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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ever the name—Corea or Korea—dignity come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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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담집 신화(神話)•전설(傳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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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7. 29
  • 대구와 공주, 송림사 전설들은 단순한 지역 설화를 넘어 일제강점기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반영합니다.
  • 손진태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보존에 힘쓴 민속학자였으나, 해방 후 친일 프레임에 갇혀 그의 업적과 진정한 의도가 왜곡되었습니다.
  • 닭 울음소리, 꺾인 송림사 첨탑 등 전설 속 상징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 자유 에너지 시스템이나 민족의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깊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 이 전설들은 도량형의 왜곡처럼 강대국에 의해 역사가 조작될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결국 이 전설들은 민족의 억압된 역사와 왜곡된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손진태의 시도이자,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42. 大邱와 公州의 전설
대구는 본래 해도(海島: 섬)였는데 물이 빠지면서 땅이 함락해 평원이 된 곳에 오늘날의 대구가 세워졌다. 그런데 지금의 대구 앞산인 비파산(琵琶山)에는 해도였던 당시 배를 매 두었던 철쇄가 큰 바위주위에 걸린 채 여전히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또 지금의 달성공원 안의 소위 달성산(達城山)은 본래 중국에서 떠온(공중부양을 의미) 것으로, 그것이 東齋(옛날에는 동서에 두 서재(書齋)가 있었다)의 앞까지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한 여자가 마침 그때 빨래하고 있다가 산이 둥둥 떠오는 걸 보고 “저기, 저기 산이 오고 있네”라고 말했기 때문에 산신령이 요망하게 말하는 여자라고 화를 내며 그 여자를 틀어막고 그대로 주저앉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이 이야기를 듣고 달성산을 잘 보면 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데가 많다).
 
또 충청남도 공주(公州)는 배 모양의 땅인데 어느 풍수의 말에 따라 그 지리(地利)를 좋게 하도록 중앙의 큰 나무로 범주(帆柱) 형태의 것을 세웠다고 전해지며 이것도 여전히 그 기둥이 남아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1930년 3월 大邱府 南町86 李在洋君談
 


*대구 땅이 중국에서 둥둥 떠 온 이야기는 무엇의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등장하는 지명들이 엇비슷하게 현재의 대구에서 찾을 수 있으니, 실제로 대구가 중국에서 왔을 수 있다고 가정해 봄 직하다. 동재 서재는 대구의 기업 학교 등에서 찾을 수 있는 이름이고 앞산도 비파산도 현존하지만, 한자 표기도 쓰지 않아 비슷한 듯 묘하게 다르며, 주위를 바다로 에워쌌던 섬 시절의 물길도 찾을 수 없고, 비파산에 쇠사슬 걸 만한 봉우리도 찾을 수 없다. 이 알다가도 모를 전설은 영토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인에게는 지금까지 소개한 어떤 전설보다 흥미롭다고 볼 수 있다. 뉴라이트가 대중의 관심을 끌지 않으려는 영토 소환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이 논란은 가중될수록 진지하게 다가갈 것이다.
 
이 전설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전에 저자 손진태(孫晋泰, 1900~?)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는 지식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지식인-피랍 또는 납북 또는 월북-친일-숙청’의 프레임 속 손진태는 한국의 학계와 문단이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우려먹으며 지금까지 많은 역사를 감추는데 이용했던 기제에 휩쓸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상징적 인물이다. 미래가 창창한 민속학자요, 역사학자인 그를 언제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무덤이나 세워줬는지조차 몰라도 저주받을 친일파요 부역자로 둔갑시켜버린 우리 안의 내재적 증오심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고정관념을 덧씌워 낙인찍어 버렸으니 그 손해는 막대하다.
 
손진태는 1921년부터 전국의 설화 전설 등을 채집해 1930년 12월에 이 책을 인쇄했고 이 전설 채록 날짜는 인쇄 전인 같은 해 3월이다. 지금, 21세의 청년이 나라가 망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민족의 전통문화 보전에 있다고 행동에 나섰다면 그 청년을 어떤 성격의 인물로 평가해야 하는지,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볼 때다. 현대 한국에서는 이런 청년을 상정할 조건조차, 아니 상상력조차 갖출 수 없지만, 손진태를 친일행위를 한 부역자로 몰아세우는 시각은 매우 심각한 민족 정체성 해리 현상을 낳게 해온,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이어온 역사 왜곡 문제의 방식이자 정책이요, 체계의 수단이며 가해의 근원이다.
 
혹시 중국에서 둥둥 떠온 대구 이야기를 제삼자를 가정해 손진태가 끼워 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다. 진실을 입 밖에 낼 수 없던 시대에 전설 속에서라도 터놓고 전하고픈 후대에 대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한 자가 왜 부역자 이미지를 덮어써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중국에서 떠온 대구는 처참하게 짓밟힌 민족주의 양반 지식인들을 몰살한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恨이 많고 갈 곳을 모르는 분노를 유전자에 품고 산다. 역사를 말할 사람을 전부 죽인 대구에서는, 경북의 많은 부역자가 정치 일선에서 침을 튀겨가며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세월이 흘러 서로가, 서로의 정치 이념에 말리며 제 살을 깎아 먹고 산다. 대구의 회생은 지식인을 말살했던 역사, 진짜 부역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배 모양 공주(公州) 땅이 잘 서도록 큰 돛대 모양 기둥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과거 인류가 건축물 위에 높이 세운 금속 첨탑의 전도체를 이용해 누구나 자유롭게 전기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던 전설과 같은 시대를 상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없으면 무엇이든 상상력을 차단당하는 사고력 통제 시대를 살아도 1859년 태양 폭풍으로 인해 지구 자기장 교란이 발생한 캐링턴 사건(Carrington Event)을 구리가 들어간 금속제 기둥으로 도시의 전기를 운영하던 프리 에너지 시스템(Free Energy System) 세상이 막을 내렸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으로 연결하는 건 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니콜라 테슬라의 무선 전력 송출 기술이 서구 자본가들의 인간 통제 사업수단으로 넘어갔다는 가설 역시 떠올려 볼 만한 이야기다.
 
이제 인류에게 에너지가 공짜였던 시대가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미 그런 시대를 기억하지도, 연구할 기록도 열정도 없다. 세상을 돌리는 시스템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피뢰침 발명이라는 단 한 줄의 기록으로 이미 역사는 평정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복잡한 걸 피하고 단순하고 달콤한 개미지옥과 파리지옥에서 사는 존재다.

 
43. 하회 류씨(河回柳氏) 묘지 전설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하회(河回) 류씨는 서애(西厓) 선생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낸 양반이지만, 그 전의 류씨는 가난한 일족이었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안동김씨는 당시 매우 유복했다. 그때 김씨 문중의 여자로 유씨가문에 시집간 여자가 있는데 친부와 시부상을 동시에 만났다.
 
양가에서는 함께 묘지를 찾았는데 김씨가문에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천하의 풍수를 불러들여 길혈(吉穴)을 점쳤지만, 류씨네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김씨가문의 한 지관이 어떤 곳을 파내 맞추며 말하기를 “내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반)가 지나서 가보고 만일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자리는 매우 좋은 복지(福地)이니 반드시 삼대가 이어서 정승(政丞)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마침 친부의 상(喪)을 치르기 위해 친가에 돌아온 류씨가의 며느리가 사랑(舍廊: 객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한밤중에 몰래 지혈(地穴)을 찾아 밤새 물을 길어다 부었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자 김 씨가 가서 보고 물이 나왔기 때문에 김씨가문에서는 그 혈 자리를 포기했다.
 
며느리는 그 오라비에게 간청해서 그 혈 자리를 물려받아 시아버지를 그곳에 묻게 되었다. 그 이후 김씨 가문은 점차 쇠락하고 류 씨는 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날 李在洋君談
 


*이것은 풍수의 효험에 관한 대표적인 전설로 시집간 딸이 자기 자식의 복을 위해 낳아준 아비의 묫자리를 빼앗은 이야기다. 나를 낳아준 자신의 뿌리보다 내가 낳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건 인간의 공통된 실존의 가치인가, 한국인 특유의 자식 사랑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한결같은 부모의 자식 사랑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인류 살상 무기밖에 없다. 그래서 서애 집안도 안동김씨 가문도 전부 일제에 멸절되다시피 했다. 풍수의 덕이 암만 좋아도 풍수에 앞서는 원칙은 있어야 한다. 애국심 없는 풍수는 졸부들의 향연이다. 풍수의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아 눈으로 보여야만 믿는 이 시대는 눈속임이 풍수보다 상위에 존재할 수 있다. 에테르체(etheric body)와 아스트랄체(astral body)를 종교적 영역에 국한하는 신념은 인간의 기능과 능력에 족쇄를 채우는 과세(課稅) 없는 무한지옥, 미래는 누구에게 달렸을까.
 


44. 松林寺 기원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도덕동(道德洞)에서 약 10리(일본의 약 1里)되는 곳에 송림사(松林寺)라는 대사찰의 흔적이 있다. 5, 6년 전 내가 가서 봤을 때는 대웅전(大雄殿)과 승방(僧房) 두 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을 뿐이었는데, 원래는 매우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1리 사방 정도 평원의 넓이에 옛날의 반석(盤石)이 남아있고, 돌절구(石臼) 등도 절반쯤 매몰돼 있는 채로 여전히 존재했다. 또 절터에서 한참 떨어진 절의 洞口(동구: 절에 들어가는 산문(山門)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지금도 높은 봉(棒) (소위 長栍(장생)을 말하는 것인가: 장생은 장승의 한자어)이 서 있고 그 위에는 어떤 종류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의 대웅전에는 3종류의 대불(大佛)이 있는데 가장 큰 금색 좌불(坐佛)과 백분(白粉)을 칠한 3개의 백불(白佛)과 기타 조상(彫像) 주상(鑄像) 등 총수 50여 개의 불교식 조상(彫像)이 잡다하게 늘어서 있다. 또 약간 흙빛을 띠는 기와로 만든 탑이 있는데 그 기와는 종종 훼손되어 떨어진 것도 있지만, 떨어지자마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떨어진 기왓장을 주워서 얻은 사람은 아직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탑 위에 금속재로 만든 긴 봉이 서 있는데 이것은 중간에서부터 휘어져 있다. 그것은 임진란(壬辰亂: 히데요시의 전쟁을 가리킨다) 때 일본 병사가 이것을 황금이라고 생각해 꺾어 가려고 해서 구부러진 것인데, 꺾는 중에 갑자기 뇌성 병력이 발생해 천벌을 두려워해 중지 도중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지금도 구부러진 채로 남아있다고 지역 사람들은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송림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원 전설이 있다. 송림사 터는 풍수설에서 말하자면 매우 길지로, 만일 그곳에 무덤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에는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온다고 하는 장소였다. 이것을 알게 된 한 도승이 그곳에 절을 세우려고 했는데, 다른 한 지관이 그것을 알고 어떤 양반에게 가서 그 땅이 길지 됨을 이야기하고 그곳에 묘를 쓸 것을 권했다. 양반은 사람을 보내서 그 지리를 탐색하게 해 마침내 무덤을 만들려고 했는데, 도승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결국엔 절터를 닦는 중이었는데, 양반은 이를 풍수(지관)에 상의하자, 풍수는 말하길, “사람들을 보내서 승려를 묶어 땅에 굴복하게 하고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그를 때려야 한다.”라고 했다.
 
도승은 달고(韃苦: 매질의 고통) 견디지 못하고 닭이 두 번 울고 난 후에 “이것으로 이 땅의 모든 악귀(惡鬼)는 완전히 털어내 버렸으니, 안심하고 무덤을 써 달라(닭이 세 번 울면 악귀가 도망간다고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돌아와 그 사연을 고하자, 풍수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장정들을 데리고 되돌아가서 보니, 도승은 하룻밤 사이에 절터를 평탄하게 만들어 절을 다 세웠으며 이미 승려들과 더불어 염불을 외우며 절 주위를 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송림사였는데 이 절은 근세가 되어 화적(火賊: 불한당이나 산적)의 약탈로 인해 다 타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솔도파(率堵婆: 산스크리트 ‘stūpa’의 음역으로 부처 사리를 안치하고 공양하는 건축물) 중에는 여래(如來: 부처를 칭하는 10개의 호칭 중 하나로 산스크리트 ‘tathāgata’의 한역)의 치아를 사리로 받아두고 이것을 보고 절을 하고 기도하면 매우 영험하다고 전해진다.
 
1903년 3월 大邱府 本町 李相晤君談
 
주석: 매장(埋葬) 때에 닭 우는 소리를 낼 때가 있다. 장혈(葬穴: 시체 묻는 구덩이)을 파서 관을 넣고 망자의 이름을 쓴 명 명정(銘旌: 망자의 관직과 성씨 등을 기록한 깃발로 보통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관에 덮어 함께 묻는다)을 관 위에 덮고, 그 위에는 번호를 써넣은 5장의 판(이름은 까먹었다)을 순서대로 옆으로 놓고, 그 한가운데의 두 장을 열어 그 안을 향해 세 번, ‘오호! 달구야!(아- 닭아!)’ 라고 닦고 외친 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다. 꼬꼬댁 꼬꼬하고 닭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李相晤君의 이야기.
 
진태(손진태)가 생각할 때 세 번째 닭(닭이 세 번)이 울면 귀신이나 잡귀 요괴 등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도망간다고 하는 이야기는 조선의 기괴 설화중에 곧잘 있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 중에 세 번이나 닭이 우는 소리가 난다는 대목은 첫 번째 닭 두 번째 닭 세 번째 닭이 우는 소리를 의미하는 마술이 아닐까.
 


*일제의 기록 중에 의미심장한 상징 중 하나에 이 닭의 존재다. 닭이 어쨌다는 것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 많은 기술 중에 바로 이 닭 이야기는 가장 악한 것과 선한 것의 대비를 드러낸다. 닭은 어둠을 깨우고 새벽을 알리는 영험한 존재를 상징하고 매일 가장 먼저 울어 밤의 기운을 몰아내고 새로운 날을 불러온다. 그래서 닭의 울음소리가 귀신과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힘을 지녔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 연원을 깊이 있게 찾지는 못했다. 풍향계에 달린 닭이나,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 꼭대기 황금빛 수탉이 진정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직 모른다. 베드로의 예수 부정도 잘 모르겠다. 좋은 의미로 쓰이든, 나쁜 의미에 동원되든, 닭은 시작의 의미가 있다. 누군가에게 시작은 곧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될 테니, 관을 땅에 묻는 매장지의 닭 울음은 큰 절을 창건하는데 필요한 신적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송림사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어째서 꺾어진 금속 첨탑이 남아있던 것일까. 정말로 전도체 첨탑으로 인류의 생활이 유지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1092년, 고려 고승 대각국사 의천이 송림사를 크게 중건했고, 창건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 명관(明觀)이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때 이두를 사용했고, 그 언어는 산스크리트와 상통한다. 스투파와 타타가타 등 인도 산스크리트가 한자어로 변형되는 과정과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는가.
 
일본의 1리가 조선의 10배라는 기준은 당시 권력의 잣대다. 도량형의 통일을 패권의 기본권으로 가르치는 세계사는 도량형의 해석을 바꾼 눈속임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최상위 포식자는 열 배를 십 분의 일로 줄여서 얻는 해석으로 세계를 평정해나갔다. 과연 인간은 살아남을 것인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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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do
9
손진태가 전국을 다니며 이런 설화를 채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민속학의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전설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당시 사람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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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혁
6
송림사의 닭 울음 전설이나 귀신을 물리친다는 믿음은 한국뿐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서 새벽과 닭을 '어둠을 끝내는 존재'로 여긴 공통된 상징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비교 연구까지 이어진다면 더욱 풍성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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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n
7
이런 자료를 읽다 보면 조선의 전설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두려움, 희망이 응축된 집단 기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잊힌 설화를 다시 소개하는 작업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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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규
5
대구가 섬이었다는 이야기, 떠다니는 산, 풍수 명당 같은 전설들이 한데 모여 있는 걸 보니 지역 사람들의 집단 기억과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했는지 느껴집니다. 설화를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하기보다 그 시대의 문화와 인식을 읽는 자료로 접근하면 더욱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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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5
손진태의 삶과 연구가 한국 학계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다만 개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사료와 연구를 함께 검토해야 할 문제이고, 설화의 내용과 역사적 해석은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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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_k
4
대구와 공주, 안동, 송림사까지 지역마다 전승된 이야기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풍수와 신성한 공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 민속이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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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bridman
3
손진태처럼 전국을 직접 다니며 설화를 기록한 연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것이겠죠. 자료를 남긴 선배 학자들의 노고는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충분히 재조명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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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2
전설은 과학으로 증명하는 대상이라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했던 방식과 상징을 담은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읽으니 한 편 한 편이 훨씬 깊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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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79
0
이런 기록들을 현대어로 풀어 소개해 주니 원문보다 훨씬 읽기 편했습니다. 앞으로도 다른 지역의 설화와 전설을 함께 소개해 주시면 한국인의 역사적 상상력과 민속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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