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식 언론이 대통령의 ‘9월 한 달 116건’이라는 SNS 소통 숫자를 붙들고 ‘과잉 소통, 만기친람, 지지층 의식’, ‘여당 일각의 우려’라는 프레임을 씌워 보도해 사실을 넘어 해석의 논란 세계로 들어서게 했다. 문재인처럼 소통하지 않고 꿍꿍이 정책을 펼 때는 아무 말도 없더니, 소통하면 한다고, 안 하면 안 한다고 타박할 것이 뻔한 일이니, 하는 게 맞다. 대통령의 성향상,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민정수석실에 묻지 않고 직접 확인하는 대통령을 둔 것은 국민의 입장에서 아주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시사팩트 플러스]를 비롯한 레거시 매체가 반복하는 이 불만 서사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대통령이 국민과 직접 말을 나누는 행위 자체를 불편해하는 태도이자, 동시에 당내 강경파의 방해와 언론의 집요한 대통령 죽이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국면에서 대통령이 선택한 소통 방식에 대한 의도적 축소와 여론전 협업이다.
그 축소의 이면에는 오랫동안 국민을 정보의 수동적 소비자로 길들여 온 구조의 관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이재명이라는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유권자와 대통령과의 거리를 ‘품격’이라는 이름으로 거리와 침묵, 그리고 자신들이 중재하며 자신들의 생계가 유지되는 공간을 남겨두기를 원한다. 말로만 품격 운운하는 그들이 오히려 저품격 여론 환경의 주범이다. 김어준과 유시민, 주진우가 생존해온 지난 수십 년 탓에, 국민이 얼마나 후져진 정치의식을 가졌는지 우리 스스로 돌아보면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9월 30일 자신의 글에서 “SNS는 저와 국민과의 직접 소통 통로”라고 분명히 밝혔다. ‘모든 언론 기득권자들이 나서 저를 고립시키고 사실을 왜곡하고 허위 사실로 음해하며 공격할 때 저와 국민을 연결해 진실을 알리고 저를 지금의 자리까지 이끌어 준 것도 SNS’라는 대목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생존 경험과 맞닿아 있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반복된 선택적 보도와 왜곡 속에서 직접 소통이 유일한 통로였던 경험이, 지지율 하락과 내부 갈등이 겹치는 현재의 국면에서도 동일한 선택을 강제하고 있다. 116건이라는 숫자는 그 연장선에 있다. 검찰개혁의 취지, 부동산 정상화의 방향, 정책 성과의 구체적 내용, 때로는 내부 논쟁에 대한 입장 표명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중간에서 잘라내고 재해석한 뒤 내놓는 요약과 다르다. 원문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리스크가 있지만,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국민에게 직접 보여주는 선택은 주권자 대리인으로서의 기본 태도다.
그러나 이 선택 앞에는 두 개의 장벽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레거시 언론의 집요한 프레임이다. 그들은 대통령의 직접 소통을 ‘SNS 중독’이나 ‘맞짱 정치’로 규정하면서, 내용보다는 빈도를, 성과보다는 표현이 거칠다고 부각한다. ‘좌아하게’ 같은 표현 하나를 두고 ‘지지층만 의식한다.’라고 비난하는 시각은 전형적인 예다. 국민이 다양한 언어와 맥락을 직접 접하고 판단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태도는, 국민을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해방 81년 ‘우아하게’ 반민족 행위자들이 살아왔던 걸 돌아본다면 감히 ‘좌아하게’를 비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삼류 여론에 길들여진 우리 스스로 주제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 시선이 지속할수록 국민의 정치적 품격은 오히려 낮아진다. 직접 읽고, 비교하고, 반박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레거시 언론의 비즈니스 모델과 권력 구조는 게이트키핑에 의존한다. 정보가 걸러지고 가공된 뒤에야 국민에게 도달하는 구조에서, 대통령이 그 과정을 우회하면 그들의 존재 이유가 약해진다. 과거 수십 년간 한국 언론은 정권의 홍보 수단이거나 반대로 정권 공격의 도구로 기능하면서, 국민에게는 ‘복잡하니 우리가 정리해 주겠다’라는 태도를 반복해 왔다. 그 결과 형성된 것은 주권자의 능동적 판단 능력이 아니라, 자극적이고 단순화된 프레임에 익숙해진 소비자의 습관이다. 지금 진행되는 대통령 죽이기는 그 습관의 연장이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정책의 미흡함이나 외부 환경이 아니라 대통령의 ‘과잉 발언’으로 돌리는 방식은, 국민이 원문을 마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태도의 반영이다.
다른 하나의 장벽은 당내 강경파의 방해다. 검찰개혁과 인사, 개혁 노선을 둘러싼 내부 논쟁은 단순한 정책 차이가 아니다. 유시민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의 공개적 비판, 중수청장 인사 등을 둘러싼 공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진영 내부의 감정적 대립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지속적으로 흔든다. 강경파는 개혁의 속도나 방향이 자신들의 기대와 다를 때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갈등을 언론이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소재로 제공한다. 대통령이 SNS에서 내부 논쟁에 직접 대응하는 모습은, 이러한 방해 속에서 메시지를 왜곡 없이 전달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러나 레거시 언론은 그 시도를 ‘진영 내부 싸움에 매몰된 소통’으로 재단한다. 강경파의 방해가 언론의 프레임과 만나면, 대통령의 직접 소통은 이중으로 공격받는다. 한쪽에서는 ‘내부 관리를 못 한다’라고 비판하고, 다른 쪽에서는 ‘지지층만 의식한다’라고 비판한다. 그 사이에 끼인 국민은 원문과 가공본 사이에서 판단할 기회를 잃는다.
이 이중 압박 속에서 대통령이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는 몸부림은 안타깝다. 지지율이 하락하고 내부 갈등이 공개화되는 국면에서, 언론 기득권의 왜곡과 강경파의 방해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대통령이 “어려울수록, 왜곡된 공격이 심할수록 더욱 국민과 직접 소통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 안타까움을 스스로 인식한 결과다. 116건이라는 숫자는 그 인식의 산물이다. 빈도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없다. 주요국 지도자 가운데 더 많은 글을 올리는 사례가 존재하고,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9월 게시물의 상당수는 정책 홍보와 현안 설명, 그리고 왜곡에 대한 직접 반박으로 구성된다. 이를 중독이나 맞짱으로 축소하는 것은, 대통령이 국정을 설명하는 행위와 여론전을 구분하지 못하는 언론의 한계를 드러낸다. 여당 내부의 일부 우려도 마찬가지다. 내부 논쟁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국정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공개 밀실에서 결정된 뒤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이 더 큰 불신을 낳아 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품격이란 결국 누구를 향하는가의 문제다. 권위주의적 품격은 거리를 두고, 말을 아끼고, 국민을 일정한 거리에서 관리하는 태도를 미덕으로 삼는다. 민주적 품격은 그와 다르다. 주권자에게 가능한 한 원문에 가깝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소음과 논쟁을 감내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물론 그 방식에도 한계는 있다. 인용한 글의 작성자 배경이 논란이 되거나, 표현이 거칠어 보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이유로 직접 소통 자체를 축소하라는 요구는, 결국 ‘다시 우리가 걸러 주겠다’라는 재래식 언론의 논리다. 그 논리가 반복될 때마다 국민은 원문과 가공본 사이에서 판단할 기회를 잃고, 정치를 남이 정리해 준 이야기로 소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품격 없는 정치 환경의 출발점이다.
당내 강경파의 방해와 레거시 언론의 대통령 죽이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는 대통령의 시도는 안타까운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을 ‘과잉’이나 ‘품격 저하’로 규정하는 보도는, 국민을 저품격의 소비자로 만들어 온 구조의 주접에 불과하다. 시사팩트 플러스와 같은 서사가 반복하는 우려는 따라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국민을 정보 소비자의 자리에 묶어 둔 구조가, 그 구조가 흔들릴 때마다 내는 반응이다. 대통령이 하루 몇 건을 올리는지는 부차적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글들이 국민이 직접 읽고 판단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판단의 공간을 언론과 당내 세력이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있다. 재래식 언론이 품격을 말하려면, 먼저 자신들이 만들어 온 저품격의 정보 환경과 그 환경을 이용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방식을 돌아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116건이라는 숫자는 계속 불편한 숫자로 남을 뿐이다. 그 불편함의 책임은 글을 올린 사람보다, 그 글을 국민이 직접 마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쪽에 더 많이 있다. 강경파의 방해와 언론의 죽이기가 겹치는 국면에서,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안타깝지만, 그 안타까움이야말로 민주적 품격의 최소한의 조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