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하동(河東)군에는 칠불사라는 절이 있다. 경내에 있는 연못을 사람이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 형체가 7개로 비친다. 옛날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이 김해에 수도를 세우고 그곳의 왕이 되자, 수로 왕의 6명의 동생은 할 수 없이 하동으로 가서 불사(佛寺)를 세우고 그곳에서 방주(坊主)가 되었다. 그 후 수로왕은 그리운 동생들을 만나려고 그 절을 찾아갔지만, 동생들은 그때 이미 모두 죽었기 때문에 절을 폐하고 돌아오는 도중 경내의 연못을 들여다보자, 그곳에 6명의 동생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7개 나란히 비쳐 보였다. 그래서 수로왕은 그 절을 칠불사라고 명명했는데 그로부터 누가 들여다보든 연못의 물에 비치는 모습이 7개가 보인다는 전설이 있다.
1930년 5월 全南 麗水郡邑 金東斌君談
*칠불사 웹사이트에 나오는 연혁에는 김수로(首露王, 42~199)왕의 자녀 중 7명의 아들이 외숙을 따라 출가해 5년 만인 가락국 시조왕 62년(103, 癸卯) 8월 15일에 동시성불(同時成佛)한 곳이라 소개되어 있다. 형제와 아들이라는 차이가 있고, 성불자 중에 수로왕이 포함된 차이도 있다. 수로의 외숙이라면 가야산의 산신쯤 되겠고, 수로왕의 아들의 외숙이라면 아유타국(阿踰陀國)의 태자라고 알려진 인도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 화상(和尙)이다.
현재, 외노자 많은 그곳으로 인도에서 허황옥(許黃玉, 32~189)이 시집왔다는 전설을 학계가 정설로 삼는 수준으로는 칠불사 연혁을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 으스스한 달빛에 비치는 연못에 6~7명의 혼이 동시에 뜬다면 그것은 보통의 사건은 아니다. 인도에서 온, 형제인지 아들인지, 심지어 왕까지 포함된 7명의 사람 형체가 한 번에 죽으려면 무슨 일이 있던 것일지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김수로왕(158세)은 하늘에서 내려보낸 난생설화의 주인공이며 왕비가 된 인도 공주 허황옥(177세)과 지금 관점으로는 장수한, 더구나 두 사람의 성기는 한참 가야 끝이 나고, 펼쳐 앉아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단군처럼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계를 연 사람들이 수두룩한 민족은 왜 일제에 식민지를 당했을까. 신화가 된 역사를 연구할 근거 자료가 전혀 남지 않아 옹색한 일본식 연구 내러티브를 놓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답습하는 게 고작이지만, 어쩌면, 수십 명의 천상계 자손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추측된다. 이 추측이 확증에 가까우려면 정확하게 한민족 조상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암기식 정답이 나와줘야 하는데 그럴 일은 없다. 외우지 않으면 역사가 아니고, 식민사관이 아니면 답이 아닌 사람들로 변했기 때문에 전설의 고향이라도 좋다고 해야 할지.
‘에비야’라고 말하면 어린애들은 대개 위축돼 버린다. 이 말은 지금 ‘아이고 무섭다’라는 말처럼 해석되지만, 여기에는 유래하는 바가 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옛날 조선군이 대거로 일본을 정복하러 간 일이 있다. 그때 조선군은 일본의 에비야라고 하는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워 마지막 1명까지 모두 죽였다. 그 이후 조선인은 ‘에비야’라는 말을 들으면 몸을 움츠리게 되어서 지금도 이 말이 남아 어린애들을 위협하는 문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전남 여수군 돌산(突山)면에는 무심목(無心項)이라는 물목(해협)이 있는데 그 물목은 실은 섬과 섬 사이의 해발 얼마 되지 않는 해발 겨우 10척 정도의 육지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멀리서 이를 바라보면 서해와 남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육지에 의해 나뉘어 있다. 그런데 임진란(히데요시 전쟁) 때 일본의 해군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 물목을 통해 달아날 생각으로 전군(全軍)을 이끌고 무심목에 이르러 진퇴양난에 빠진 상태에서 이순신의 수군으로 인해 전멸되어 버렸다. 그래서 일본인은 당시 이를 무심목(無心項)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또 그 무심목 옆에는 피내(血川)라고 하는 강이 흐르는데 이것은 임진란 때 일본 수군이 그곳에서 패해 그 피가 이 강을 빨갛게 물들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같은 날 金東斌君談
*에비야 벌판은 ‘에비야바라’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흔한 지명은 아니고 일본인 성(姓)중에 에비바라(蛯原), 또는 에바라(海老原) 성씨가 있다. 굳이 풀자면, 새우가 뛰어노는 벌판이 되니, 아마도 바다를 낀 어느 곳에서 유래한 지명일지 모른다. 해로에서 육로에서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말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을까. 왜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고 해야 했던 것일까. 문명의 충돌은 지치지 않고 우월의 싸움을 이어왔다.
그 예가 무심목, 현재의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무슬목이라는 지명이다. 이순신 장군의 크고 긴 칼이나, 김수로왕 내외의 거대한 성기는 키가 큰, 심지어 장수하던 어떤 민족집단의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간혹 그 상상을 실현해 주는 증거 유물이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진짜를 보고도 믿지 못하고, 가짜에 세뇌된 기억만 가지고 살아간다.
피비린내가 넘치던 바다는 진짜 전쟁의 이유와 목적을 숨기고 유유히 천년만년 흐른다.
47. 국사동(國士洞) 최씨 전설
임진왜란(히데요시 전쟁)이라면, 촌옹야수아동주졸(村翁野叟兒童走卒: 촌로와 시골 노인, 아이들과 하인배)에 이르기까지 이를 모르는 자는 없다. 그리고 그때 침입한 왜병의 수는 실로 3조 8억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전란 때야말로 지금 아포면(牙浦面)에 한 부자(富者)가 있는데 자신의 딸을 인근의 최모 씨에게 시집 보냈는데 최모는 아들 하나를 두고 머지않아 죽어버렸다.
이윽고 임진란이 일어나 부자는 노복(奴僕)과 소작인 등 수백 명을 모아 국사산(國士山)의 계곡 입구에 성벽을 세우고 그곳에 진(陣)을 쳤다. 이를 듣고 최모의 처는 그 어린 애를 등에 업고 아버지를 찾아가 보호를 구했지만, 그 아버지는 여자가 진중에 들어오는 것을 상서롭지 못하다고 이를 쫓아냈기 때문에 그녀는 할 수 없이 곡을 하면서 집에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밤 왜병이 급습해 국사산 성(城)을 성을 무너뜨려 그 안의 군사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는데 최씨 부인만은 난에서 피할 수 있었다. 오늘날 아포면 국사동(國士洞)에 최씨 성을 가진 몇 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실로 그녀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1928년 2월 慶北 金泉郡 牙浦面 國士洞, 金文煥氏寄
*체감 3조 8억 명은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수십 년 이상 이어진 전쟁이었다고 해도 그만큼의 병력이 투입되기는 어렵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왜병 3조 8억 명이 투입된 임진왜란이라면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아니라, 세계의 조선 침략이었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거짓인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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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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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은 단순한 허구로 치부하기보다, 오랜 세월 민중이 기억하고 전해온 집단적 경험의 흔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가 전설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더욱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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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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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의 서로 다른 전승과 무심목·피내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읽으니, 역사는 기록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장과 상징 속에서도 당시 사람들이 기억하고자 했던 사건과 감정은 분명 존재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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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aria
6
특히 ‘3조 8억 명의 왜병’이라는 숫자는 사실 여부를 떠나 전쟁을 겪은 민중이 느꼈던 공포와 참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처럼 다가옵니다. 숫자의 정확성만으로 전설의 의미를 재단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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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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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전해졌는지, 지명과 기억이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살피는 것도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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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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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거짓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이 오래 남습니다. 역사 연구에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민중의 기억과 구전 역시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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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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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전해지는 신화와 전설을 읽다 보면 공식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못한 민중의 기억이 얼마나 풍부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오랫동안 전승되었는지를 살피는 일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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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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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 전설처럼 하나의 장소를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기록의 차이를 단순한 오류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람에 따라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고 변형되어 왔는지도 함께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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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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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목과 피내라는 지명에 얽힌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 기억이 땅과 바다의 이름 속에 남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지역민의 언어와 전설 속에 전쟁의 상흔이 살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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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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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는 분명 과장과 상상이 섞여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모든 이야기를 무가치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객관적 사료와 구전 자료를 함께 비교하며 우리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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