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과 –그루지아(조지아) 관련 글 중심으로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의 어느 지방 대학의 영문과 나와서 버몬트 주의 어는 작은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1970년대 후반, 매일 밤 뉴스로 레바논 내전을 보며 해외 특파원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어느 큰 신문사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배낭 하나를 메고 지중해를 떠돌았고, 물가가 싸고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같은 분쟁 지역으로 이동하기 쉬운 아테네의 슬럼가에 정착했다. 외신 기사를 여기저기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고, 원고가 팔리지 않으면 피를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외교관이나 글로벌 기업 임원처럼 비즈니스 항공편을 타고 대도시만 오간 사람이 아니었다. 허름한 버스와 수도관이 내장처럼 드러난 기차 화장실을 드나들며 육로를 여행했다. 그렇게 길 위를 걸으며 그는 지리와 문화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깨달았고, 지정학은 책상 위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냉전이 끝나면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냉전의 억압 아래 눌려 있던 민족주의가 다시 분출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발칸을 여행하며 『발칸의 유령』을 썼고, 그 책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내가 카플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지나가는 곳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어 있는 인간성의 냉혹함과 권력의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왜구의 목을 벤 뒤 바람 부는 바다를 담담히 기록하는 문체와 닮아 있다.
카플란에게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게 하고, 새로운 풍경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과 같다. 그의 여행에는 언제나 동반자가 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소리이며, 그 소리를 잃었을 때는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고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나는 대학 시절 방황하던 때, 삼청동 프랑스문화원에서 500원짜리 영화를 보고 나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 복도를 헤매던 기억이 있다. 어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미술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과 나눈 짧은 대화가, 세월이 흐를수록 왜곡된 이미지와 함께 끝없는 기억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초조해진다. 그러나 아직 가보지 못한 발칸과 중앙아시아, 중동을 향한 욕망을 일깨워주는 카플란의 책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런 책이 바로 냉전 직후 발칸과 중동,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쓴 『타타르로 가는 길』이다.
내가 이 책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젊은 시절 냉전 직후 6개월간 중유럽을 거쳐 발칸과 터키 그리고 시리아 이스라엘 여행을 한 경험을 깨우치고 그 경험을 계속 재해석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냉전직후의 풍경을 재해석하면서 트럼프 시대에 부활한 지정학과 기술 패권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타타르로 가는 길』에는 그루지아의 초대 대통령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에 관한 인상적인 글이 있다.
그루지아, 동과 서가 만나는 땅
그루지아는 카프카스 산맥과 흑해 사이에 있는 나라다. 중국 시안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페르시아 북부를 거쳐 로마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길목이다. 고대에는 이베리아(Iberia) 왕국이라 불렸으며, 독자적인 문자와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나라다. 이 나라는 4세기 초 로마 제국보다도 이른 시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카프카스는 원래 수백 개의 언어와 민족이 공존하던 곳이다. 험준한 산맥과 깊은 계곡이 서로를 갈라놓았고, 각 공동체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풍속과 언어를 지켜왔다. 그루지아에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이 있고, 흑해 연안에는 바투미라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가 있다. 이 민족은 언제나 비잔틴과 페르시아, 몽골, 오스만 제국, 이란,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서 살아왔다. 진정한 의미에서 동과 서가 만나는 땅이다.
그루지아 사람들의 이름에도 그런 이중성이 묻어난다. 콘스탄틴과 징기스칸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듯한 역사다. 남자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총을 쏘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마초 문화가 강하며, 여자들은 종교적이고 생활력이 강하다. 트빌리시 구시가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비잔틴풍 양파 지붕 교회가 보이고, 러시아어 노래 ‘백만 송이 장미’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을 지금도 만날 수 있다.
그루지아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잠시 독립했고, 다시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나라가 낳은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 스탈린이다. 그는 그루지아인이었지만 그루지아 민족주의를 누구보다 잔인하게 탄압했고,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시베리아로 보내 죽게 만들었다. 말년에 고향을 찾았을 때, 자신이 숙청해 버린 친구들을 떠올리며 슬퍼했다는 일화는 이 나라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감사후르디아, 시인에서 혁명가로
영어로 시를 쓰고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창백한 지식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다. 그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고, 반공 민족주의 운동가였으며, 동시에 권력에 강하게 끌렸던 정치인이었다. 트빌리시 국립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그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영미 문학 작품을 그루지아어로 번역했다. 소련 체제 아래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조직하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석방된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되자, 감사후르디아가 이끌던 그루지아 민족주의 운동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한 코카서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지역의 민족 갈등은 소련 붕괴를 촉진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냉전 종식의 한 주변 주역이었다. 1989년 트빌리시에서 벌어진 반소 시위에 소련군이 유혈 진압을 가한 사건은 그루지아 독립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시위는 압하지야 문제와 그루지아 주권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겹쳐 있었다. 소련이 무너지자 감사후르디아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독립 그루지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조지아’보다 ‘그루지아’라는 이름이 더 좋다. 미국의 조지아 주와 혼동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나라가 지닌 역사적 질감을 더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파국
1980년대의 감사후르디아는 도덕성과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뒤 그는 급격히 변했다. 대(大)그루지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소수민족과 반대파를 배제했고, 그의 무장 경호 조직은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옛 민족주의 동지들까지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루지아는 내전에 빠졌다. 경제는 붕괴했고, 트빌리시에서는 밤마다 총성이 울렸다. 마초 문화와 무장 조직, 범죄 집단이 뒤엉킨 혼돈이었다.
러시아는 그루지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압하지야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했고, 그 결과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의 주민이 난민이 되었다. 감사후르디아는 민족주의적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대중 앞에서는 늘 부끄러워하고 사람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지식인이었다. 어쩌면 그가 번역한 『햄릿』의 인물과 닮아 있었다. 쿠데타로 축출된 그는 체첸으로 망명했고, 조하르 두다예프 세력의 보호 아래에서 재기를 시도했다. 심지어 자신이 한때 적대했던 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그러나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1993년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감사후르디아가 몰락한 뒤 권력을 장악한 무장 세력은 정통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련 시절 그루지아 공산당 제1서기였고, 고르바초프 시대 소련 외무장관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에두아르드 세바르드나제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세바르드나제는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에 맞서 등장한 인물이 미헤일 사카슈빌리였다.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미국 유학파 변호사였던 그는 2003년 장미 혁명을 이끌어 집권했고, 서구화와 행정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도 그루지아 특유의 과잉 에너지가 있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를 둘러싼 전쟁에서 러시아와 정면 충돌했고, 결국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오데사 주지사를 지냈다가 해임되었고, 귀국 후 여러 혐의로 수감되었다.
아직도 중세의 가을
어떤 의미에서 그루지아는 아직도 중세의 가을에 머물러 있다.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가장자리에서 완전히 근대로 넘어오지 못한 채, 두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현재의 그루지아 정권은 러시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이 나라의 오랜 지정학적 본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백만 송이 장미’의 실제 모델이 살았다는 트빌리시 구시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천 년 넘은 화강암이 깔린 골목,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살았다는 집 아래의 허름한 바, 밤새 춤추는 사람들, 아직 덜 익어 보졸레 누보처럼 떫었던 그루지아 와인. 어느 시인은 러시아어 시를 낭송했고, 바의 여자들은 전설 속의 정숙한 귀부인이 아니라 자유롭고 거칠게 살아가는 현대의 여인들이었다. 그 순간 나는 카플란이 왜 그루지아를 그토록 집요하게 기록했는지 이해했다. 이 나라는 아름다운 풍경과 잔혹한 역사, 시와 총, 와인과 피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타타르로 가는 길』은 바로 그 모순을 가장 서정적으로 기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