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 이후, 조선은 자발적으로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간주하고 조공을 진상해 왔다. 스스로를 신하의 나라라 자처하고 고려 시대 왕이 사용했던 황제의 명칭을 버리고 “전하”라는 말로 조선 왕의 위상을 스스로 낮추었다. 매년 평균 6번의 사신을 보내어 명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조공물로는 특산물인 모시, 인삼, 종이, 모피, 군마, 금, 은 등이 있었고 공녀와 환관(宦官)도 포함되었다. 명은 전쟁을 통한 항복 문서도 없이 자발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조선을 신하국의 전형으로 여겼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게 조공을 요구할 때, 좋은 선례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조공은 황제를 사신들이 직접 알현하고 진상의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상되었다. 이 진상의식은 방물 진헌(進獻) 의례 또는 진헌으로 불렸다. 또한 황제의 덕을 찬양하는 시를 반드시 함께 진상했다. 일종의 충성 서약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진헌시(進獻詩) 또는 정명시라 불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외교관으로 이름을 날린 권근은 이런 진헌시의 대가였으며 명황제, 주원장에게 칭송(稱頌)을 받은 바 있다. 조공은 실제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전리품적 성격의 선물을 바치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이를 예로 승화하며 관습화했다. 비굴한 행위를 오히려 예로 승화하는 역설적인 외교이다. 그 속에서 조선은 당당히 소중화의 자긍심을 키워왔던 것이다.
조선이 이렇게 자발적인 조공외교를 실행한 데는 송대의 유학자 주자를 숭상하고 그의 학문체계인 성리학을 국교로 받드는 조선의 정책에 바탕했다고 본다. 주자가례는 국가경영의 근간이었다. 이러한 조선이 예를 기반해 특정 사안의 선후와 인간관계의 상하를 나누고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중국이라는 상국과 그에 종속된 하국을 나누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하국이 상국에게 진상품, 즉 조공을 바치는 것도 예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조공외교는 단순히 성리학적 전통을 고수하는 것 외에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외교정책적인 면이 있다. 오히려 명의 강력한 국력을 감지하고 불필요한 저항을 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의 생명과 조선의 산하를 사전에 보호하는 기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조선이 자주국임을 내세워 중국에 저항했다면, 조선의 산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명나라가 전쟁을 통해 재정을 충당하려 했을 때, 조선의 조공외교가 침략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은 원병을 보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였다. 물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명분이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지만, 예의 바른 신하국 조선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 또한 그만큼 신속한 파병을 가능케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상황은 달랐다. 명은 조선에 대한 과도한 군사 지원으로 재정이 고갈되고 황제의 태만과 환관들의 부패 그리고 잦은 민란으로 하락기를 맞이한 때이다. 한편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한 족장이었던 누루하치가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외교를 통해 몽골 세력을 포섭했다. 인삼 무역을 국가가 관장해 국가 재정을 탄탄히 하고 팔기군(八旗軍)을 바탕으로 한 팔기제(八旗制)를 도입해, 상시 전시 체제를 확립하고 언제나 군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누루하치의 이러한 부국 정책은 30여 년 이어졌다. 이 무렵 명은 재정파탄과 환관의 전횡으로 만주 지역을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것이 명과 후금의 1619년 사르후 전투이다. 사르후는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동쪽 교외 지역이다.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이때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의 당시 왕인 광해군은 명이 쇠하고 후금이 부상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명이 요구한 조선의 병력 수는 13,000명이다. 실리를 추구하는 광해군 입장에서 백성을 사지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주축을 이루던 다수 사대부의 생각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에 성리학적 의리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를 구해 준 은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는가라는 명분이었다. 광해군은 이러한 명분에 밀려 군사를 보냈지만 도원수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린다. 적당히 싸우다 후금에 투항하라 한 것이다. 조선이 명과 후금의 전투에 휘말리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였다. 원군을 보냄으로써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싸우고 항복함으로써 후금에게 조선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이것이 광해군의 실리적 중립외교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재조지은을 내세운 서인 세력이 주도한 인조 반정에 의해 결국 축출된다. 실리외교를 내세운 광해군도 명의 힘을 뒤에 업은 서인 기득권 세력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인조 반정 세력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외교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후금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잡는다. 중원 공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강력해진 후금은 친명배금의 조선을 위협의 대상으로 여기고 1627년 조선을 침범한다.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명을 공략할 때, 후방을 먼저 항복시켜 협공의 가능성을 배제시키는 전략이다. 지금도 협공의 위험을 배제시키는 전략은 군사학의 기본이다.
이때 침범한 후금의 병력 수는 겨우 3만 명이다. 왕은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로 피난 가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진다. 3만 명의 후금 군대도 막아낼 수 없을 만큼 조선의 군사력은 빈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맺고 동시에 명과의 군신관계를 인정받고 후금과 무역을 개시함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된다. 중원 공략을 꿈꾸던 후금이 조선에 너무 많은 국력을 소모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626년 후금을 세운 누루하치가 죽고 8번째 아들 홍타이치가 칸으로 등극하고 국호를 청으로 바꾼 시기였다. 이후 몽골을 완전히 평정하고 칸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었다. 조선도 축하사절단을 보냈다. 다른 나라 사신 모두는 청태종(淸太宗)에게 절을 하며 예를 다했으나 조선 사신 두 사람, 나덕헌과 이확만이 명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이유로 청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청태종은 이 둘에게 장형을 내리고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국서를 보내 조선의 왕자 둘을 볼모로 보낼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 두 신하는 인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인조에게 아무런 답변이 없자 화가 난 청태종은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 이것이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와 아홉 번 고두례(叩頭禮)의 치욕을 겪고 항복 선언을 한다.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屈辱)이다. 이를 통해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 이제 조선을 항복시킨 홍타이치의 다음 목표는 명나라 정복이었다. 그러나 청의 명 정복은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부 민란이 주원인이었다. 명말의 이자성의 농민 반란이 명 황실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명의 장군 오삼계가 청에 투항하며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을 열어주며 청군을 북경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청은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임란 이후의 상황과 유사하다. 명의 군사적 도움을 받은 조선, 그리고 집권 세력의 명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키자는 명분 외교가 주축이 된 시대에, 부상하는 후금을 인정하고 실리외교를 주창한 광해군의 고민이 함께 연상되는 시기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 참전과 경제적 지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은 임란 이후의 명나라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남한과 경제적 교류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미국에 대항하며 일대일로, BRICS, 상하이 경제 협력기구 등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중국이 후금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실상은 광해군 시대만큼 국제 정세가 명백하지는 않다. 사르후 전투를 거치면서 명의 패권 상실이 명확한 상황이 광해군 재위 시기였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버리고 실리외교를 추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서인 세력의 재조지은의 명분에 밀려 명백한 반청(反淸) 정책을 펼친 것이 병자호란의 주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동북아 패권의 교체기에 정세를 읽지 못한 조선 조정의 무지함이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가져온 것이다. 적어도 반청을 내세우지 않았어도 병자호란은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권국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역 정치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명이 민란에 의해 망하듯이 현재 과도한 물가, 국가 빚 그리고 이란 전쟁의 사실상 패배 등이 미국 패권의 약화로 보이나 이것이 미국 패권의 종말인지는 불명확하다. 명처럼 내부의 민란이나 연방제의 와해 등 실질적 분열을 가져올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반이민, 관세 정책 등의 트럼피즘은 반헌법적이며 극우적 성향을 명백히 보이지만 미국의 사법부는 헌법 수호의 측면에서 합리적 판단을 지속적으로 내려주고 있다. 아무도 한국처럼 사법부를 공격하는 일은 없다. 사법부가 건재(健在)한 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견고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이 한국이 새로운 패권 경쟁국인 중국이나 기존의 패권국인 미국에 일방적으로 기울 수 없는 이유이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의 1, 2위를 다투는 무역 대상국이다. 섣부른 일방적 친미·친중 외교가 우리에게 큰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제적 관계가 약화되면 안보(安保) 측면에서도 취약해진다.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킬 강력한 레버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왜 조선이 후금과 청에게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을 당했느냐이다. 그것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이다. 명을 정복하려는 후금을 상대로 친명배금 정책을 주창했으니, 자신들의 후방인 조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떤 회유책도 소용이 없자 전쟁을 일으켜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이 시점에 반청 정책은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에 따라 외교정책을 운영한 집권층의 외교적 소양의 부재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이 승리를 목도했음에도 말이다. 명분이 국제정치의 실체와 부합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 명분은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말은 이런 점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바른 외교정책은 국가간 국력의 정확한 분석에서 나오지 국가간의 도덕 명분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시대 한국이 적어도 조선 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상황을 어떻게 예방하느냐에 있다.
미국은 6.25 전쟁에 참전해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주고 그 후, 한미 군사동맹을 맺고 여전히 한반도 안보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기술, 학문, 문화 등 전반적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친미정책이 도덕적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리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선택이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패권 경쟁국인 중국을 배척할 필요도 없다. 다행히 이 점은 역대 정부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잘 이해하고 있어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한의 군사 외교정책이 중국이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언제나 후방을 경계한다. 한국은 바로 중국의 후방 중 하나이다. 특히 평택에 가장 큰 규모의 주한 미군 기지가 있다는 사실은 중국이 한국을 잠재적 안보 위협국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한미동맹의 목적이 북한 방어뿐만 아니라 대중국 방어로 재규정된다면 중국의 한국에 대한 관점은 적대국(敵對國)화 될 것이다. 한국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북한 방위라는 한미 동맹의 목적을 고수해야 한다. 만약, 중국이 공식적으로 한국을 적대국으로 분류한다면 현재 한국의 국방 예산 65조로는 대중국 견제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만큼 경제적 고통 분담은 국민의 몫인 것이다. 한국의 지금과 같은 경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만큼 첨단기술(尖端技術)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근 시진핑이 다수의 안보전문가를 데리고 북한을 방문했다. 7년 만의 방문이다. 상당한 안보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관계를 파고들어, 중국 쪽으로 좀 더 기울도록 한 것이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청대부터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했다. 이를 해결한 조약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 최초의 조약이다. 이후 1969년에는 중국과 소련이 우수리강의 한 섬의 영유권을 두고 군사분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렇게 러시아는 중국의 북방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구조적으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북한이 이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군사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안보적 위협이다. 북한이 어떻게 대응할지 쉽게 예측이 된다. 중국과 러시아와 모두 사이좋게 지내며 외교적 균형을 맞추며 자신의 경제적 실리를 얻는 쪽으로 선회할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경제 각료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하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중국은 러시아 견제라는 안보적 이익을 위한 북중 회담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현재 미국은 한미동맹을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사용함으로써, 대만유사시 한미 연합군을 사용하겠다는 포석을 깔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미군의 이러한 전략적 유연성을 반대해야 한다. 중국의 안보를 위협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현재 한국과 군장비 스왑(Swap)을 추진하고 있다. 현 이재명 정부가 다행히 거절했다. 만약 이것이 성사되면 한일군사 동맹으로 가는 전조가 된다.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말해오는 것은 한미동맹은 인정하되, 한일 군사동맹은 중국에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일관된 반대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지난 70여 년간 그랬듯이 한미 동맹만으로 한국의 안보는 충분하다.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대만에 대한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이다. 매우 민족주의적이고 당위론적인 발상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이 대만을 침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때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대만 방어는 미중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핵심 이익일 뿐만 아니라 대만해협이 전세계 물동량의 약40%가 통과하는 무역로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대만 유사시, 한국이 대만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지속적으로 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의 대만에서 전면전 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런 형국은 막자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만약에, 중국이 평택 미군 기지를 공격하더라도 다른 곳을 공격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아주 어려운 상황이 되겠지만, 한국이 군사 개입을 하지 않고 미중의 대만 전쟁에서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가능성은 정부가 충분히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은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재고해야 하는 시점이다. 광해군이 명과 청의 패권 교체 상황을 직시하고 일방적인 친명정책을 버리고 후금의 안보적 입장을 고려한 실용외교 정책을 펼쳤듯이, 한국도 중국과 미국의 패권 경쟁 상황을 직시하고 일방적 친미정책을 지양하고 실리적 측면에서 외교사안을 처리해나갔으면 한다. 일방적 친미 정책은 현 국제정치 현실에 맞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에서 가지는 외교적 기득권은 우리의 국익과 크게 배치되지 않는 한, 허용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다행히 현 한미동맹을 비적대적인 것으로 중국도 인정했으니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는 것은 한반도의 세력균형과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반대하는 한일동맹이나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그만큼 중국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우리 안보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공식적인 적대국으로 돌리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 그중에 안보 정책의 실패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전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모두가 한국의 실리를 해치는 일이다. 한국 정부도 중국이 공식적 적대국으로 한국을 규정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명백히 인식해 주기를 바란다. 광해군이 실리외교로 후금과의 전쟁을 피한 지혜를 재고해 보기를 바란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의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