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중반은 철학자가 많았던 시대다. 이념과 혁명의 세기였기 때문이다. 강단의 철학자가 혁명가가 되면 바로 현실을 주무르는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사상은 논문이 아니라 조약이 되었고, 조약은 국경을 다시 그렸다. 헤겔의 세계정신은 개별 국가의 이기심을 관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성의 행진이었다. 그 확신이 20세기를 움직였다. 그 확신이 무너진 자리가 오늘의 지정학이다.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1902–1968)는 그 전환을 몸으로 산 인물이다. 러시아 부유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혁명 후 유럽으로 빠져나왔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코제브니코프이고, 삼촌이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다. 1936년 칸딘스키 미학 에세이를 썼다. 진중권의 이것 저것 어디서 주어들을 것을 편집한 『미학 오디세이』와는 차원이 다른 글이다.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고,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카를 야스퍼스 지도 아래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종교철학으로 논문을 썼다.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인간의 연합이었다. 신비주의에서 출발한 사람이 나중에 관세와 공동시장의 설계자가 된 것이다. 코제브에게 역사의 완성은 황홀경이 아니라 행정이다.
1933년 가을, 파리의 천재들이 다니는 에콜 노르말 슈페리엘의 작은 강의실에 러시아 억양이 섞인 프랑스어가 울렸다. 서른한 살의 망명객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한 줄씩 소리 내어 읽고 해석했다. 청중 가운데에는 자크 라캉, 조르주 바타유, 모리스 메를로퐁티, 레몽 아롱, 레몽 크노가 있었다. 헤겔은 역사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칸트철학이다. 독일어가 아니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철학이다. 세미나는 6년 동안 이어졌고, 20세기 프랑스 사상은 그 방에서 헤겔을 새로 배웠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지만, 공기처럼 퍼져 나간 그 해석을 들이마시며 자랐다. 코제브가 두꺼운 책에서 등불처럼 치켜든 장은 하나였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핵심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독일척학을 더 배우기 위해서 독일에 가서 훗설로부터 현상학을 배웠다.
코제브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를 길러낸 도시를 보아야 한다. 그는 1902년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삼촌은 바실리 칸딘스키였다. 훗날 조카는 삼촌의 추상화에 관한 미학 에세이를 쓴다. 대상을 지운 캔버스 위에서 색과 선만으로 정신을 드러내려 한 삼촌이 있었고, 역사라는 거대한 캔버스에서 정신의 완성을 보려 한 조카가 있었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와는 차원이 다른 글이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이상할 만큼 풍요로운 지성과 예술의 땅이었다. 칸딘스키, 샤갈,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프, 나보코프가 그 땅에서 나왔다. 흔히 이것을 러시아 영혼의 깊이나 슬라브적 신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혼만으로는 캔버스를 살 수 없고 오케스트라를 유지할 수 없다. 그 뒤에는 돈이 있었다.
비테 백작의 산업화 이후 러시아는 철도를 깔고 공장을 세우며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나라였다. 모스크바의 섬유 재벌 슈킨과 모로조프는 파리 화상들이 채 알아보지도 못한 마티스와 피카소를 사들였다. 트레티야코프는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으로 미술관을 세웠고, 철도 재벌 마몬토프는 아브람체보 영지를 예술가들의 공방으로 내주었다. 비텝스크의 가난한 유대인 청년 샤갈이 파리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도 후원자의 돈 덕분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에 스며 있는 초원의 우수는 탐보프의 이바놉카 영지, 지주 계급의 여름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예술은 축적된 자본이 피워 올린 꽃이다. 러시아의 은세기는 그 루블 위에서 피었다.
1914년 프랑스 경제학자 에드몽 테리는 러시아 경제를 조사한 뒤, 이 추세라면 20세기 중반에 러시아가 정치·경제·금융에서 유럽을 압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쟁과 혁명만 없었다면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광대한 영토와 자원, 폭발하던 인구, 막 불붙은 산업, 그것을 누릴 줄 아는 문화적 엘리트까지 갖추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뻔했다.
그러나 1917년이 왔다. 혁명은 자본을 몰수했고, 자본이 길러낸 사람들을 국경 밖으로 흩어버렸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로, 샤갈은 파리로,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망명 후 작곡을 거의 하지 못했다. 고향의 초원이 사라지자 선율도 말라버렸다. 소년 코제브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 체카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920년 국경을 넘었다.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고, 카를 야스퍼스 지도 아래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종교철학, 곧 신과 인간의 합일에 관한 논문을 썼다. 혁명에 쫓겨난 부르주아의 아들이 평생 혁명의 역사철학을 붙들고 살았다는 것은, 20세기가 즐겨 쓰던 종류의 아이러니다.
코제브가 읽은 헤겔의 이야기는 이렇다. 태초에 두 자기의식이 만나 인정을 두고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는 주인이 되고, 죽음 앞에서 물러선 자는 노예가 된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이 만들어낸 것을 향유하기만 한다. 그런데 역사의 비밀은 여기서 뒤집힌다. 주인은 향유 속에서 정체되지만,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한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고 사물을 빚어내면서 노예는 세계를 이해하고, 마침내 보편적 의식에 이른다. 역사를 앞으로 밀고 가는 것은 주인의 칼이 아니라 노예의 손이다.
코제브에게 역사란 노예가 해방되어 가는 긴 과정이었다. 그 끝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국가”가 탄생하고, 그때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더는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는 세계, 적도 동지도 없는 세계다. 그는 이 믿음을 실천했다. 전쟁이 끝나자 강단을 떠나 프랑스 경제부의 관료가 되었고, 관세무역일반협정의 협상 테이블과 유럽경제공동체 설계의 뒷방에서 일했다. 철학이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는 역사의 종말을 관리하면 된다는 태도였다. 유럽 통합은 그에게 헤겔의 정신이 브뤼셀의 행정 문서로 육화하는 과정이었다. 노예의 노동이 쌓아 올린 이성이 국경을 녹이고, 수백 년을 싸워온 유럽 민족들이 하나의 동질적 공동체로 화해하는 것이었다.
그의 오랜 벗 레오 스트라우스는 대서양 건너에서 경고했다.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국가는 해방이 아니라 전례 없는 전제정이 될 것이며, 그 안의 인간은 더 이상 위대함을 꿈꾸지 않는 짐승이 될 것이라고. 두 사람은 평생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했지만 끝내 서로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 줄기가 나중에 미국 네오콘과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으로 갈라져 흘러간다. 스탈린을 긍정했던 러시아 망명 철학자의 헤겔이, 한쪽에서는 유럽 통합 관료국가를, 다른 쪽에서는 미국 보수 지식인의 세계관을 먹여 살렸다. 한국으로 치면 강남좌파의 먼 정신적 조상에 가깝다.
1957년 코제브는 뒤셀도르프에서 강연을 했다. 그를 초청한 사람은 카를 슈미트였다. 한때 제3제국의 헌법학을 정당화했던 법학자, 전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되어 고향 플레텐베르크에 은거하던 노인이었다. 역사의 종말을 믿는 철학자와 역사란 영원한 투쟁이라고 믿는 법학자가 한 자리에서 마주한 것이다.
슈미트의 세계는 코제브의 세계와 정반대였다. 그에게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데 있다.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며, 법 위에는 언제나 결단하는 권력이 있다. 보편적 인류라는 말은 적을 인류의 적으로 몰아 섬멸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그는 1939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을 모델 삼아 ‘광역(Großraum)’ 이론을 세웠다. 강대국은 자기 권역을 선언하고 그 안에 외부 세력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것은 독일이 동유럽을 자기 앞마당으로 삼는 논리가 되었다. 전후 반세기 동안 이 이론은 독재에 복무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서가의 가장 어두운 칸에 꽂혀 있었다. 세계는 코제브의 편인 것처럼 보였다. 냉전이 끝나자 그의 미국인 독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러나 코제브는 한 가지를 잘못 보았다. 노예가 노동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반드시 보편성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예는 해방되었다. 노동자는 투표권을 얻었고 노동조합을 만들었으며, 복지국가의 주주가 되었다. 그런데 해방된 노예가 원한 것은 모든 인간의 상호 인정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주인의 자리였다. 노동자는 자본가만큼 이기적이었다. 자기 임금을 지키기 위해 이민자에게 문을 닫았고, 자기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를 경쟁자로, 나아가 적으로 불렀다. 그들의 정치적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이해관계를 따랐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실험은 이미 그 결말을 보여주었다. 노예의 이름으로 세운 국가에서 노멘클라투라라는 새로운 주인들이 태어났다.
인정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동질적 국가 속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원한과 질투의 형태로 모습을 바꿔 되살아났다. 유럽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은 이제 사민주의 정당이 아니라 국경과 장벽을 약속하는 정당에 표를 던진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리라던 노예는 슈미트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그들 역시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데서 정치를 시작한다.
오늘의 유럽을 보라.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를 원망하고, 한 나라 안에서도 잘사는 소수와 못사는 다수가 갈라선다.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자 통합의 이상은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무력해졌다. 아프리카 대륙에 박힌 스페인의 고립 영토 세우타의 철조망 앞에서 유럽은 자기 문 앞의 문제조차 풀지 못한다. 2026년 7월 말 모로코에서 7만에서 8만 명이 밀려들었다. 인구 8만 도시에 자기 몸집만 한 인파가 며칠 사이 국경을 넘었다. 그러면서도 우크라이나를 품겠다는 확장의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코제브의 유령이 브뤼셀의 회의실을 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꿈은 고결하지만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코제브의 세계가 무너지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슈미트가 돌아온다. 대서양 건너 먼로주의의 부활과, 법복을 입은 채 적을 가리는 한국의 사법정치가 그 뒤를 잇는다.
조희대는 이재명을 정말 싫어한다. 얼마 전 조희대와 같이 일했던 전직 판사와 술을 마셨다. 고등학교 후배라 편하게 물었다. “조희대 왜 저러냐.” “형님, 조희대는 잘못했어요. 그런데 이재명을 너무나 싫어해요.” 상식적으로 법관은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출세한 법관일수록 편견을 숨긴 채 한쪽 세력에 성공적으로 베팅한 사람들이다. 법복은 중립의 상징이지만, 대법원의 정점은 이미 정치의 고지다.
지금 대법관 재제청 거부 사태가 그 본색이다.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자리가 반년 넘게 비어 있다. 조희대는 청와대와 합의 없이 손봉기 부장판사를 서면 제청했고, 이재명 대통령이 순방에 오르자마자 재제청 요구를 거부했다. 겉으로는 삼권분립과 법의 정신이다. 코제브식 언어다. 속은 상대를 적으로 고정한 슈미트다. 윤석열 국면에서 쌓인 적대를 법복 뒤로 숨긴 채 유지하는 것이다. 슈미트보다 나쁘다. 슈미트는 적이 누구인지 공개했다. 조희대는 정의의 언어로 적대를 세탁한다. 법원이 정치를 하면서 정치가 아니라고 우길 때, 그 우김 자체가 정치다.
조희대는 법의 정신, 삼권분립 같은 근사한 추상명사를 내려놓아야 한다. 정치의 정글로 나와 적을 인정하든가, 철밥통을 끼고 침묵하든가. 기름장어처럼 자기는 다치지 않으면서 정치적 배당만 받으려 하지 말라. 트럼프처럼 정치를 할 거면 정치인으로 나와라. 관료로 남을 거면 낙엽만 떨어져도 가슴이 철렁하는 소녀 같은 신경으로 대중 앞에서 윤석열의 잔상을 연기하지 말라. 코제브는 틀렸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법복을 입은 슈미트는 가장 편리한 복장이다.