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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inichi 4.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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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30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스오우(周防)에서 태어난 농민의 아들이다. 부친이 이토(伊藤)가문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부자가 함께 그 집안의 하급 무사가 되었다. 누가 타인의 가문으로 들어가는 레토릭은 일본 역사 인물 설명에 흔히 나오는 문구다. 이토 역시 양자 입양이나 낮은 직급의 부하로 무사 가문으로 들어가 성공한 전형적인 예다.
 
스오우(周防)는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県)인데, 1871년 폐번치현(廃藩置県:기존의 번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 관할로 만든 행정개혁)으로 山口県이 되었다. 명치 시대 정치인의 대부분은 이 스오우(周防)와 나가토(長門) 등에서 나왔고 모두 쵸슈(長州)藩에서 야마구치(山口)県으로 변경되었다. 기존의 藩 제도를 폐지하고 서구에 의한 개혁 개방을 시행한 소위 유신(維新)이 과연 어떤 혁신이었길래 고유의 문화를 꽃피워 오며 살던 지명의 이름을 통폐합한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는 에도 말기 유명한 사상가이자 무사인 나가토(長門)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밑에서 공부를 했고, 같은 나가토(長門) 출신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 함께 존왕양이(尊王攘夷: 일본왕실을 존중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 운동을 했으며, 1862년에는 영국공사관 방화사건에도 참가한 테러리스트였다. 그리고 다음 해, 1863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에 입문, 1864년 런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쵸슈(長州)藩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귀국했다. 1864년, 1866년에는 두 차례에 걸친 쵸슈(長州) 정벌이 있었는데 이 사이인 1885년 일본은 내각제가 시작되었다. 결론적으로 쵸슈(長州) 정벌은 일본의 근대를 일개 지방에서 시작한 시발점이자, 근대 정치인들을 배출한 고장이고 막부의 권위가 막을 내리게 된 지역적 상징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각제의 시작과 함께 그 초대 총리대신이 된 자다. 그가 이어서 5대, 7대, 10대 내각의 총리대신을 연속해서 역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이토는 러시아, 영국 등과의 외교면에서도 전면에 섰던 능력자로 최종적으로 우리 국권침탈의 주역이기도 하다. 1895년, 청일전쟁 후 조약을 맺기 위한 일본 측 전권 자이었고, 1905년에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한국 통감이 되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당했다. 10월 26일은 한국에서 의미 있는 날이다.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날이다.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연구는 매우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있어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 근대 개혁 정치인의 상징인 이토가 실은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름도 분명히 나돈다. 그의 조선 이름은 임춘모, 부친은 임세장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토는 공식적으로 근대 자발적 창씨개명의 선구자 되시겠다. 족보 잘 아는 사람이 파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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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이토 히로부미 조선인 설의 증거로 이토의 한복 입은 사진과 1904년 3월 24일 고종에게 받은 한국의 훈장을 달고 찍은 사진이 있다. 한복은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지용이 1906년 11월 이토에게 선물한 것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고 하고, 태극훈장의 이름은 1900년에 제정된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이다. 심지어 이토의 젊은 시절, 사무라이(侍) 하카마(袴) 복장의 사진은 얼굴에 점도 없고 얼굴 형태도 전혀 다르다. 막부 말기 무사들이 머리를 이발하고 양복으로 갈아 입은 사진은 많지만, 이렇게 역변한 예도 흔하지는 않다. 이런 사진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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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책, 즉 교양서와 전문서를 읽는다고 해도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수많은 근대의 흑백 사진을 완전하게 당시의 실제 사실에 맞게 해석할 수 없다는 시점의 괴리다. 누가 언제 어떤 카메라로 어떤 상황들을 사진 촬영했는지 모른 채, 그저 돌아다니는 사진만으로 그 시대를 유추할 따름이다. 순간을 찍은 당시의 사진도, 기술 발전으로 가능해진 최근의 동영상 촬영도 역시 완전한 과거 조명은 쉽지 않다.
 
그다음으로, 옛 사진 중에는 당시 기술로도 충분히 위변조할 수 있었던 점을 들고 싶다. 우리는 오래된 흑백 사진을 보는 순간, 과거에 사로잡혀 회상에 잠기기 쉽지만,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유리원판 자체를 의도적으로 수정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책에 검열이 있었던 시절을 모르고 읽는 책은 의심의 여지가 발견되지 않듯이, 손을 댄 사진 연출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모든 흑백 사진은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사진만으로 미묘한 역사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이토의 한복 사진은 나이가 들어서 촬영한 것이다. 더구나 가족인 아내까지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다. 나이가 들고 한일합방을 완수할 단계에선 그가 굳이 무엇 때문에 한복을 차려입고 두 손까지 모으고 촬영에 임했을까. 망국과 매국의 고비에서 친일파 이지용과 이토의 악취미였던 것일까. 훈장도 한복도 외국인이 착용한 예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에, 이 두 가지 사진만으로 이토를 조선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사진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아 개운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진 하나가 있다. 정동 바위에 새긴 식민지배 통치의 염원 글이 찍힌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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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지융여천양무궁 (寶祚之隆與天壌無窮)
대훈위 후작 이등박문 근제 (大勳位候爵伊藤博文謹題)
1905년 11월 彫之
 
寶祚之隆與天壌無窮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말이다. 영원히 우리를 통치하겠다는 요망사항을 고대사의 한 구절을 따와 돌에 새기고 천황에 맹세할 정도의 염원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일본에서도 이 사진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엽서로도 판매한다. 그러나 이 사진들을 이치에 맞게 설명한 내용은 없다. 현대인에게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진 몇 장과 과거지사의 팩트가 풀리는 것은 독자의 관심 여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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