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누가 당신에게 해석 권력의 독점을 주었나. 아무도 없다. 당신은 그저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스스로 차지했다고 선언해 왔을 뿐이다. 민주·진보 진영의 공론장에서 당신은 언제나 ‘해설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고, 그 해설이 곧 진리인 양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 해설의 실체는 지식의 공유가 아니라 해석의 독점에 가까웠다. 당신 입에서 나온 비유와 진단이 선동 구호가 되고, 그 슬로건이 다시 진영 내부를 가르는 칼이 되는 구조. 그 구조를 당신은 수십 년 동안 반복해 왔다.
당신은 이른바 민주 진보 진영에서 자신의 논리를 펼쳐 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논리의 실제 효과는 언제나 선동과 진영 파괴에 더 가까웠다. 바깥의 적보다 안의 동료를 먼저 규정하고, 그 규정을 도덕적 우위로 포장하는 방식. 그 방식은 김대중 시절에도, 노무현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 이재명 정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신은 김대중의 당선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고 단정하고, 차라리 조순을 전면에 세워야 한다고 썼다. 1999년 동아일보 칼럼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가 바닥을 쳤고, 집권당은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2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을 경계하는 지식인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훗날 동교동에서 이희호 여사에게 그 비판을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사과는 당신이 이미 뿌려 놓은 해석의 잔해를 거두지 못했다. 진영 바깥의 독재와 수구를 향해야 할 날카로움이, 막상 같은 진영의 집권자에게는 더 쉽고 더 자주 휘둘러졌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 패턴은 이어졌다. 당신은 노무현의 대연정 구상을 옹호하며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 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충정의 언어처럼 들렸지만, 그 충정은 선택적이었다. 진영이 필요로 하는 단결의 순간보다, 당신이 해석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균열의 순간에 목소리는 더 커졌다. 노무현을 상징 자본으로 삼으면서도, 그 상징을 둘러싼 해석의 최종 권한은 늘 당신 곁에 두려고 했다. 심재철과의 1980년 진술서 공방에서도 드러나듯, 과거의 상처는 필요할 때 다시 소환되고, 그 소환의 해석권 역시 당신이 쥐려 했다.
그런데 정작 싸워야 할 상대 앞에서는 달랐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이어진 ‘검찰 사찰’ 공방에서 당신은 한동훈을 특정해 노무현재단 계좌를 들여다봤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알릴레오와 라디오를 통해 그 의혹은 대중의 확신이 되었다. 그러나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 2021년 1월, 당신은 재단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라며 검찰 관계자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입증하지 못한 의혹으로 사찰 의심을 불러일으킨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 사과 이후에도 한동훈 쪽은 ‘거짓 선동으로 이미 큰 피해를 봤다’라며 필요한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결국 명예훼손 유죄가 확정됐다. 벌금 500만 원. 진중권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사과하고 반성하라. 남에게 고통을 주고 앉아서 상대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하는 태도가 사람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고.
윤석열 정부 시절, 한동훈 앞에 꼬리를 내리던 그 모습이 창피하지 않은가. 자기 진영에게는 쓴소리와 비난을 퍼부으면서, 정작 보수와 검찰 권력이라는 상대 앞에서는 법적 압박이 닥친 뒤에야 한발 물러서는 모습.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계산이다. 해석 권력은 약자에게는 가혹하고, 강자에게는 갑자기 신중해진다. 그 비대칭이야말로 당신의 지식인 행세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 준다.
지금 이재명 정부에서도 같은 연극이 반복되고 있다. 2026년 6월, 당신은 대통령의 자신감이 지나쳤다고 했다. 핵심 지지층이 원한 것은 증축인데 대통령은 재건축하려 했다고 했다. 비평 공론장에 ‘상스러운 철거 전문’을 투입해 민주개혁 진영의 정상 세포를 공격했다고 했다. 면역세포가 외부의 균이 아니라 자기 세포를 공격하는 자가면역 질환에 여권이 걸렸다는 비유까지 동원했다. 친노·친문을 향한 멸칭과 공격을 에둘러 비판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 효과는 분명했다. 집권 1년 차 정부의 외연 확장을 배신으로, 새로운 해석자들을 용역으로 낙인찍는 것. 김민석 총리가 “과한 언어와 태도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세력 전체를 흔들 수 있다”라고 한 것은, 그 발언이 단순한 쓴소리가 아니라 진영 균열의 선전포고로 읽혔기 때문이다.
9월에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대통령의 검찰개혁 설명을 두고 “우리가 생각한 검찰개혁, 민주당의 입장, 공약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며 “지금까지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가 처음으로 유감을 표하고, 사실과 다른 왜곡이라며 법적 대응 여부까지 거론하게 만든 발언이다. 노무현재단을 떠난 뒤 더 자유로워진 비평이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늘 같은 방향을 향한다. 집권한 자기 진영의 약점을 가장 자극적인 문장으로 재단하고, 그 문장이 유튜브와 팬덤을 타고 확산되게 만드는 방향.
함돈균을 비롯한 일부 평론가들의 평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돈균은 당신의 ‘후단협’ 발언을 평론의 관점에서도 “비열했다”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했다. 공격 대상의 아킬레스건을 맥락 없이 끌어오는 행위, 논리의 겉모습은 매끈하지만, 어조와 무의식이 가치를 갉아먹는 비평. 그는 당신을 아주 비열한 형태의 비판을 하는 평론가로 규정했다. 지식의 유통망을 특정 채널에 독점시켜 대중의 정신세계를 그 안으로만 흐르게 한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해석 권력은 설득이 아니라 세뇌에 가깝게 작동한다. 우호 세력을 당신의 비유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비유를 거부하는 사람은 ‘철거 전문’, ‘촉법 평론가’, ‘자가면역의 원인’이 된다. 반대자는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병리적 존재가 된다. 그것이 당신이 진영 안에서 목소리를 키워 온 방식이다.
자칭 진보의 지식인. 글쎄, 정말 지식인이 당신을 본다면 뭐라고 평가할까. 지식인은 자신의 해석이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권력 앞에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민다. 당신은 그 반대다. 해석은 늘 당신의 것이고, 잣대는 상대에 따라 길이가 바뀐다. 진영 내부의 젊은 논객과 새로운 지지층에게는 천하고 상스럽다고 하고, 검찰 권력 앞에서는 뒤늦게 사과문을 올린다. 김대중에게는 인의 장막을 들이밀고, 이재명에게는 국민을 속였다고 한다. 그 모든 문장의 공통점은 하나다. 당신이 여전히 무대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것.
유시민 작가, 당신은 그저 정치를 하고 싶고,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목소리에 대중이 열광해 주기를 바라는 관종일 뿐이다. 책을 쓰는 작가와 재단을 이끌던 이사장과 유튜브의 해설자는 직업의 이름만 달랐을 뿐, 욕망의 핵은 같다. 해석의 독점자가 되어 시대의 해설을 독점하고, 그 해설에 환호가 쏟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진보의 언어를 입고 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지식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지식은 독점되는 순간 선동이 되고, 선동은 반복되는 순간 진영을 내부부터 허문다.
누가 당신에게 해석 권력의 독점을 주었나. 아무도 없다. 당신은 그것을 스스로 차지했고, 그 자리를 지키려고 같은 진영의 살을 베어 왔다. 창피한 것은 그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여전히 지식인의 책무라고 믿는 당신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