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얼마 앞둔 이 밤, 대통령이 고개를 숙인 사과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방송, 당내 발언 속에서 다시 조롱과 의심의 재료가 되는 풍경을 보면 가슴이 먼저 먹먹해진다. 국민 앞에 “부족했다”라고 말한 사람을 향해, 같은 진영이라 불리던 이들이 칼을 거두지 않는 이 장면은 정쟁이 아니다. 이 땅의 역사가 여러 차례 반복해 온 병증이다. 왜 진보는 진보를 공격하는가. 무능 때문만은 아니다. 더 아픈 진실은, 한때 개혁을 자처하던 세력의 일부가 이미 자리를 지키고 체면을 지키며 영향력을 재생산하는 보수력으로 굳어버렸다는 데 있다. 진보의 가면을 쓴 기득권은 정권 교체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자신의 발언권과 도덕적 독점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낮아질수록, 사과할수록 더 세게 밀어붙인다. 낮아진 상대는 공격하기 쉽고, 사과는 약함의 증거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습관은 어제 생긴 것이 아니다. 조선의 사림은 훈구파를 비판하며 등장했으나, 자리를 차지한 뒤에는 서로를 물어뜯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는 모두 ‘올바른 선비’가 ‘그릇된 선비’를 쳐내는 명분을 걸쳤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처음에는 학문과 의리의 다툼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정통인가를 가리는 생존 게임이 되었다. 선조 앞에서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고, 광해군 시기 북인이 남인을 베고, 숙종 대 환국이 반복될 때, 나라의 병력과 재정도, 민생도 그 싸움의 뒷전이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도 당파는 전란의 조짐을 함께 막기보다 상대 당의 허물을 먼저 찾았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에도 조정은 누가 옳았는지를 따졌다. 병자호란 앞에서도 척화와 주화의 명분은 자주 당파의 칼집이 되었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내부의 칼이 먼저 나라를 깎고, 외세는 그 틈으로 들어왔다.
같은 패턴은 망국의 문턱에서도 반복됐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개화파 안에서도 온건과 급진이 서로를 배신자로 불렀고,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 지식인들은 외세보다 가까운 동지를 먼저 의심했다. 대한제국이 숨이 꺼져가던 시절, 위정척사의 언어와 개화의 언어는 각각 자기 진영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나라를 살리는 일보다 ‘누가 더 애국적인가’를 겨루는 버릇이, 결국 국권을 지키는 힘을 소진시켰다.
해방 공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를 함께 미워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안에서 갈라섰다. 이승만과 김구, 좌와 우, 그리고 좌 안의 좌가 서로를 향해 기회주의자, 타협주의자, 밀정의 낙인을 찍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외세를 밀어내는 단합이 아니라, 누가 민족의 정통인지를 가리는 내부 재판이었다. 그 재판의 승자가 곧 민생의 승자가 되지는 않았다. 분단의 칼은 바깥에서만 온 것이 아니다. 안쪽에서 먼저 갈라진 자리가 그 칼을 받아 안았다.
현대 정당사도 이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4·19 이후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로 쪼개져 스스로 무너졌고, 군사정권은 그 분열을 호재로 삼았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군부 독재에 함께 맞서던 시기의 동지애도, 권력의 문턱에 이르자 갈라졌다. 1990년의 3당 합당은 보수 쪽의 이합집산으로 기억되지만, 민주 진영 역시 이후 수십 년 동안 ‘누가 더 순수한 민주파인가’를 놓고 서로를 배신자로 만들어 왔다. 노무현 탄핵 정국에서 열린우리당이 갈라져 나온 것은 개혁의 확장처럼 보였으나, 동시에 같은 뿌리를 둔 세력이 서로를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시작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말기에서 이재명 집권기로 이어지는 친문과 친명의 골은, 그 오래된 버릇의 최신 버전이다. 증축이 아니라 재건축이라는 비유, 핵심 지지층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이라는 진단은 새 언어처럼 들리지만, 내용은 조선 당쟁의 ‘사문난적’ 낙인과 닮았다. 너는 우리 편이 아니라는 선언이, 개혁의 이름을 빌릴 뿐이다.
9월 18일 기자회견은 그 점을 다시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을 “결국 제 부족 탓”이라 했고, “국민은 언제나 옳다”고 했으며, 연임 의사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특검의 공소 취소 조항을 삭제해 진상 규명에 집중해 달라는 말까지 했다. 정치적으로 계산된 수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형식은 국민 앞에 무릎을 꿇는 쪽이었다. 그런데 같은 날, 추미애 경기도지사는 “말 아닌 실제 개혁을 해내야 신뢰가 생긴다”라고 했다. 검찰개혁이 유약해져 지지율이 떨어졌다는 진단은 이미 며칠 전부터 반복됐다. 개혁을 더 밀어붙이라는 요구 자체는 진보의 언어다. 문제는 그 언어가 대통령의 사과와 겹치는 타이밍에, 사과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패처럼 쓰인다는 점이다. 집권 세력 내부에서 민심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칼을 꺼내는 사람이, 자신이 맡은 지방정부의 민생과 재정 논란 앞에서는 책임을 돌리는 모습은, 많은 지지자에게 원칙이 아니라 자기 정치로 읽힌다.
정청래와 김용민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의 행보 역시 같은 결이다. 검찰개혁의 속도, 경찰 견제, 인사 기준을 둘러싼 강경 발언은 지지층의 선명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선명성이 개혁을 밀어 올리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당·정·청의 호흡을 끊는 견제구가 될 때, 그것은 이미 개혁이 아니라 진영 내부의 서열 싸움이다. 유시민과 김어준의 언어는 더 오래, 더 깊게 스며든다. 지식인의 비평처럼 들리는 문장이 대통령의 사과를 비하하고, 일부 커뮤니티에서 조롱의 연료가 될 때, 지식은 이미 선동이 된다. 사과하는 권력을 조롱하는 습관은 약자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자신이 도덕의 상위에 서 있다는 착각이다. 사림이 사림을 칠 때도 늘 그 착각이 있었다. 나는 공이고 너는 사라는 확신이.
이 갈라치기가 나라를 개혁하고, 경제를 살리고, 선진국 지위를 지키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동산 민심은 여전히 날카롭고, 인사 참사는 연이어 터지며, 반도체와 에너지와 환율과 안보의 시계는 국내 진영 싸움과 무관하게 돌아간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누가 더 순수한 진보인가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다. 집값이 숨통을 트는지, 청년이 일자리를 갖는지, 권력이 특권을 내려놓는지, 나라가 외부 압력 앞에서 주권적으로 서는지를 묻는 것이다. 진영 내부의 칼질은 그 질문을 덮는다. 덮을수록 남은 보수 기득권과 일부 언론은 손쉽게 ‘역시 저들은 서로를 물어뜯는다’라는 프레임을 가져간다. 조선의 당쟁이 외척과 훈구 세력, 나중에는 외세에 어부지리를 준 것과 같다.
더 답답한 것은 그 내부 균열의 틈으로 오래된 외부 세력이 스며든다는 감각이다. 친일 잔재와 기득권 언론의 언어, 정교 유착 의혹으로 이미 사법의 심판대에 오른 신천지와 통일교 네트워크, 그리고 그 주변의 자금과 조직이 대통령 흔들기에 가세한다는 정황은 소문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정교 유착 수사에서 교단 수뇌부가 기소되고, 불법 정치자금과 신도 조직 동원 의혹이 드러난 바 있다. 문제는 그 수사마저 ‘누구의 편인가’로만 소비된다는 점이다. 진보가 서로를 물어뜯는 동안, 개혁의 대상이어야 할 기득권과 사이비 권력은 어부지리를 얻는다. 대통령 죽이기가 곧 기득권 지키기가 되는 역설이다. 망국 전야에 당파가 서로를 역적으로 부를 때, 실제로 나라를 잠식한 세력은 그 싸움 바깥에 있었던 것과 같다.
이 땅의 진보가 자신을 스스로 배신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개혁을 명분 삼아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사림이 사림을 친 습관, 임시정부가 서로를 의심한 습관, 야당이 야당을 쪼갠 습관, 친노와 친문과 친명이 서로를 낡은 것으로 규정한 습관은 이념이 아니다. 자리를 지키려는 관성이다. 진보가 보수화된다는 말은 이념이 오른쪽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다. 개혁의 언어를 집어삼킨 기득권의 본능이 남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 글의 끝은 저주가 아니라 소망이어야 한다. 조상들이 남긴 것은 당파의 승리 기록이 아니라, 나라가 끊기지 않기를 바란 마음이다. 당쟁의 기록은 두껍고, 그 때문에 무너진 나라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선 까닭은, 서로를 치는 버릇보다 나라를 잇는 마음이 겨우 남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과를 조롱하는 대신, 그 사과가 진짜 개혁으로 이어지는지를 감시하는 것이 시민의 일이다. 추미애든, 정청래든, 유시민이든, 당내 의원이든, 그들의 발언이 민생과 주권과 미래를 앞당기는지, 아니면 단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고함인지를 가리는 것이 진보의 자기 점검이다.
지금은 서로를 물어뜯을 때가 아니다. 숙인 고개를 일으켜, 그 손으로 기득권을 실제로 깨는지를 지켜볼 때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조상의 보살핌으로라도,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남아 있는 한, 갈라치기는 결국 민심 앞에서 초라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