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에서 질문이 사라졌다. 초등 교실에서도, 중고교 야간 자율학습실에서도, 대학 세미나실에서도 같은 침묵이 반복된다. 모르는 것을 문장으로 다듬어 묻고, 틀린 답을 내놓고, 다시 묻는 그 서툰 과정이 학습의 핵심인데, 그 과정이 화면 뒤의 생성형 AI로 이전되고 있다. 숙제도 리포트도 AI가 쓰는 시대에, 이 현상이 청소년과 학생의 문해력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은 이미 답이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이유를 정확히 짚고, 학습이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경고는 공허해진다.
문제는 AI 한 가지가 아니다. 숏폼과 쇼츠가 먼저 주의의 근육을 약하게 만들어 놓고, AI가 그 빈자리에 답을 채워 넣는 이중 구조다. OECD가 2026년 9월 발표한 PISA 2025에서 한국 15세의 읽기 점수는 501점으로, 2022년 515점에서 14점 하락했다. 2006년 556점으로 정점을 찍은 뒤 이어진 장기 하락의 연장선이다. 상위 수준 학생 비율은 줄고, 기초 수준 미달 비율은 14.7%에서 17.8%로 늘었다. 수학·과학의 하락 폭보다 읽기의 하락이 뚜렷하다. 교육부가 디지털 매체와 SNS 이용 증가, 독서 동기 약화를 복합 원인으로 본 것은 타당하다.
숏폼은 ‘짧은 쾌락’을 반복 공급한다. 스토리의 호흡, 논증의 굴곡, 문장의 여백이 없다. 하이라이트만 남긴다. 전두엽은 20대 중반까지 성숙하는데, 사춘기 이전부터 강한 자극에 길들면 긴 글을 견디는 힘이 약해진다. 쓰지 않는 뇌세포는 퇴화한다. 집중 시간의 단축은 문해력의 토대인 ‘지속적 주의’를 갉아먹는다. 여기에 AI가 겹친다. 모르는 문장을 붙잡고 씨름하는 대신, 프롬프트 한 줄로 완성된 글을 받는다. 겉보기 과제는 좋아지고, 머릿속 구조는 비워진다. 미국 대학가에서 반복되는 말, ‘학습의 착각(illusion of learning)’이 한국 교실에도 그대로 들어온다. AI를 켠 채 쓴 글은 매끄럽지만, AI를 끈 채 그 글을 설명하라고 하면 말이 끊긴다.
문해력은 글자를 읽는 기술이 아니다. 문장을 따라가며 전제를 찾고, 생략된 논리를 복원하고, 저자의 의도와 자신의 판단을 겹쳐 보는 힘이다. AI 시대에 이 힘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보는 넘치고, 틀린 정보와 그럴듯한 정보는 구분하기 어렵고, 최종 판단의 책임은 사람에게 남기 때문이다. AI가 초안을 써 주더라도, 그 초안이 비어 있는지, 편향되어 있는지, 핵심을 비껴갔는지를 알아채는 눈은 긴 글을 읽고 스스로 써 본 사람만이 갖는다. 자신의 힘과 도구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증강이 아니라 종속이 일어난다. ‘인지 외주’를 넘어 ‘인지 항복’에 이르면, 학생은 ‘나는 아무것도 못 해요’라고 선언한 채 도구에 기대게 된다.
‘젠지스테어’는 그 항복의 사회적 얼굴이다. 인사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은, 생각의 외주를 넘어 관계의 외주까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AI는 언제나 편을 들어 준다. 현실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네가 틀렸다”라고 말하는 사람과의 마찰 속에서만 자기 생각이 단련된다. AI와의 일방적 다정함에 익숙해진 뇌는, 갈등과 침묵과 오해가 있는 인간관계를 견디기 어려워진다. 문해력은 텍스트만의 능력이 아니라, 타인의 말과 세계를 해석하는 사회적 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학습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원칙은 하나다. AI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쓰기 전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어느 교수가 제안한 ‘15분 먼저 생각하기’는 사소한 습관처럼 보이지만, 인지의 주체를 되찾는 최소 단위다. 그 15분 동안 학생이 해야 할 일은 거창하지 않다. 문제를 자기 말로 다시 쓰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고, 가설 하나를 세워 보는 것이다. 그다음에야 AI를 호출한다. 호출한 뒤에도 할 일이 남는다. AI의 문장을 해체하고, 빠진 반례를 찾고, 자기 경험과 맞지 않는 문장을 고치는 일이다. 답을 맞히는 교육에서, 답에 다가가는 과정을 드러내는 교육으로 평가의 축을 옮겨야 한다. 완성된 리포트보다, 초고와 질문 목록과, 틀린 추론의 흔적이 더 귀한 학습 증거가 되어야 한다.
초등 단계의 핵심은 아날로그 지구력이다. 손 글씨로 문장을 쓰고, 소리 내어 읽고,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 불편을 의도적으로 남긴다. 숏폼 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전두엽을 위한 환경 설계다. 이 시기에 AI로 숙제를 대신하게 하면, 문장을 조립하는 근육이 자라기 전에 완성품만 보게 된다. 중고교에서는 ‘질문하는 훈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실에서 손을 들지 못하는 이유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틀린 질문이 허용되는 시간과 공간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조별 과제를 AI가 대본까지 써 주는 관행을 끊고, 학생이 자기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면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더 분명하다. 구두 설명, 화이트보드 위 즉흥 논증, 동료 상호 비판처럼 AI가 대신하기 어려운 장면을 평가에 넣어야 한다. 매끄러운 문장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말 더듬으며 자기 생각을 지키는 능력이 희소해진다.
도제식 교육의 부활은 향수가 아니다. 외부 도움 없이 머리를 쥐어짜는 시간과,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우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판단력이 생긴다. 학교와 직장이 AI를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장 성과를 내기 위해 사고를 생략하는 환경은, 단기 효율을 얻고 장기 역량을 잃는다. 앞으로 인정받을 조직은 직원의 산출물을 빨리 뽑아내는 곳이 아니라, 직원이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경험을 축적하게 하는 곳이다. 학생에게도 같다. 숙제의 완성도가 아니라, 숙제를 하는 동안 학생이 어떤 판단을 했는지를 보는 학교가 살아남는다.
부모와 교사에게 필요한 태도도 분명하다. AI를 악마화하거나 낭만화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AI를 잘 쓴다’라는 말이, ‘우리 아이는 질문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일 수 있다. 반대로 AI를 전혀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균형이 아니다. 문외한과 의존자 모두, 신 교수의 진단처럼 균형이 무너진 상태다. 가정에서는 함께 긴 글을 읽고 서로의 해석이 다른 지점을 말하는 시간이 숏폼 한 시간보다 값지다. 학교에서는 AI 사용을 전제로 한 과제와, AI를 끈 채 수행하는 과제를 의도적으로 섞어야 한다. 도구를 다루는 리터러시와, 도구 없이 생각하는 리터러시는 같은 능력이 아니다.
데이비드 데밍이 말한 ‘똑똑한 외톨이’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AI가 개인 생산성을 올려 줄수록,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설득하고 협력하는 능력의 희소가치는 올라간다. 문해력은 그 협력의 언어다. 글을 읽지 못하면 타인의 세계를 읽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면 자기 세계를 내놓지 못한다. 편리함을 위해 모든 것을 외주하면 삶의 본질을 잃을 수 있다는 한 교수의 경고는, 낭만이 아니라 인지과학의 상식에 가깝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틀리면서 해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경험 자체가 삶이다.
AI 시대의 학습은 더 느려져야 한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속도가 도구의 몫이 된 시대에 인간의 몫은 속도가 아니다. 멈추고, 다시 읽고, 자기 문장으로 바꿔 쓰고, 다른 사람의 반박을 견디는 일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숙제의 겉모습은 AI에 의해 매끈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매끈함 아래 질문이 사라지면, 문해력은 점수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먼저 무너진다.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다. 생각의 주체를 되찾는 습관을 심느냐, 편리함에 항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습관은 거창한 교육 개혁보다, 오늘 숙제를 열기 전 15분의 침묵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