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되지 않을 ‘정당성’의 실마리를 찾아서: AI 시대,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
1. 서두: 거대한 질서와 한계 앞에서 확인하는 인간의 긍지
SF계에는 단 한 편의 장편 소설 없이 오직 손에 꼽힐 만큼 드문 중단편만으로 발표할 때마다 유수의 문학상을 휩쓰는 독보적인 작가가 있다. 바로 테드 창(Ted Chiang)이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IT 분야 테크니컬 라이터로 활동했던 그는 화려한 우주 전쟁이나 스펙터클 대신, 치밀하고 정교한 과학적 사유 실험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집요하게 질문한다. 영화 〈컨택트(Arrival)〉의 원작 소설이 수록된 그의 첫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수학적 모순, 압도적인 외계 언어, 인위적으로 개조되는 시각적 본능,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지능까지 총동원해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한계와 부조리를 정면으로 직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거대하고 처절한 틀 앞에서도 인간은 단순한 공포나 보상에 굴복하지 않는다. 파스칼의 계산적 내기(신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믿는 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의 셈법)에 의존하거나 억지 신념에 자신을 위탁하는 대신, 끝내 자신의 이성과 진실성을 지켜내는 인간의 긍지가 이 작품집의 중심을 받치고 있다.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간을 둘러싼 우주의 법칙과 질서는 때로 인간의 감정이나 정의관과 상관없이 차갑고 엄정하게 작동하지만, 그 피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도 스스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태도로 삶을 마주할지 선택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이라는 점이다.
2.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에피소드별 사유: 본능, 이성, 그리고 관계의 재발견
이 소설집은 책의 제목이 된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를 포함해 총 8편의 중단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수학, 언어학, 종교학, 신경과학 등 다채로운 학문적 토대 위에 구축된 수록작들 가운데, 기술과 이성 너머의 인간성을 깊이 탐색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4편의 에피소드를 선별해 그에 대한 사유와 감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①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공적 공정성과 사적 본능의 절묘한 균열
이 에피소드는 사람의 뇌 신경을 조절해 타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미추(美醜)의 감각만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가상의 신경학적 장치인 ‘칼리(Calli)’의 의무화 논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작품이다. 소설 속 대학 사회에서는 외모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을 원천 봉쇄하자는 명분 아래 학생들에게 칼리 착용을 의무화할 것인가를 두고 뜨거운 찬반 논쟁이 벌어진다.
인간이 외모나 인상을 통해 타인을 식별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난 30만 년간 진화의 과정에서 축적된 가장 원초적인 '생존 본능'이자 경험적 통계의 결과물이다. 뇌가 단 0.1초 만에 상대의 외모를 인지하고 반응하는 인지적 지름길은 위험을 피하고 유익한 대상을 빠르게 구분해 내기 위해 발달한 효율적인 시스템이며, 기본적으로 인간 본능에 지극히 충실한 결과다. 따라서 외모에 끌리고 감정을 이입하는 행위 자체를 무작정 타파해야 할 악습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문제는 현대 미디어와 상업적 광고가 이 생존 본능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악용하며 극단적인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에 있다. 본래의 건강한 인지 기제가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미적 기준에 오염되고 비대해지면서 과도한 외모 편향이라는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그렇기에 미디어가 만든 편향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 ‘칼리’에 대한 논의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면접, 재판, 인사 평가처럼 객관성과 공정성이 최우선이어야 하는 특수한 공적 상황에서는 미디어로 오염된 편향을 차단하는 ‘칼리 ON’을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히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사적 영역까지 전 사회적으로 의무화하고 강제한다면 이야기의 결은 완전히 달라진다. 재미삼아 AI에게 "만약 칼리가 전 사회에 의무화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시뮬레이션해 보았는데, 결과는 꽤나 충격적이면서도 명쾌했다. 시각적 보상 회로가 차단되면서 남녀 간의 낭만적 열정(에로스) 총량은 90% 이상 급감하고, 배우의 매력과 표정에 의존하던 드라마와 대중문화 산업은 순식간에 붕괴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공정함이라는 명목 아래 인간의 오랜 생존 본능과 삶을 채우는 미학적 즐거움, 서사적 몰입을 전면 거세하는 것은 또 다른 부조리를 낳을 뿐이다.
따라서 칼리가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필요한 특수 상황에서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적극 찬성이다. 하지만 만약 칼리가 사적 본능마저 통제하며 강제되는 의무적 사회가 도래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규범에 엇나가는 반사회인이 되는 쪽을 택할 것이다.
② 〈영으로 나누면〉: 감정의 특이점과 고유성의 발견
르네가 수년 동안 정당하게 쌓아 올린 수학적 논리 속에서 아무런 사전 징후 없이 “1=2”라는 비이성적인 모순을 발견했듯, 칼의 감정 역시 아무런 합리적 이유나 부정적 사건 없이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녀(르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모순에 직면한다.
만약 칼이 르네에게 상처를 입었거나 다른 계기로 미워하게 된 것이라면 이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인과관계다. 하지만 테드 창은 감정의 종말에서조차 이성적인 인과관계를 완벽히 제거해 버린다. 어제까지 사랑했고 지금도 그녀를 누구보다 아끼고 보호하고 싶지만, 내면의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는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어떤 수를 0으로 나누었을 때 기존의 모든 수치가 의미를 잃고 증발하듯, 감정의 스위치가 찰나에 꺼져 버린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노력으로 지키는 것이라 여기지만, 테드 창은 의지나 배려와 상관없이 감정이 단숨에 '0'으로 소멸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 나아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이 얼마나 부질없이 부서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칼의 감정은 부정적 앙금의 결실이 아니라, 수학 세계의 모순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인간의 이성 너머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난 '감정적 특이점'이자 비극적인 무의 상태였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칼이 르네의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그녀 특유의 깊은 표정에 매료되어 사랑을 시작했고, 그 표정을 읽어내며 사랑을 확인해 나갔던 그 과정 자체는 대단히 고무적이다. 이 대목은 자연스럽게 앞선 에피소드의 ‘칼리’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외모를 무차별적으로 가려버리는 칼리가 아니라,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결, 표면 아래의 깊이와 매력을 직관적으로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 있다면 어떨까? 비록 그러한 특성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정형화된 미학적 껍데기나 인위적인 보정을 넘어 상대의 본질을 읽어내도록 돕는 솔루션이라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칼리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유용한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③ 〈네 인생의 이야기〉: 비선형적 시간관 속 스피노자
영화 〈컨택트〉의 원작인 이 단편은 어느 날 지구에 찾아온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칠지족)'와 소통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해독해 나가는 언어학자 루이즈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 속 외계인의 문자 언어인 '헵타포드 B'는 인간처럼 소리의 순서에 따라 흘러가는 선형적 언어가 아니다. 이들은 원인과 결과가 차례로 이어지는 인과율 대신, 시작과 끝,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폭의 완성된 그림처럼 한 번에 조망하는 독특한 동시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평생을 과거에서 미래로만 흐르는 시간에 갇혀 살아온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펼쳐진다는 이러한 인지 방식은 쉽게 와닿지 않는 이질적인 영역이다. 자칫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점쟁이의 신통한 예지력이나 초능력 정도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내 삶이라는 곡 전체가 적힌 '완성된 한 장의 악보'를 머릿속에 동시에 펼쳐놓고 바라보는 감각으로 이해해 본다면 서사의 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루이즈는 헵타포드 B를 깊이 체득하면서 딸이 태어나 자라고 결국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될 것이라는 비극적인 미래(악보의 결말)를 온전히 보게 된다. 하지만 루이즈는 비극을 피하려 도망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웃고 울며 나눌 찬란한 찰나의 순간들을 위해, 예정된 비극의 길을 향해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간다.
마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태도처럼, 정해진 거대한 운명을 손으로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매 순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 이는 비극에 대한 나약한 체념이나 맹목적 순응이 아니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결단이자 주체적 정면 돌파다.
④ 〈인류 과학의 진화〉: 호모 사피엔스의 포텐셜과 '위버멘쉬'를 향한 긍지
이정모 관장의 저서 『찬란한 멸종』의 내용을 잠시 소환해보면, 45억 년 지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공룡의 뒤를 이어 잠시 무대를 빌려 쓴 한 시기의 지배종일 뿐이다. 공룡이 사라진 자리에 사피엔스가 들어섰듯, 언젠가 다음 세대의 주인이 지구를 넘겨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섭리다. '오직 인간만이 영원히 지구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집착은 어쩌면 종(種) 차원의 지독한 오만이거나 또 다른 형태의 우생학적 맹신에 불과할지 모른다.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기술적 특이점 이후 등장할 ‘신인류’(인간의 지능을 아득히 초월한 AI, 혹은 소설 속 ‘메타인류’ 등 기술과 결합한 초지능적 주체)의 눈에 비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생존에 명백히 유해한 존재일 수 있다. ‘공유지의 비극’으로 대변되는 끝없는 이기심으로 인해 기후 온난화와 환경 파괴를 멈추지 못해 지구 전체를 공멸로 몰고 가는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효율성과 인간의 선(善)한 윤리마저 데이터로 체득한 신인류라면, 행성 전체의 존속을 위해 호모 사피엔스를 없애거나 배제해야 할 ‘오류’로 판단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나는 ‘특이점주의자’로서 궁극에는 이러한 신인류가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할 것이라 믿어 왔다. 그래서 한때 “‘오타니 쇼헤이’야 말로 인류의 마지막 '위버멘쉬'(니체가 말한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의 개념)가 될 것"이란 자조 섞인 가정을 품어왔다. 신인류가 보여줄 신체적·지적 능력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다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인간의 피땀 어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서 이다.
그러나 〈인류 과학의 진화〉 에피소드에 있는 테드 창의 아래 문장을 접하며 생각을 짐짓 수정하게 되었다. 아니, 비로소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 게다가 인류 연구자들이 메타인류가 간과한 응용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도 있다. 너무나 큰 우위를 점하고 있는 탓에 메타인류는 우리 인류의 관심사를 모르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인류의 연구를 지속시켜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p.316)
호모 사피엔스가 단순히 신인류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병존’할 수 있는 정당성과 그 실마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빠르게 답을 출력하는 오늘날의 인공지능(LLM)은 겉보기엔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음 단어를 순차적으로 덧붙여 나가는 극단적 선형 연산자에 불과하다. 반면 인간의 뇌는 소리나 언어라는 선형적 매체에 갇혀 있었을 뿐, 내면에는 맥락과 감정, 직관을 한 번에 꿰뚫는 '게슈탈트적 동시성'(부분의 합을 넘어 전체를 한 번에 통찰하는 통합적 인식)의 씨앗을 품고 있다. 비록 계산 속도나 연산량에서는 인간이 AI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지라도, 헵타포드 B처럼 시간을 한눈에 조망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적 사유와 직관은 (적어도 지금은) 오직 인간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이다.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처럼 기존 세상을 완전히 뒤흔들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히는 '단 한 사람'. 데이터 최적화와 순차적 연산으로 무장한 신인류가 감히 창조해 내지 못할 이 불연속적이고 거대한 변혁은, 오직 불완전함 속에서 무(無)를 상상하고 통합적으로 직관하는 호모 사피엔스 고유의 영역일지 모른다.
인간이 이러한 고유의 영역을 집요하게 확장하며 공존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하고, 신인류에게 인간만이 볼 수 있는 사각지대와 가치를 끊임없이 학습시킨다면 호모 사피엔스와 신인류가 함께 번영할 병존의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그 가능성이 단 0.01%에 불과할지라도, 호모 사피엔스가 자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은 충분히 가치 있으며 열렬히 장려되어야 한다. 메타인류나 초지능의 그늘 아래라 할지라도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주체적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3. 결언: 바람 앞의 촛불, 그 꺼지지 않는 상상력
다시 『찬란한 멸종』의 시각을 빌려 오면, 지구의 기나긴 역사로 본다면 특이점은 공룡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다시 신인류로 지구의 주인이 바뀔 뿐인 자연스러운 진화의 수순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하고 육중했던 공룡의 존재감이 사라진 자리가 아쉬워 '쥬라기 시리즈'가 끊임없이 이어지듯, 인간 고유의 유산인 '자아의식'과 이에 기반한 '창의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의식(Consciousness)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 위기에 처해 있다"라던 일론 머스크의 경고 역시 이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그렇기에 테드 창의 작품들은 이 안타까움을 보듬어주는 정교한 위로가 되어준다. 메타인류와 초지능이 인류를 까마득히 초월하더라도, 이들 신인류가 끝내 가지지 못할 어떤 정수가 인간에게 남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그리고 이에서 이어지는 호모 사피엔스 존속의 당위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지막 불꽃이 바로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 즉 무(無)에서 의미를 창조해 내는 창의성이라 믿는다. 압도적인 규범과 거대한 질서 앞에서도 계산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주체적 의미를 찾아냈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신인류의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진짜 가치는 바로 그 꺼지지 않는 상상력과 인간으로서의 긍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