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끝이 아니라 눈을 보다
993년(성종 12년) 10월,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거란군은 스스로 80만 대군이라고 위세를 떨쳤다. 고려 조정이 크게 흔들린 것은 당연했다.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다.
성종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서경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남는 것은 적의 군량이 되지 않도록 대동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서경 이북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생각한 것이다. 이때 중군사(中軍使) 서희가 나섰다. 그는 식량이 충분한데 싸워 보지도 않고 어찌 땅부터 떼어주려 하느냐며 할지론에 반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소손녕을 만나겠다고 자청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다. 고려는 땅을 빼앗기지 않았다.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영토를 내주자는 논의에서 시작했는데, 담판이 끝나고 보니 영토가 늘어난 것이다. 우리 외교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러나 나는 서희의 승리를 단순히 뛰어난 언변의 결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조정의 신료들이 눈앞에 닥친 거란군의 칼을 보고 있을 때 서희는 다른 것을 보았다. 그는 거란이 왜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왔는지, 그리고 거란의 시선이 실제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외교에서 상대가 입으로 무엇을 요구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왜 그것을 요구하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서희가 보았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거란의 진짜 상대는 누구였는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10세기 동아시아의 지도를 조금 넓게 펼쳐 볼 필요가 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세운 거란은 빠르게 성장했다. 926년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지역에 세력을 넓혔고, 936년에는 후진으로부터 연운 16주를 넘겨받아 만리장성 이남까지 진출했다. 반면 960년에 건국된 송은 979년 중국을 거의 통일했지만 거란과의 싸움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같은 해 고량하 전투에서 패했고, 986년의 북벌도 실패했다. 거란의 성종과 섭정 승천 황후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적 상대는 결국 송이었다. 그렇다면 고려는 거란의 입장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다. 942년 거란이 화친의 뜻으로 낙타 50필을 보내오자 고려가 이를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이고 사신들을 유배시킨 일은 두 나라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고려는 송과 가까웠다. 광종은 962년 송에 사신을 보냈고 이듬해 송의 책봉을 받았다. 송의 연호도 사용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오늘날의 군사동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고려와 송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상호방위조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봉과 조공이라는 형식 아래 서적과 불경이 오가고 유학생과 승려가 왕래했으며 교역도 이루어졌다. 양국 모두 상대와의 관계에서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유지된 관계였다.
광종에게 중원 왕조의 책봉은 국내 정치에도 의미가 있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통해 호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던 그에게 송의 책봉은 자신의 개혁과 왕권에 대외적 권위를 더해 줄 수 있었다. 송의 입장에서도 거란의 동쪽에 위치한 고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충분했다. 문제는 이 관계를 거란이 어떻게 보았느냐는 것이다. 985년 송 태종은 감찰어사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거란 공격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 해 추진할 북벌을 앞둔 시점이었다. 성종은 출병을 약속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고려 입장에서는 신중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거란의 입장에서는 달리 보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송과 전면전을 벌이면 고려가 동쪽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실제 외교문서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안국과 여진의 존재도 있었다.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유역에 세운 정안국은 여진 사신을 통해 송에 표문을 보내 거란 협공을 제안했고 송 태종도 이에 호응했다. 거란에서 보면 송·고려·정안국·여진이 연결될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기 전에 주변부터 정리했다. 980년대 중반 정안국 방면을 공격했고, 991년에는 압록강 일대의 여진을 정벌하여 거점을 확보했다. 그리고 993년 소손녕의 군대가 고려로 들어왔다. 이렇게 놓고 보면 거란의 고려 침공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거란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고려의 몇 고을이 아니었다. 송과 싸울 때 자신의 등 뒤에서 고려가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소손녕이 담판에서 “국경을 맞댄 우리를 두고 바다 건너 송을 섬긴다.”라고 따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서희는 전쟁의 목적을 읽었다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거란군은 봉산군에서 고려 선봉을 격파한 뒤 계속 밀고 내려오지 않았다. 안융진을 공격하다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 패한 뒤에는 적극적인 전투보다 고려 조정에 항복 사절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서희는 이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고려를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진격을 멈추고 담판을 재촉할 이유가 없었다. 군사적 압박을 통해 고려의 외교 노선을 바꾸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담판에서 소손녕은 두 가지 논리를 내세웠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고구려의 옛 영토는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침범했다는 것이 첫째였다. 둘째는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왜 바다 건너 송을 섬기느냐는 것이었다. 서희는 첫 번째 주장부터 뒤집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국호도 고려이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반박했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기준으로 한다면 오히려 거란의 동경 지역까지 고려의 영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것은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다. 소손녕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역사 논리를 그 논리 자체로 되받아친 것이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대응은 더욱 흥미롭다.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거란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중간에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여진을 몰아내고 고려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을 쌓고 길을 열 수 있게 해주면 거란과 교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협상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 처음에는 거란이 고려에 무엇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서희의 논리를 거치면서 이제 거란이 고려에 무엇인가를 내주어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거란은 고려가 송에서 멀어지기를 원했다. 고려는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히고 싶었다. 서희는 이 두 이해관계를 맞바꾸었다.
그 결과 고려는 994년부터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흥화진·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이른바 강동 6주를 확보했다. 고려가 받아들인 것은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거란과 조빙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송과의 공식 외교 관계도 결국 정리했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의 모든 접촉을 즉시 끊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서희 외교의 중요한 특징을 본다. 고구려 계승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적 명분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반면 어느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어느 나라와 조빙관계를 맺느냐 하는 외교적 형식에서는 타협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확보했다.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거래할 수 있는지를 구분했던 것이다.
동맹도 결국 국익 앞에서 움직인다
담판 이후의 일도 흥미롭다. 994년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도 송에 밀사를 보내 거란을 함께 공격하자고 요청했다. 그런데 송이 이를 거절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고려에 거란 공격을 요청했던 송이 이번에는 고려의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985년에는 송이 고려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했고 고려가 실제 출병을 피했다. 994년에는 반대로 고려가 송에 군사적 협력을 요청했지만, 송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이 장면이 국제정치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의 우호와 동맹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국가라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한다. 이것은 동맹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동맹을 오래 유지하려면 상대방의 국익이 무엇인지도 냉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가 우리의 필요 때문에 움직여 줄 것이라고 믿는 것과 상대가 자신의 필요 때문에 우리와 함께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외교다.
강동 6주의 가치는 오래지 않아 증명되었다. 거란은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반환을 요구했고, 1010년과 1018년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압록강 동쪽에 구축된 고려의 방어선은 이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19년 강감찬이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귀주대첩의 귀주도 강동 6주 가운데 하나였다. 993년의 외교적 선택이 훗날 고려가 전쟁을 버텨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 셈이다. 서희의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그래서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한 세대 전 외교가 확보한 공간에서 다음 세대의 군사적 승리가 이루어졌다.
천 년 전의 담판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것
내가 서희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천 년 전의 외교적 성공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의 한반도 역시 강대국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깊어지면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문제도 많아지고 있다. 안보와 경제, 첨단기술과 공급망이 서로 얽혀 있어 과거처럼 외교와 경제를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어려워졌다. 물론 10세기의 거란과 송을 오늘의 미국과 중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려와 대한민국의 국력도 다르고 국제질서도 다르며, 오늘날의 한미동맹은 당시 고려와 송의 책봉·조공 관계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서희의 판단에서 배울 것은 있다.
강대국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왜 그것을 요구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거란은 고려에 송과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동쪽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더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서희는 바로 그 필요를 발견했고, 그것을 고려가 원하는 것을 얻는 협상 카드로 바꾸었다.
오늘의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중국은 무엇을 우려하는가. 일본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북한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그 이해관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대한민국이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식의 막연한 균형론이 아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다만 선택하기 전에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해야 한다. 동맹국의 전략과 대한민국의 국익이 언제나 완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강대국 사이에서 무조건 거리를 두는 것이 자주외교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서희가 보여준 외교는 그런 단순한 외교가 아니었다. 그는 거란을 좋아해서 타협한 것도 아니고 송을 싫어해서 관계를 바꾼 것도 아니었다. 고려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기준으로 상대의 필요를 읽고, 그 필요를 이용하여 고려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의 담판 뒤에는 군사력이 있었다. 안융진에서 고려군이 거란군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서희의 말도 같은 무게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교적 자율성은 좋은 말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 정확한 정보,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서희는 972년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국제정세를 직접 보고 경험한 외교관이었다. 그래서 눈앞의 80만이라는 숫자에만 압도되지 않고 그 군대가 왜 왔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서희 담판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외교에서 두려운 것은 강대국의 힘만이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은 그 힘에 압도되어 상대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혀 버리는 것이다. 993년 고려 조정에는 항복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땅을 내주자는 사람도 있었다. 서희는 그 둘 가운데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길이 있는지를 먼저 찾았다. 천 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은 달라졌다. 국제질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 그러나 외교가 결국 상대의 이해관계를 읽고 그 속에서 자신의 국익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사실까지 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서희는 거란의 칼을 보면서도 그 칼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 칼을 든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았다. 오늘 우리 외교에도 그런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