다. 후보자 본인도 여당이 우려하는 상황에서 국무위원직 수행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검증 라인의 허점과 정무적 인선 관행이 반복된 인사 실패의 성격이 강하다.
 
그럼에도 상징은 남는다. 계급상으로 불안정한 유권자층에게, 진보 정당이 재분배와 정체성 의제를 동시에 짊어질 때의 정치적 비용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만 잘하기도 벅찬데 무슨 그 복잡한 정체성 가지고 노냐? 동성연애자 정체성까지 오지랖을 넓히면 좌파고 진보고, 다 뭉개진다. 좌파의 숙주를 타고 동성애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려는 그들은 러시아 혁명 시 볼셰비키만큼 전략적이다. 민주당은 그들에 비해서 순진하고 무능해 보인다. 당하려면 해봐라. 정체성 정치 자체의 정당성과 특정 시점의 인선 실패는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유권자가 그 구분을 정교하게 해 주리라 기대하는 그것은 순진하다. 대표 역량에 대한 회의는 세부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생긴다. 386세대(2026년 기준 50대 후반~60대 초반) 의 존재감 평가도 같다. 특정 정치인 지지를 통해 영향력을 유지한다는 해석과, 은퇴 나이 진입과 함께 조직력은 공동화되고 상징만 남았다는 해석이 공존한다. 후자가 맞다면, 진보 정당의 전통적 핵심 기반이 인구학적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계급 연합을 구성하지 못한 채 기존 지지기반의 노화와 함께 대표성을 잃어 가는 국면이다.
 
조정 실패에서 연성 파시즘으로
폴라니가 말한 파시즘은 나치즘 같은 전면적 전체주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시장 실패에 대한 반동이 민주적 절차를 우회해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봉합되는 현상이다. 이 정의를 따르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헌법적 정당성과 별개로 하나의 징후적 사건이다. 선포는 당일 밤, 국회가 해제 요구안을 가결한 뒤 다음 날 새벽 계엄은 풀렸다. 약 6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의회를 통한 협상이 아니라 국가의 강제력으로 정치적 교착을 일거에 해소하려 한 시도라는 성격을 숨기지 못했다. 이후의 탄핵과 재판은 그 시도가 제도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보여 줄 뿐, 징후로써 의미를 지우지는 않는다.
 
이를 연성 파시즘으로 부른다면 핵심은 세 가지다. 좌우 정당 체제가 내부자/외부자, 자산 보유자/무자 산자, 세대 균열을 대표하지 못하는 공백.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국가가 시장 조정자가 아니라 직접적 통제자로 나서는 국가 자본주의적 경향. 교착을 협상이 아닌 강제로 돌파하려는 유혹의 상시화. 전면적 권위주의의 등장이라기보다, 민주주의의 외피 안에서 계급 갈등의 정치적 조정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에 가깝다. 어느 정당의 지지율보다 중요한 질문은, 지금 어느 쪽이든 이 균열을 대표할 수 있는가이다. 양쪽 모두 전통적 지지연합의 언어로만 봉합하려 한다면, 극단적 처방에 대한 관용은 특정 정당의 흥망과 무관하게 반복된다.
 
국가자본주의와 공급망 냉전 — 선택지가 좁아질 때
1930년대의 금본위제가 정책 공간을 질식시켰다면, 2020년대 후반 한국을 질식시키는 것은 공급망 냉전과 그에 조응하는 국가자본주의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원전은 이미 비교우위 상품이 아니라 지정학적 자산이다. 중국은 HBM·D램·낸드에서 기술 격차를 수년 단위로 좁히고, 범용 메모리 시장을 파고들며 한국 기업의 수익 구조를 압박한다. 미국은 동맹국의 첨단 생산을 원하면서도 허가·관세·매출 부담으로 공급망의 수익성을 정치적으로 재분배한다. 한국은 중국 시장을 완전히 버릴 수도, 미국의 기술·장비·수요 네트워크 밖에서 살 수도 없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쪽의 제약을 동시에 감당하는 회랑 걷기다.
 
정부는 그 회랑을 국가가 직접 넓히겠다고 나선다. 2026년 이재명 정부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3대 메가프로젝트로 내걸고 서남권 팹과 전력·용수 인프라를 ‘속도전’으로 앞당기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중앙아시아 5개국과 첫 다자 정상회의를 열어 핵심 광물·에너지·첨단 제조를 잇는 서울 선언을 채택했다. 탐사부터 제련·소재·완제품까지 전 주기를 국가가 설계하겠다는 발상이다. 시장이 실패했으니, 국가가 공급망을 다시 임베드하겠다는, 매우 폴라니적인 대응이다.
 
문제는 그 대응이 계급 조정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자원을 전략산업과 대기업 생태계로 집중한다. 내부자(대기업 정규직, 전략산업 협력사, 거점 지역의 기득 이해) 는 보호받는다. 외부자(비전략 부문 자영업, 하청 노동, 청년 진입층, 자산 없는 임차 중산층)는 전력 요금, 재정 우선순위,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압력의 비용을 먼저 진다. ‘국가가 살길을 연다’라는 서사는 보호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보호의 대상을 선별한다. 선별이 정당화되려면 대표와 보상의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을 때 국가자본주의는 조정 제도가 아니라 조급증의 기관차가 된다.
 
선택지가 좁아지면 불안은 시간을 참지 못한다. 팹 하나를 늦추면 중국이 따라오고, 광물 하나를 놓치면 배터리 공급망이 흔들리고, 데이터센터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AI 생태계가 공중분해 된다. ‘지금 한가하게 이해관계를 조정할 때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상식이 된다. 그 문장은 경제적으로는 맞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위험하다. 시장이 작동하지 않고, 정당이 계급을 대표하지 못하고, 시간은 없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민주적 절차의 지연을 사치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연성 파시즘의 한국적 형태는 제복과 횃불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더 개연성 있는 모습은 비상한 산업 목표를 내걸고, 환경·노동·지방·소수 이해의 거부권을 ‘발목 잡기’로 명명하며, 국회와 관료제를 우회하는 특별법·특별기구·대통령 직할 프로젝트를 상시화하는 것이다. 반대는 반국가가 아니라 반성장, 반미래, 시대착오로 재코딩된다. 2024년 12월의 계엄이 노골적 강제였다면, 이후의 유혹은 더 부드러운 언어를 입을 수 있다. 속도, 생존, 공급망 안보, 국익.
 
양대 정당 모두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수는 안보와 시장 질서의 이름으로, 진보는 국가 주도 성장과 불평등 시정의 이름으로 국가의 직접 통제를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내부자–외부자 균열을 정면 돌파하지 못한다. 정규직 기득을 건드리지 못한 채 비정규·청년을 달래려 하고, 자산 보유 중산층을 자극하지 못한 채 무자산층의 분노를 흡수하려 한다. 공급망 냉전은 그 미봉을 더 어렵게 만든다. 재원을 전략산업에 쏟아부어야 하는 정부는 보편적 보호를 약속하기 어렵고, 보편적 보호를 약속하면 속도전을 수행하기 어렵다.
 
폴라니의 경고는 파시스트가 갑자기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다. 시장사회의 제도가 사회의 보호 요구를 민주적으로 번역하지 못할 때, 그 공백을 권력이 강제로 메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 공백은 이미 열려 있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자산과 무자산의 단층, 세대 간 대표성의 공허, 그리고 국가자본주의가 선별하는 보호의 위계. 공급망 냉전은 그 위에 ‘시간이 없다’라는 도장을 찍는다. 해법은 거창한 이념의 교체가 아닐 수 있다. 더 시급한 것은 조정의 제도를 복원하는 일이다. 내부자 노동시장의 진입장벽을 실제로 낮추는 규칙, 자영업과 플랫폼 노동을 재분배 정치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대표 장치, 자산 보유 중산층의 공포를 조세 포퓰리즘이 아니라 주택·노후 안정으로 번역하는 언어, 전략산업 투자와 그 비용 부담을 공개적으로 협상하는 정치. 국가가 공급망을 설계할수록, 그 설계의 비용을 누가 지는지를 말하는 정치가 더 필요해진다. 그것이 없으면 국가는 시장을 임베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갈등을 덮어 버리는 쪽으로 미끄러진다.
 
폴라니를 다시 읽는 이유는 1930년대로 돌아가자는 향수 때문이 아니다. 시장이 사회를 삼키려 할 때 사회가 어떻게 반격하는지, 그 반격이 계급들 사이에서 조정되지 못할 때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선택이 좁아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좁아진 선택을 이유로 민주적 조정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후자를 유혹이라 부르는 것은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유혹을 유혹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일상이 된다.

댓글
( 0 / 500 )
kim_minsoo
7
폴라니를 단순히 시장 비판의 고전으로 읽지 않고,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자산 격차, 공급망 재편까지 연결한 시각이 인상적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장이냐 국가냐의 선택이 아니라, 시장의 충격을 사회가 민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 0 / 500 )
hongjo
7
가장 섬뜩한 부분은 ‘시간이 없다’는 말이 민주주의를 압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위기 상황에서는 속도와 효율이 강조되면서 토론과 협상이 장애물처럼 취급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위기일수록 국가의 강한 개입과 민주적 통제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 0 / 500 )
minsuk
4
폴라니가 지금 다시 읽히는 이유가 분명하네요.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도, 반대로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도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사회적 이해관계를 조정할 민주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 0 / 500 )
사라박
4
한국 정치의 위기를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내부자와 외부자, 자산 보유자와 무자산자, 세대 간 대표성의 문제로 바라본 것이 설득력 있습니다. 특히 정규직·비정규직의 간극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계층의 불만을 기존 정당의 언어로만 봉합하려는 정치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지적이 뼈아픕니다.
( 0 / 500 )
sarang2948
2
폴라니의 ‘이중운동’이라는 개념을 지금 한국 사회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장의 압력이 커질수록 사회적 보호 요구도 커지는데, 그 요구를 민주적 타협으로 제도화하지 못하면 결국 더 강한 국가 개입이나 극단적인 정치적 해법을 찾게 된다는 경고로 읽힙니다.
( 0 / 500 )
mama
1
폴라니의 경고를 한국 정치에 적용한다면 결국 답은 계급 간 조정 능력의 회복에 있겠지요. 청년, 비정규직, 자영업자, 정규직 노동자, 자산 보유층이 서로를 적으로 보는 구조를 그대로 두고 어느 한쪽의 분노만 정치적으로 동원해서는 사회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은 그 문제를 꽤 근본적인 차원에서 건드리고 있습니다.
( 0 / 500 )
신고내용

신고내용을 선택해주세요
회원비난/비하/욕설글 및 댓글도배성 게시물저작권 침해/불법자료 유출허위사실유포개인정보 유출.사생활 침해무단광고/홍보음란물 및 도박 불법 광고물범죄행위 관련 글불법행위 관련 소개물품 판매 및 사기글악성코드 및 스파이웨어 유포기타 사유 및 운영진 판단
ID
PasswordShow password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Sign in with Google

All information provided by us is free of charge and is for the public good.

ⓒ 2022. P-UM.net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