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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LA 이승우 변호사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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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여래장(일심) 사상과 한반도 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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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14
  • * 대승기신론은 유식학의 아뢰야식 사상을 넘어, 번뇌 없는 '여래장'을 궁극적 깨달음의 기반으로 제시하며, 원효는 이를 무한한 공덕으로 가득 찬 자성청정심으로 해석했다.
  • * 현장법사의 유식학은 의식 작용을 위계적으로 분류하여 사회 계층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함의를 가졌으나, 원효는 이를 비판하며 아뢰야식과 안식 간의 순환적 관계를 통해 평등 사상을 강조했다.
  • * 원효의 사상은 민중 중심의 평등을 지향하며, 복잡한 교리 대신 쉬운 방법으로 깨달음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 폭력 없는 평화로운 통일 신라를 염원하는 여래장 사상으로 확장되었다.
  • * 필자는 대승기신론의 '무명' 개념을 통해 현행 헌법 3조의 영토조항이 남북 갈등의 '충동적 망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실효적 지배 중심의 헌법 개정과 상호 이해를 통한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안한다.
  • * 원효의 '회통' 방식처럼 남북한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번뇌 없는 '여래장'과 같은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지향하며,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마명보살이 쓴 책으로 기원후 5세기경에, 대승에 대한 믿음을 증강시키기 위한 원력으로 작성된 것이다. 유식학에 근거한 집필이나, 유식학의 최고 가치인 아뢰야식에 머물지 않고 일심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원효 스님은 일심은 적멸이라고 했고, 적멸이 곧 여래장이라고 했다. 유식학의 아뢰야식과 여래장의 차이는 모두 같은 기억을 내포하는 저장식에 기반하고 있으나, 아뢰야식은 깨달음과 열반의 기반인 동시에 번뇌의 기반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래장은 깨달음과 열반의 기반이지 어떤 번뇌도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원효는 그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여래장은 무한한 공덕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정의함으로써 대승기신론의 취지를 구체화했다. 아뢰야식과는 차원이 다른 완벽히 그 자성이 청정한 마음, 즉 번뇌가 완벽히 사라진 자성청정심을 수행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당나라 시대,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602-664)는 이 유식학의 대가이다. 유식학의 내용은 인간의 괴로움, 궁극적으로 죽음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최초 원인과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유식학의 죽음에 도달한 과정은 아래와 같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이다. 이것을 12 연기라 표현한다. 현대어로 풀어 보면 무지에서 무의식적 의도, 무의식적 판단 작용, 형태와 개념, 6가지 감각 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의식 그리고 접촉작용, 감각 작용, 사랑, 집착, 존재(자아), 태어남 그리고 늙고, 죽음의 과정을 말한다. 특히 판단 작용을 더욱 세밀하게 분류하는 작업에서 유식학이라는 독자적인 학파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감각 기관 안이비설신의가 대상을 만나면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그리고 의식을 가지게 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과정을 전5식으로 정의한다. 의식은 전5식과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며 제6식으로 분류한다. 전5식에 의한 정보를 통합하는 과정도 제6식이 하는 것이다. 이 6식은 그 근원이 마나식이다. 자아의식이라고도 한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근원적인 식(판단 작용)이다. 그리고 이 식은 아뢰야식이라는 저장식에 근거한다. 인간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저장하는 곳이다. 번뇌의 요소와 깨달음의 요소가 현존하는 곳이다. 유식학파의 깨달음이란 어떻게 아뢰야식의 번뇌적 요소가 요동치지 않고 가라앉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수행을 통해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하느냐가 유식학파의 최대 관심이다. 다시 말해 유식학파의 아뢰야식은 깨달음의 기반이기도 하지만 번뇌를 통한 괴로움의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아뢰야식을 발견하고 지속적인 명상을 통해 고요를 유지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다. 그들에게 깨달은 자는 동요하지 않으며 동요하는 자는 깨닫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대 현장법사는 이런 인도 유식학의 해석 방법을 감각기관의 상하를 나누는 체계화(hierarchical)된 방법으로 해석했다. 전5식, 즉 안이비설신식은 의식보다 낮고 의식은 마나(자의식)식보다 낮고 자의식은 아뢰야(저장, 잠재의식) 보다 낮은 등급의 식으로 구분한다. 이것은 단순한 의식 작용의 분류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당황실의 권위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아뢰야식은 깨달음의 가능성이 제일 높은 황제이고 마나식, 의식 그리고 전5식은 관료와 백성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시의 사회구조와 계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 현장법사는 인도 유학 때부터 귀국 후, 역경 사업을 할 때까지 당태종과 고종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을 받는다. 따라서 현장의 체계화된 유식학 해석 방법은 이해되는 바가 있다. 우리 정치권에서 많이 쓰는 파사현정이라는 말이 현장의 유식학 해석 방법에서 오는 것이다. 현장이 만든 말이다. 아뢰야식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불교 수행을 해야 함을 천명하는 말이다. 그 외의 전5, 6식 그리고 마나식(자의식)을 삿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과연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에서 현장의 이러한 사유 방식이 정설일 수 있을까? 이런 현장의 체계화된 유식학 해석을 비판하는 것이 원효의 판비량론이다. 비량이라는 말은 논리(증)라는 말이며, 판이란 말은 비판한다는 말이다. 풀어쓰면 현장의 유식학에 대한 논리, 논증 방식을 비판한 논서를 뜻한다.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은 현장의 본질적 한계, 즉 여러 식작용에 대한 체계화와 등급화의 문제를 어떻게 평등화시키느냐의 문제다.
 
원효는 판비량론에서 안식에서 제8식 아뢰야식까지 도달하는 의식을 체계적으로 등급화한 것이 아니라 다시 아뢰야식이 안식으로 순환해 영향을 미치는 순환적인 해석학을 제시했다. 이것은 식 사이의 등급화가 아니라 평등화하는 당시의 혁명적인 발상이다. 최고 의식인 아뢰야식이 다시 최하위의 안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당시 중국에서는 불가능한 사유 방식이다. 이것은 현장법사의 권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최고 권위를 유지해야 하는 황제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는 그만큼 불교 사상을 통해 백성을 지배하려는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은 이렇게 종교의 세심한 부분까지도 통제하려 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도 형태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원효의 사상은 왕이 중심이 아니라 백성이 중심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말년에 무애가를 부르며 복성거사로 불리며,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포교한 것은 이러한 평등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원효는 불교를 어렵게 가르치지 않았다. 교학을 공부하고 특정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명상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누구나 아미타불만 부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정토종이다.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삶에 지친 민중을 바로 구제하는, 즉 바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가장 쉬운 방법을 내세웠다. 민중이 바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요석 공주와의 동침, 설총을 낳고 머리를 기르고 술을 마신 행위는 모두가 민중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방편이며, 절뿐만 아니라 세속에서도 바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우리 민족의 최초 통일 국가인 통일 신라의 사상적 기반이 원효라고 본다면, 백성을 중시하고 기본으로 한 민본사상이 토대가 된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불교를 지배자의 통치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만 사용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최초의 한민족 통일 국가의 사상적 새벽을 밝혔다는 것은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도 결국은 민본사상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원효는 진리를 무견무립한 것으로 정의했다. 더 이상 버릴 것도 없고 더 이상 더 채울 것도 없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진여 즉 참되고 한결같음을 진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마명보살의 진리관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마명보살은 진여를 진리로 인정했어도 이를 최고의 상태, 깨달음을 대표하는 말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심이라는 말을 최고의 깨달음으로 표시하고, 진여 대신 진여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쌍으로 생멸문을 상정했다.
 
이는 진리 또는 진여가 이미 언어화된 순간 더 이상 그것은 진여 자체는 아님을 간파한 것이다. 이는 현대 수학자 칸토어가 언급한 무한 개념에도 차이가 있음을 증명한 것과 상통한 것이다. 정수의 무한은 실수의 무한보다 작다는 증명입니다. 정수 중 짝수와 홀수의 무한은 1:1 대응이 가능하나 실수의 무한은 정수와 1:1 대응을 시켜도 대응된 정수보다 더 큰 실수가 언제나 하나 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수의 무한은 정수의 무한보다 크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이것이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과 집합론의 핵심입니다.
 
언어화된 무한 개념은 언어의 한계 때문에 개념상 차별 없음을 내포하더라도 결국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불교 역시 언어의 한계성을 간파한 데서 시작한다. 언어가 진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지혜가 싹트는 것이다. 이것을 반야라 한다. 반야심경의 반야는 바로 이 뜻이다. 언어의 구속에서 벗어나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림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의 개념, 즉 한계가 없으므로 양변을 나눌 수 없고 대상을 차별화할 수 없으며 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개념은 그것이 언어화되는 순간, 원개념의 내용과는 반대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명보살과 원효는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철저히 간파한 분들로 생각된다.
 
마명보살은 일심에는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음을 간파했으며, 두 문 사이의 긴장과 소통을 통한 일심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화했다. 진여문은 간단히 말하면 선한 생각과 행위를 생멸문은 선하지 못한 생각과 행위를 말합니다. 일심을 성취하는 것은 진여문이 생멸문보다 더 많아지는 상태를 지속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마명은 이런 과정을 진여문을 통해 생멸문을 훈습해 나간다고 한다. 좋은 생각과 행위가 좋지 않은 생각과 행위를 조금씩 천천히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의 주된 개념인 일심은 또한 언어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한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한 번도 불교 내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다. 그리고 개념상 진리를 뜻하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된 진리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승기신론은 대승은 진여를 뜻하고 진여는 일심을 뜻하고 일심은 적멸(열반)을 말하며 적멸이 곧 여래장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 평등을 상정한 무한의 세계이다. 이것을 인간과 사회에 옮기면 한없이 평화로운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여래장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이 여래장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말해둔다. 여래장은 무한한 공덕으로 가득한 마음이며, 한 치의 선하지 못한 생각이나 행위도 없는 상태다. 일부 사람들은 여래장을 아뢰야식과 혼동하여 진여의 씨앗인 동시에 번뇌의 씨앗이기도 하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경계한 말이다. 이러한 여래장의 잘못된 이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원효의 친절한 해석을 고려할 때, 대승기신론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최종 목적으로 하는지 명확해진다. 그것은 바로 한 치의 나쁜 생각, 번뇌도 없는 무한한 선한 공덕으로 이루어진 마음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신라 사회 내에 어떤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 없어야 함을 전제시킨 말이다. 또한 당시에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시기임을 고려하면, 원효에게 통일 신라는 여래장 세계여야 하며 완전히 평화로운 국가여야 함을 전제한 말이다. 일말의 폭력, 내분, 전쟁이 없는 통일 신라를 상정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사상은 당시 대부분의 백성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일심, 여래장 세계는 폭력이 없는 세계임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원효는 여래장 사상을 통해 통일 신라의 백성들에게 비폭력 평화 사상을 고취시켰다고 생각한다. 백제가 고구려가 망하고 676년 당나라를 몰아내고 신라가 망하는 935년까지 259년 동안 통일 국가로 존속했다는 사실은 중심사상이 분명히 존재했고 원효의 일심, 여래장 사상이 통일 신라의 백성에게 통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수행자의 입장에서 원효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쟁을 화합시켰을까? 그 방법은 그의 저서 십문화쟁론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계 내에 종파가 다양해 불교를 이해하는 방식이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은 결국 보다 큰 진리의 세계의 한 단면을 본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하나인 진리의 한 면만 보고 설파한 것이니, 모두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대립된 언어에서 탈피해 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논쟁을 파해 가는 방식을 택했다. 10가지 논쟁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원효가 논쟁을 화합해 가는 방식은 회통의 방식이다. 일방적 주장을 배제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이해하고(역지사지) 보다 높은 전체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하며 서로 회통케 하는 것이다.
 
십문화쟁론과 여래장 사상의 공통점은 보다 높은 차원을 생각케 한다는 것이다. 십문화쟁론이 역지사지를 강조해 자신의 주장이 전체의 한 단면임을 자각케 하고 여래장 사상이 일체의 번뇌가 없는 무한한 공덕의 세계,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상정한 것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동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현실의 경험 너머의 이상세계, 즉 절대 평화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적 세계는 역시 현실에서 경험될 세계이다.
 
우리는 여기서 현재 한국은 남북한의 입장 차이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 십문화쟁론이나 대승기신론의 여래장 사상처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결하도록 노력하는지 고찰해 봐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헌법 조항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현재 남한의 헌법은 영토조항이 있다.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실효성이 없는 문구이다. 오히려 남북한 분쟁의 잠재적 씨앗이 된다. 사실과 다른 이념적 조항이며 잠재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제헌헌법도 이 조항을 내포하고 있었고 이승만은 6·25 이전에 반복적으로 북침을 주장해 왔다. 충동적 주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불교는 12연기법을 통해 인간의 괴로움은 무명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무명은 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무명의 상태에는 세 가지 미세한 망념이 있다고 말한다. 무명업상, 능견상과 경계상이라고 한다. 모두가 잠재의식에 가까운 미세한 생각이다. 능견상은 주관, 즉 내가 독립적으로 있다는 생각, 경계상은 객관, 즉 너가 독립적으로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명업상은 나너의 구분도 일어나지 않은 생각이다. 여기서 상(생각)은 과거의 경험에서 축적된 생각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은 이 무명업상도 미세한 번뇌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무명업상에서는 충동적 힘과 잠재적 의욕이 싹이 트고, 어떤 합리적 사고 과정도 거치지 않고 행동하는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필자는 헌법 3조의 영토조항이 한국 국민에게 통일에 대한 충동적 발상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6.25 사변 이전 지속적으로 북침을 주장한 것은 헌법 3조 영토조항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남한의 군사력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은 충동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승기신론은 이 세 가지 망념에 이어 상속식과 분별사식, 집착을 통해 인간은 고통이 지속된다고 말한다. 상속식은 과거의 나쁜 생각이 연속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 분별사식은 그 일어난 생각을 더욱 분별해서 대상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것, 마지막으로 일어난 생각이나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괴로움을 반복시킨다는 것이다.
 
현재 남한에서 평화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일은 헌법 제3조 영토조항을 실효적 지배 지역으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헌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미세한 망념인 무명업상을 인식하고 현재 남북한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영토 문제에 대해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과거에 북한과 문제가 되었던 모든 사안을 이 시점에 소환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폭력적 대응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북한 평화 정착을 위해 남한 방식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 대해 역지사지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통일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원효가 언급한 여래장에 대한 이해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원효에게 여래장은 일심(한마음)이며 모든 번뇌가 사라진 적멸이며 무한한 공덕으로 충만한 세계이며 일체의 번뇌가 없는 평화의 상태다. 필자는 우리의 통일도 원효가 생각한 여래장 세계가 되어야 한다. 통일 이후도 한반도는, 어떤 소요나, 내란 또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원칙이 헌법 개정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되어야 한다. 평화통일뿐만 아니라, 헌법이 통일 이후도 분명히 평화로워야 함을 적시해야 한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며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건과 사실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평화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통일 후에도 평화로운 한반도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가진다면 한반도 통일 정책의 최선의 기반은 다져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북한이 남한과 소통하도록 우호적인 메시지와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남북의 평화통일과 한반도의 평화는 반드시 성취된다고 확신한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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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衆改革
6
원효의 일심과 여래장 사상을 오늘날 한반도 평화통일의 문제와 연결한 점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통일은 어느 한쪽의 이념과 체제를 다른 쪽에 강요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폭력과 적대감을 넘어서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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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
6
평화가 통일의 수단인 동시에 통일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헌법 개정은 안보와 통일의 헌법적 책무까지 함께 살피며 신중하게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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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_W
7
남북한의 갈등을 해결하려면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서로 다른 주장을 더 큰 차원에서 이해하고 회통하려 했듯이, 남북관계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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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르
5
이승우 변호사님, 원효대사의 일심과 여래장 사상을 한반도 평화통일이라는 오늘의 과제와 연결해 주신 통찰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통일 그 자체보다 통일 이후에도 전쟁과 폭력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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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5
헌법 제3조의 영토조항을 평화통일의 관점에서 재검토하자는 문제 제기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영토에 대한 선언적 권리와 현실의 평화적 공존 사이에 어떤 긴장이 있는지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헌법은 대립을 고착하는 문서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약속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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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준
5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분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전쟁이 없는 한반도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의 문을 다시 열 수 있도록, 지금부터 작은 신뢰를 쌓아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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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ie
4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분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전쟁이 없는 한반도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의 문을 다시 열 수 있도록, 지금부터 작은 신뢰를 쌓아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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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4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이 글의 평화와 화해의 정신에 깊이 공감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듯이, 남북한도 증오와 대결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통일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평화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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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_lee
3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더 큰 차원에서 화합을 모색하는 자세야말로 지금 남북관계에 꼭 필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있는 글을 통해 평화통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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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55
2
종교는 달라도 평화를 향한 가르침은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원효의 일심과 여래장 사상이 추구하는 화합의 정신은 기독교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섬김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기보다 이해하고, 과거의 원한보다 미래의 평화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남북한 모두가 실천해야 할 신앙인의 자세이자 한반도 평화통일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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